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임상수
주연 : 김강우, 백윤식, 윤여정, 김효진, 온주완
개봉 : 2012년 5월 17일
관람 : 2012년 5월 23일
등급 : 18세 이상 관람가
나를 위한 휴가는 없다.
지난 연초에 회계 결산을 앞두고 갑자기 부하 직원 한 명이 회사를 관두면서부터 제 2012년은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해도 해도 회사 일은 자꾸만 쌓여만 가고, 뭔가에 쫓기듯이 일을 하니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갔습니다. 게다가 보고 싶은 영화를 놓치면 안달이 나는 성격이라 영화도 봐야 하고, 영화 이야기도 꼬박 꼬박 쓰고, 하루가 마치 전쟁과도 같이 치열했습니다.
그런 전쟁 같은 일과 끝에 드디어 제게도 여유가 찾아왔습니다. 회계결산을 잘 마무리하고, 재고조사와 춘계 체육대회까지 끝나고 나니 2012년이후 처음으로 조금의 여유가 찾아오더군요. 결국 저는 재충전을 하기 위해 오랜만에 회사에 연차 휴가를 냈습니다.
제 계획은 언제나 그랬지만 회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놓친 영화들을 모두 챙겨보기 였습니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한가지 계획이 더 있었습니다. 하룻동안 보고 싶은 영화를 모두 챙겨보기 위해 바쁘게 극장 시간표를 맞춰가며 밥도 굶고 뛰어다니기 보다는, 조금은 느긋하게 5월의 하루를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돈의 맛]과 [내 아내의 모든 것]만 보고, 남은 시간은 방에서 뒹굴거리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여유를 즐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여유는 제게 사치였나봅니다. 제가 연차 휴가를 낸다는 말을 들은 구피는 자기 마음대로 제 일정을 마구 조정하더군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웅이를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고(나의 늦잠이여, 안녕!!!) 웅이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야하고, 웅이를 데리고 치과병원에 들려 썩은 이빨 치료하고, 태권도장에도 데려다줘야 하고...
구피의 일정대로 스케쥴을 조정해보니 5월의 하루를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돈의 맛]과 [내 아내의 모든 것] 중 하나를 포기해야할 판이었습니다. 저는 최소한 영화 두 편은 봐야 겠다고 버텼지만 구피는 웅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영화 한 편보고, 다시 집에 와서 웅이를 치과 병원과 태권도장에 데려다주고 나머지 영화 한 편을 보면 되지 않냐고 우기더군요.
저도 힘듭니다. 구피의 말대로 한다면 분명 계획했던 영화 두 편은 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하루 종일 저는 집과 극장, 웅이 학교와 병원, 태권도장을 오고가며 뛰어 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결국 저는버럭 화를 내고 한 밤중에 집을 뛰쳐 나왔습니다. 가출? 아니죠. 구피의 스케쥴대로 움직이려면 영화 두 편보기는 무리인 만큼 전 날에 영화 한 편을 미리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세상의 고단한 가장들이여! 정녕 오로지 우리 자신만을 위한 휴가는 단 하루도 없단 말입니까?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한 밤중에 집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쟤 뭐하니?'라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구피를 뒤로 하고 무작정 차를 몰아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내 머리 속에는 이제 재충전을 위한 여유로운 휴가 따위는 깡그리 사라졌고, 어떻게든 [돈의 맛]과 [내 아내의 모든 것]만큼은 휴가 기간 내에 봐야 겠다는 오기만 남아 버렸습니다.
한 밤중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찾은 극장. 다행히 [돈의 맛]의 시간대가 맞더군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유쾌한 코미디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바랐지만 당시 상황은 이것 저것을 따질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돈의 맛]을 봤습니다.
[돈의 맛]은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감독 데뷔 후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하녀]등 문제작을 연출하며 명성을 쌓아온 임상수 감독의 영화입니다. 특히 이번 [돈의 맛]은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수상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대감 때문일까요? [돈의 맛]은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에서 44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내 아내의 모든 것], [어벤져스]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했습니다.
[돈의 맛]은 시작하자마자 거대한 금고 안에 가득 쌓여진 돈다발을 보여줍니다. 차곡 차곡 쌓여있는 5만원짜리 지폐 묶음과 달러 묶음들. 사실 별 장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그러한 돈의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돈을 산처럼 쌓아놓고 사는 재벌 백씨 집안의 추잡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되는 세상. [돈의 맛]은 그러한 한국사회의 치부를 여과없이 영화 속에 표현해 냅니다.
솔직히 속이 시원했습니다. 단돈 몇 만원에도 벌벌 떠는 소시민의 입장에서 돈을 산처럼 쌓아 놓고 지내지만 결코 행복해보이지만은 않은 백씨 집안의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그래 돈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지.'라고 자위를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한 백씨 집안에서 은밀한 뒷일을 맡아하는 주영작(김강우)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는데, 영화의 오프닝에서 영작은 윤회장(백윤식)의 묵인아래 산처럼 쌓여 있는 돈다발을 몇 개 훔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돈의 냄새만 맡고 돈다발을 내려 놓습니다.
그랬던 그가 점차 '돈의 맛'에 길들여지고, 결국 돈다발을 훔치기 시작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작이 '돈의 맛'에 길들여지면 질수록 그의 모습에서 웃음끼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돈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람들. 그 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행복 따위는 집어던지는 사람들. [돈의 맛]은 그러한 재벌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줍니다.
