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프랭크 오즈
주연 : 니콜 키드만, 매튜 브로데릭, 베트 미들러, 글렌 클로즈, 크리스토퍼 워큰
개봉 : 2004년 10월 1일
관람 : 2004년 10월 6일
1998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자주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았던 저는 그래도 [타이타닉]만큼은 극장에서 보기로 결심했죠. 하지만 인터넷 예매도 없었고, 요즘처럼 멀티플렉스 극장도 강변 CGV가 전부였던 그 당시엔 흥행중인 영화를 보려면 며칠전에 극장앞에 줄을서서 예매를 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저는 무작정 극장으로 향했고 매번 [타이타닉]의 매진으로 원치않던 다른 영화를 보고와야 했습니다. 그때봤던 영화가 [도망자 2], [인 앤 아웃],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등이 있습니다.
2004년... 이젠 극장에서 줄을서서 영화표를 예매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왠만한 극장은 멀티플렉스로 스크린이 10여개는 되고 영화를 보기위해 머니먼 종로까지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6년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지만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무작정 대책없이 극장으로 향하는 제 게으름입니다. 오랜만에 평일에 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에 갔지만 이게 왠걸... 보고 싶은 영화가 단 한편도 없더군요. 고작 일주일에 한편정도밖에 안봤는데 스크린이 8개나되는 목동 CGV에선 제가 본 영화 아니면 제가 볼 생각이 전혀없는 영화들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기왕 극장까지 왔으니 영화는 봐야겠다는 생각에 애초에 볼 생각이 없는 영화들중 한편 고른 것이 [스텝포드 와이프]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단지 니콜 키드만이 나오다는 이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있자나 왠지 어디에선가 많이 본듯한 분위기가 느껴지더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스텝포드 와이프]를 보며 기억해낸 영화는 [인 앤 아웃]입니다. [인 앤 아웃]을 봤던 6년전도 오늘과 비슷한 상황이었죠. 게다가 블랙 유머속에 담긴 사회 비판의 메세지까지, 이 두영화는 정말 많은 부분이 닮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두 영화 전부 프랭크 오즈가 감독이더군요.
프랭크 오즈... 갑자기 그가 궁금해져 그가 만든 영화 목록을 살펴봤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연출한 10여편의 영화중에서 제가 본 영화는 고작 두편뿐입니다. 그런데 그 두편의 영화가 전부 볼 생각이 없었으나 어쩔수없는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선택하게된 영화들이니 이 정도면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죠? 암튼 [스텝포드 와이프]는 제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인 앤 아웃]이 그랬듯이 영화를 보고난후 한번쯤 영화속 상황에 대해서 가벼운 대화를 하게끔 만드는 매력은 있더군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니콜 키드만이라는 배우때문입니다. 눈부신 금발과 늘씬한 몸매, 게다가 카리스마 넘치는 당당한 연기력까지 갖춘 그녀는 미모와 연기력을 갖춘 몇안되는 헐리우드의 여배우중 한명입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그녀가 얼마나 멋진 모습을 보여줄지 잔뜩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제 기대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첫등장은 짧게 커트한 선머슴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영화의 포스터에도 나오는 그녀의 눈부신 금발은 어디로 갔단말인가?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방송국의 유능한 CEO였던 조안나(니콜 키드만)가 방송국에서 쫓겨나자 니콜 키드만의 모습은 점점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눈부신 금발은 커녕 당당하던 그녀의 생기마저 금새 잃어버리더군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조안나와 월터(매튜 브로데릭)가 스텝포드 마을로 이사가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스텝포드엔 제가 그토록 니콜 키드만에게서 기대했던 금발의 늘씬한 미녀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않고 오히려 촌스럽고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제가 그토록 원했던 늘씬한 금발이건만 오히려 짧은 검은색 커트 머리의 니콜 키드만과 뚱뚱한 배트 미들러의 모습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의 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프랭크 오즈 감독은 남성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완벽한 여성들의 모습을 마음대로 비꼽니다. 눈부신 긴 금발과 파스텔톤의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원피스, 인형같이 완벽한 몸매와 불평불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화사한 미소, 게다가 남편을 향한 무조건적인 순종까지... 스텝포드의 여자들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음직한 이쁘고 착한 완벽한 현모양처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영화속 당당한 여성 캐릭터를 좋아하는 저도 이 영화를 선택하며 금발의 아름다운 니콜 키드만의 모습만을 기대했으니 저역시도 스텝포드의 속물 남편들과 하나도 다른 점이 없겠죠.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그 완벽한 여자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따윈 없고, 단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속이 꽉찬 수동적인 스텝포드의 여자들을 보며 과연 '나도 저런 완벽한 아내를 갖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는 관객이 있을까요? 이 영화의 주제는 비록 진지하지는 않지만 꽤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객들을 설득합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죠.
