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나는 왕이로소이다] - 망가짐은 한 순간이지만 회복마저 한순간이어서는 안된다.

쭈니-1 2012. 8. 16. 09:38

 

 

감독 : 장규성

주연 : 주지훈, 박영규, 임원희, 김수로, 백윤식, 변희봉, 박영규, 이하늬

개봉 : 2012년 8월 8일

관람 : 2012년 8월 13일

등급 : 12세 관람가

 

 

8월 13일의 영화 바다 제 2탄...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제작보고회가 끝난 시간은 12시. 일단 저는 지하철을 타고 압구정에서 종로 3가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저녁 블친들과 피카디리 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 벙개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 시간인 오후 6시 30분이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은 상황. 저는 약속 시간이 되기 전에 실컷 영화를 보며 시간을 떼울 생각이었습니다.

여름 휴가중이지만 회사에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출근해버린 구피를 대신해서 제 영화 일정을 쫓아와준 처남과 함께 생선구이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곧바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관람했습니다. 아무래도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도 언급된 영화였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더불어 지난 주말에 개봉한 영화 중에서는 기대작으로 손꼽혔던 영화였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주연을 맡은 주지훈이라는 배우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했고,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 전개도 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단지 코미디 연기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품 조연들의 코믹 연기로 영화를 보는 내내 실컷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임원희, 김수로, 백윤식, 박영규 등의 코믹 연기는 이미 정평이 나있으니까요.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대이하였습니다. 함께 영화를 봤던 처남도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이다'라고 불평하더군요. 저 역시 딱 그랬습니다. 영화를 보며 실컷 웃기에는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딱 그랬습니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역사극은 싫더라.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를 코믹하게 재해석하며 시작합니다. 조선 초기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님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태종. 그리고 맏아들이면서 세자의 자리를 거부한 양녕과 그로인하여 세자에 책봉된 충녕. 사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TV 사극 '용의 눈물'을 통해 일반인들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1996년 11월부터 1998년 5월까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은 명품 사극으로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코믹하게 재해석한 것은 바로 그러한 '용의 눈물'이었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조선 초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태종을 아무한테나 이단옆차기나 해대는 괴팍하고 성질급한 폭군으로 설정했고, 아버지대의 피비린내나는 권력 다툼을 목격한 후에 권력의 무상함을 깨닫고 세자의 자리를 거부한 양녕은 개망나니가 되어 있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은 책 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유약한 왕자가 되어 있었고요. 이렇듯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역사속의 인물을 코믹하게 망가뜨려 놓고 시작을 합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속 인물들을 코믹하게 망가뜨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번듯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로 관객들을 웃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문제는 제 취향입니다. 저는 사극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역사 속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관객을 웃기기 위해서 역사 속의 인물들을 망가뜨리는 영화에는 별다른 영화적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과 [평양성]을 제가 재미있게 보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역시 그러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태종, 양녕, 충녕의 파란만장한 삶과 카리스마를 살리면서 관객을 웃길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굳이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망가뜨려 놓고 그렇게 망가진 캐릭터 만으로 저를 웃기려드니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망가짐은 한 순간이지만 회복마저 한순간이어서는 안된다.

 

네, 인정합니다. 제가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재미있게 볼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화의 문제가 아닌 제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 취향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분명 부족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완성도가 부족하다고 하는 이유는 충녕의 캐릭터 변화가 공감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역사 속의 인물들을 망가뜨려 놓고 그 속에서 코미디적 요소를 구축하는 영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박영규)과 양녕(백도빈)의 망가짐은 영화의 코미디를 위해 결국 회복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충녕(주지훈)은 다릅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바로 충녕의 망가짐을 회복시키는 것일겁니다.

충녕이 누굽니까? 한글을 창제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불리우는 세종대왕입니다. 아무리 코미디 영화라고 할지라도 충녕대군을 망가뜨려 놓고 영화를 끝낼 수는 없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영화 초반 설정부터 망가진 충녕을 망가짐에서 서서히 회복시켜 결국에는 성군이 되는 성장담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쉬울리가 없습니다. 어느 한 캐릭터를 망가뜨리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망가진 캐릭터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러닝타임이 제한된 영화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충녕의 망가짐을 회복시켜 그를 성군으로 성장시킴과 동시에 충녕 대신 궁에 들어간 덕칠(주지훈)과 수연(이하늬)의 애절한 사랑과 신익(변희봉)의 음모도 진행시켜야 합니다.

이렇듯 해야할 일이 많으니 충녕이 성군이 되는 과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자꾸만 그 분량이 줄어듭니다. 탐관오리들의 횡포 속에서 백성들이 당해야할 고난을 충녕이 충분히 느끼고 깨달아야 하거늘, 다른 이야기들을 진행시키면서 코미디적 요소들을 잃지 않으려 하니 충녕의 성장을 담는 것은 제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 충녕은 자기 자신만 아는 유약한 왕자에서 백성을 살피는 성군이 되어 있었고, 궁으로 돌아가 중국 명나라의 사신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당찬 왕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분명 그러한 충녕의 변화는 속 시원했지만 너무 속전속결로 진행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충녕을 덜 망가뜨려야 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꽤 좋은 기획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왕자와 거지'를 조선 시대에 접목시킨 아이디어도 좋았고, 그 대상을 충녕으로 설정하면서 유약하고 이기적인 충녕이 우리나라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대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로 발전시킨 것 역시 좋았습니다.

하지만 장규성 감독은 망가뜨린 충녕을 원상태로 돌려 놓아야 하는 것에 대한 좀 더 심도깊은 고민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냥 대충이 아닌 영화를 보는 관객들 모두 공감을 할 수 있는 그런 전개를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물론 러닝 타임이 제한된 영화라는 장르에서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을 공감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바로 충녕을 덜 망가뜨리면 쉽게 해결될 문제인 것입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관객을 웃길 캐릭터들을 넘쳐납니다. 특히 충녕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는 호위 무사 황구(김수로)와 해구(임원희)는 굳이 충녕을 망가뜨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충녕의 주위에서 웃음을 유발시킬 수 있었습니다. 정 충녕을 망가뜨리고 싶었다면 충녕 대신 궁에 들어간 덕칠로 그 뜻을 이룰 수도 있었습니다.

 

충녕만 덜 망가뜨렸다면 그의 망가짐을 회복하는 것 역시 쉬웠을 것이며, 그가 성군이 되는 과정 역시 더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영화의 웃음은 그 주위 인물들에게 맡기고 충녕에게는 성군으로의 성장에 대한 임무만 안겨줬어야 했습니다. 충녕마저 제대로 망가뜨려 그에게도 관객을 웃기는 임무를 부여한 것은 장규성 감독의 너무 과도한 욕심인 것입니다.

분명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덜 망가짐으로서 영화를 보는 제 공감을 불러 일으킨 캐릭터도 존재합니다. 바로 황희(백윤식)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그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유일하게 적당히 망가진 캐릭터입니다. 충녕도 그러했어야 했습니다. 

유약하고 이기적이던 충녕이 백성들의 고난을 헤아릴줄 알고, 명나라 사신을 윽박지를 줄 아는 당찬 성군으로 성장한 영화의 후반부에서 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충녕의 변화에 대해서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 2% 부족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충녕을 망가뜨려 웃음을 확보하려는 야망은 좋았다.

하지만 망가짐을 제대로 회복시킬 자신이 없다면

충녕을 적당히 망가뜨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