심하게 허무한 후반
문제는 관객들이 느낄 [돈의 맛]의 쾌감은 중반 이후까지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갑자기 백씨 집안의 하녀인 에바(마우이 테일러)와 진실된(?) 사랑에 빠지는 윤회장의 이야기에서부터 [돈의 맛]은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평생동안 '돈의 맛'에 중독되어 백씨 집안의 사위로 굴욕적인 삶을 살았던 윤회장. 그는 얼마전 이슈가 되었던 모 탤런트의 자살 사건까지 언급하며 에바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주장합니다.
영화는 그러한 윤회장의 뜬금없는 사랑 고백을 시작으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백금옥(윤여정)의 음모로 윤회장과 에바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는 안타까운 비극으로 막을 내립니다. [돈의 맛]이 성공적인 상업 영화가 되려면 바로 이 부분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안타까움을 느껴야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윤회장이 아닌 주영작이라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주영작의 입장에서 윤회장과 에바의 사랑은 늙은 재벌이 자기 딸 나이또래 하녀와 잠시 동안 즐긴 스캔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는 백금옥의 충실한 하인이 되어 그녀의 개인적 복수극을 도와주게 됩니다. 결국 관객의 감정이입이 윤회장이 아닌 영작이다보니 에바의 죽음으로 인하여 [돈의 맛]이 취한 것은 윤회장의 슬픈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에바를 죽음으로 몰고간 영작의 죄책감입니다. '돈의 맛'에 취해 어린 자식들이 있는 연약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영작의 죄책감.
그렇다면 [돈의 맛]의 후반부는 자명해진 셈입니다. 소시민에 불과한 영작이 잠시 '돈의 맛'에 취해 백씨 집안의 추악한 범죄에 가담하게 되고, 에바의 죽음으로 죄책감을 느낀 그는 백씨 집안을 향한 반격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임상수 감독의 독특한 화법은 그러한 반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능글맞은 재벌 3세 백윤철(온주완)에게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늘씬하게 얻어 맞는 영작의 모습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허무주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결국 '너희는 우리에게 안되'라는 윤철의 비아냥을 관객들은 고스란히 받아야합니다. 내가 당장이라도 달려가 윤철을 때려주고 싶을 만큼 돈의 힘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시민을 짓밟고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분노는 영화를 보며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관객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영작이 관객의 분노를 대신해줘야 하는데, 그는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백씨 집안에 대한 관객의 분노만 키워 놓고 임상수 감독은 아무런 반격없이 허무하게 영화를 마무리짓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털 끝하나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조차 그러한 현실을 맛보게 하다니... 임상수 감독의 허무주의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너무 가혹하기만 합니다.
[돈의 맛]은 [하녀]의 속 편? 그렇다면 완결은?
영화가 끝나고 여기 저기에서 '이게 뭐야?'라는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임상수 감독은 관객들에게 가진 자들의 횡포를 실컷 경험하게 해놓고는 결론에 가서는 그러한 가진 자들을 향한 못 가진 자들의 무기력을 이야기합니다. 영화에서만이라도 속 시원하게 가진 자들에게 한 방을 먹여 주고 싶은 관객들에게 허무하게 '우리는 그들에게 안되'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임상수식 허무주의는 [돈의 맛]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전작인 [하녀]에서 더욱 심했었습니다. [하녀]에서는 가진 자들에게 당하고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는 ([돈의 맛]의 에바와 같이) 은이(전도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녀는 가진 자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자신의 억울함을 온 몸에 불을 지르며 항변하지만 역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녀]에서 느꼈을 황당한 허무주의에 비한다면 [돈의 맛]은 상당히 양호한 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돈의 맛]에서 [하녀]의 은이의 최후를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백씨 집안의 장녀인 나미(김효진)에 의해서인데, 나미는 어머니인 금옥과의 대화에서 어린 시절 불에 타 죽은 유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그렇게 착한 유모를 죽음으로 내몬 것일까?' 나미의 의문에 금옥은 '네 나이가 몇 살이었는데 그날 일을 기억하니?'라고 놀라워합니다.
[하녀]의 마지막 장면은 분명 허무했습니다. '찍'소리라도 내야 겠다며 가진 자들 앞에서 자신의 온 몸에 불을 질렀던 은이. 하지만 그런 은이의 죽음은 그녀를 능멸하고 죽음으로까지 내몬 가진 자들에겐 하나의 귀찮은 해프닝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단지 은이를 엄마처럼 따르던 여섯 살 여자아이 나미만이 충격적인 표정으로 은이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돈의 맛]은 바로 이 시점에서 [하녀]와 연결이 됩니다.
[돈의 맛]이 허무하게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작이 은이와는 달리 '찍' 소리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할 기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나미라는 든든한 지원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미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이 아닌 [하녀]의 허무한 결말에 의해 탄생된 캐릭터인 셈이죠.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하녀]에서부터 이어져 [돈의 맛]까지 지배하는 임상수식 허무주의는 [돈의 맛]에 이은 마지막 영화에서 마무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영작과 나미의 반격. [돈의 맛]은 그러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아직 하고 있지 않은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돈의 맛]에 대한 모든 평가를 나중으로 밀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나서 너무 허무해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러한 허무함을 단번에 뒤집을 기틀을 마련하며 영화가 끝을 맺었으니, [돈의 맛]의 허무함이 결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일 것이라 아직은 믿어보고 싶습니다.
[돈의 맛], 이 한 편만 놓고 본다면 난 절대 임상수식 허무주의를 반길 수 없다.
하지만 [하녀]와 [돈의 맛]을 이은 또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난 참을성있게 기다릴 것이다. 소시민의 통쾌한 반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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