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민규동
주연 : 임수정, 이선균, 류승룡
개봉 : 2012년 5월 17일
관람 : 2012년 5월 24일
등급 : 15세 관람가
내 아내의 사정을 헤아리게 하다.
여유롭게 5월의 하루를 즐기겠다는 불가능한 계획으로 시작했던 제 연차 휴가날은 휴가 당일이 되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내 휴가인 만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편안하게 쉬고 싶었던 저와, 휴가날만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가정일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구피. 결국 저는 전날 집을 박차고 나와 한 밤중에 [돈의 맛]을 보고 오는 악수를 선택했습니다.
휴가 당일날 웅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일찍 일어났지만 전날 영화를 보느라 늦게 잔 후유증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했습니다. (정말 혼자 원없이 늦잠한번 자고 싶습니다.) 웅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극장에 가서 결국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보고, 근처 북적이는 식당에서 서둘러 점심 식사를 한 이후에 학교에 가서 웅이를 데려오고, 치과 병원에 가서 웅이 충치 치료하고, 태권도장에 데려다주고 나니 저녁이 되더군요.
태권도장으로 웅이를 데리러 가기 전에 저는 몇 십분 정도 쇼파에서 깜박 졸았습니다. 그 졸음이 얼마나 달콤하던지, 그대로 침대로 향해서 푹 자고 싶었지만 웅이를 데리러 태권도장으로 가야하는 상황. 구피가 퇴근하고 집에 온 시간 쯤에 저는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휴가였지만 출근하는 것보다 피곤하고 바빴던 하루는 그렇게 마감되었습니다. 밤이 되자 구피가 [맨 인 블랙 3]를 보러 극장에 가자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두번 생각하지도 않고 단 칼에 거절했습니다. 물론 [맨 인 블랙 3]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극장에 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봤기 때문인지, 구피에 대한 화는 '스르륵'하고 녹아 버렸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내 휴가인데 내 맘대로 쉬지 못하게 하는 구피가 야속했습니다. 툭 하면 내게 '하고 싶은 거 다 한다.'고 잔소리하는 구피. 하지만 진정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다했다면 일주일에 세 번은 극장에 가야하고, 두 번은 야구장에 가야하며, 주말마다 친구 모임, 동호회 모임, 회사 모임으로 매일 집을 비웠을 것입니다. 결국 저는 저 나름대로 가정에 충실하고 있는데 어쩌다가 한번 낸 연차 휴가마저 내 맘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하니...
그런데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보고 나니 구피의 그런 잔소리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끔은 내 사정만 생각하고 구피의 사정은 헤아리지 못했는데, 이렇게 영화를 보며 새삼 구피의 사정을 다시 깨닫게 되니...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최소한 제겐 고마운 영화였습니다.
당신이라면 연정인과 같은 아내를 견딜 수 있나?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일본 여행중인 정인(임수정)과 유학 중인 두현(이선균)의 첫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지진으로 인한 우연한 만남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영화라면 두 사람의 결혼으로 영화가 막을 내리게 되겠죠. 왜냐하면 결혼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정인과 두현의 결혼 7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진행시킵니다. 지진을 무서워하던 귀여운 정인. 하지만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이후에 정인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신문 배달부에게 독설을 퍼붓고, 대변을 보는 남편의 화장실로 처들어가 녹즙을 내밉니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옷을 훌러덩 벗는 것은 예사이고요.
어쩌면 정인은 이 세상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가시돋힌 말만 해대는 독설가 기질에서부터,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하며, 한번 꼬투리를 잡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집요함도 갖추고 있습니다. 두현이 정인과 간절히 이혼하고 싶어하는 심정이 이해가 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두현은 자진해서 강원도로 출장을 갑니다. 강원도에서 정인이 없는 삶을 만끽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내의 잔소리없이 하고 싶은거 다하는 생활...
사실 저도 그런 삶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퇴근하면 곧장 극장으로 향해서 보고 싶은 영화 전부 보고, 주말에는 TV에 프로야구를 틀어놓고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며 목청껏 응원도 하고, 내 맘대로 뒹굴거리며, 짜장면도 시켜먹고, 후라이드 치킨도 시켜먹고...
예전 어느 광고에서 아내와 아이가 여행을 떠나자 '올레'을 외치며 기뻐하는 남편들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구피가 없는 집을 꿈꾸며 자유를 갈망했던 적이 있었기에 두현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속사포와도 같은 아내의 잔소리에서 얼마나 탈출을 하고 싶었을까요? 우리가 결혼 전에는 '심심하다'라며 그렇게 탈출하고 싶었던 지루한 일상이 결혼 후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소중한 일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영화를 보는 이 세상의 모든 기혼 남성들은 두현의 편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러한 두현의 바람과는 달리 정인은 강원도까지 두현을 쫓아 옵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영화의 재미를 키워 나갑니다. 기혼 남성 관객을 두현의 편으로 끌어 들어들인 만큼 이 영화의 초반은 매우 성공적이라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변했나? 아니 남편이 변했다.