그러나 이 영화가 정말 재미있다고 자신있게 추천하기엔 뭔가가 부족합니다. 그것은 스텝포드 마을의 비밀이라는 재미난 영화적 상황을 마지막까지 끌고가지 못하는 감독의 조급증에서 비롯됩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완벽하다고 믿어왔던 여성의 이미지가 얼마나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그럼과 동시에 스텝포드 마을의 무서운 비밀이 담긴 스릴러 영화이기도 합니다. 만약 [스텝포드 와이프]가 이 두가지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면 이 영화는 정말 대단한 걸작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프랭크 오즈 감독은 조급하게 블랙 코미디만 취하고 스릴러적인 요소는 서둘러서 버립니다.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만약 이 영화가 마지막까지 마을의 비밀을 유지하며 그러한 비밀을 벗겨나가는 조안나의 모험담에 촛점을 맞추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 남자들의 허황된 꿈이 빚어낸 무시무시한 비밀을 벗겨냈다면 관객들은 스텝포드 여자들의 우스꽝으러운 모양새에 웃으며 마지막엔 무시무시한 반전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프랭크 오즈 감독은 너무 빨리 마을의 비밀을 벗깁니다. 이렇게 너무 빨리 마을의 비밀이 벗겨지자 이 영화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해진 길을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부하게 라스트를 향해 걸어나갑니다. 영화의 마지막 반전이 외외이긴 했지만 그런 작은 반전가지고는 너무 뻔하게 진행되던 중반부 이후의 진부함을 가릴수는 없었습니다.
프랭크 오즈 감독의 영화와는 이상한 인연으로 인해 예기치않게 두편이나 극장에서 봤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를 기대하며 개봉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후 극장으로 달려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그의 영화를 또 보게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 앤 아웃]과 [스텝포드 와이프]처럼 예기치않은 상황에서 어쩔수없는 선택에 의한 것이겠죠. 뭔가 블랙 코미디를 넘어서지 못하는 그의 연출력이 아쉽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오며 구피는 제게 묻습니다. '저런 아내를 원해?'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난 돈 잘 버는 아내가 좋아' 비록 농담이었지만 정녕 저는 스텝포드 마을의 여자들처럼 완벽한 아내는 원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선 그런 완벽한 이미지의 아내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기계적인 아내에게서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물론 친구들과 밤새 술마셨다고 바가지를 긁힐 필요도 없고,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피곤해질 필요도 없을 겁니다. 휴일날의 나름한 오후에 설겆이와 청소때문에 달콤한 쇼파의 유혹을 뿌리치고 일어서야하는 번거로움도 없겠죠. 분명 스텝포드 마을의 여자들과 같은 아내를 얻는다면 편안한 생활을 할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편안한 것과 사랑하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일겁니다.
여전히 구피는 제가 영화만 좋아하고 가정에 소홀하다며 바가지를 긁고, 총각이었던 시절에 즐겼던 밤샘 당구와 술자리는 이젠 꿈도 꾸지 못하지만 여전히 저는 행복합니다. 그녀가 스텝포드의 여자들처럼 파스텔톤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가사일 외엔 다른 것엔 관심조차 없으며, 제 말에 무조건적인 순종을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끔찍하더군요. 그러게 사느니 애완 동물과 가정부를 데려다놓는 것이 나을 것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비록 [스텝포드 와이프]는 그리 재미난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의미한 영화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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