두현은 전설적인 카사노바 성기(류승룡)에게 아내를 유혹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물론 그러한 설정은 다분히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되었기에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성기라는 캐릭터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이고, 청부 유혹을 통해 이혼을 하려는 두현의 계획 또한 터무니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판타지적인 캐릭터 성기도 아니고, 청부 유혹을 하는 두현의 비현실적인 선택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로인하여 정인이 변하고, 정인을 향한 두현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기가 정인을 유혹하게 하기 위해서 두현이 억지로 만들어준 직장이지만 정인이 직장을 갖게 되면서 변하는 설정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예전에는 미래의 꿈이 현모양처였던 여자 아이들도 많았지만 요즘은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인생의 목표로 삼은 여성보다는 자신의 꿈을 적극적으로 이뤄나가려는 여성이 훨씬 많습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정인의 거침없는 독설을 정인이 너무 일찍 포기한 꿈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평소 하던대로 거침없는 독설을 뿜어 내는 정인. 자신의 일을 가진 정인은 점차 가정에서도 변해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녕 생각해봐야할 문제는 정인이 정말 변했나?라는 문제입니다. 어쩌면 정인은 그대로인데 정인을 바라보는 두현과 관객의 시선이 변한 것은 아닐까요?
정인은 독설가입니다. 자기 스스로 낙천적인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밝힐 정도로 언제나 불평 불만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한 정인이 라디오 방송을 하며 바뀐 것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라디오 방송에서 정인의 독설은 더욱 확고해집니다. 그녀의 불평 불만섞인 독설이 두현이 아닌 라디오 청취자에게 향한 것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인의 그러한 독설은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쾌감을 안겨주고, 그녀는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정인을 향한 두현의 시선이 바뀌게 되는 것이죠. 모두들 대단하다고 추켜 세우면 자기가 생각하기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한가?'라며 인식이 바뀌게 됩니다. 두현의 정인을 향한 바뀐 시선은 바로 그러한 정인의 유명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정인과 헤어지기 위해 성기에게 청부 유혹을 의뢰했던 두현. 이제 그는 정인이 성기와 사랑에 빠질까봐 안절부절하는 처지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영화적 설정이 덧붙여져 과장되게 표현되는데 영화를 보는 제게는 그러한 과정에 참 묘한 설득력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에 단점없는 사람이 없듯이 장점없는 사람 역시 없습니다. 내 아내의 단점을 먼저 볼 것인가? 아니면 장점을 먼저 볼 것인가? 그것은 아내의 몫이 아닌 남편 스스로의 몫입니다.
상식을 뛰어 넘는 캐스팅의 승리.
저는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보는 내내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내 결혼 생활과 구피의 사정을 뒤돌아보게 할 만큼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낸 영화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과장된 설정과 캐릭터를 이용해서 웃음을 유발시킨 영화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가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는 상식을 뛰어 넘는 캐스팅의 성공 때문입니다. 전설적인 카사노바 성기를 연기한 류승룡과 최악의 아내를 연기한 임수정, 그리고 찌질이 남편을 연기한 이선균은 영화를 보기 전에는 '캐릭터와 잘 어울릴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초적인 외모를 가진 카사노바 성기가 그러했는데, 지금까지 류승룡은 개성 강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여성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본능적인 카사노바를 연기하는데, 그의 낯 간지러운 대사들을 듣다보면 '정말 여자들이 넘어올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능글맞게, 또 매력적으로 카사노바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는지...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임수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초반 그녀가 두현을 향해 독설을 내뱉고, 옷을 훌러덩 아무데서나 갈아입는 장면을 보며 '저런 아내와 어떻게 살아?'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임수정이라는 배우가 가진 매력을 뒤집어 버리는 충격적인 변신이었는데, 그러한 변신이 또 굉장히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한 류승룡과 임수정의 데이트 장면은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졌습니다. [사랑과 영혼]의 도자기 데이트를 능가하는 젖짜기 데이트, 천연덕스럽게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을 카피하는 초시계 장면 등은 [내 아내의 모든 것]이 얼마나 능글맞게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를 넘나드는지 알수 있는 명장면이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결말이 너무 전형적이라 실망했지만 그러한 단점은 매우 작게만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는 단점보다 장점이 큰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웅이를 데리러 학교로 향하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 내가 미혼이고, 그래서 휴가 기간 내내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한다면 과연 저는 그러한 것의 소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휴가 일정이 있었기에 영화를 보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혼? 그것은 징글맞은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은 남편만의 짐은 아닙니다. 아내도 똑같이 그 짐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징글맞은 현실이 있기에 내 작은 자유는 더욱 소중해 지는 것이겠죠. 매일 그러한 진실을 깨달으면서, 또 쉽게 잊곤 합니다. 두현이 정인과의 결혼 생활의 소중함을 깨닫듯, 저 역시 구피와의 결혼 생활의 소중함을 깨닫고 극장을 나섰습니다.
그래, 고백한다. 나는 가끔 결혼을 후회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나의 결혼에 만족한다.
그리고 구피 역시 후회보다는 더 자주 우리의 결혼에 만족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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