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은교] - 그의 늙음을 죄로서 대하지 마라!

쭈니-1 2012. 5. 2. 11:46

 

 

감독 : 정지우

주연 :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

개봉 : 2012년 4월 25일

관람 : 2012년 5월 1일

등급 : 18세 이상 관람가

 

 

근로자의 날... 은교를 만나다.

 

달력에 빨간 글씨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유일한 날은 바로 근로자의 날입니다.

항상 이맘때쯤 되면 회사 직원들이 제게 은밀하게 전화를 합니다. '우리 근로자의 날에 쉬어요? 안쉬어요?' 저희 회사는 창립이래 근로자의 날에 항상 쉬었지만 몇 십년을 근무한 직원들마저도 달력에 빨간 글씨로 쉬는 날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지 않은 근로자의 날에 쉬는 것이 어색한가 봅니다.

암튼 마치 보너스를 받은 기분으로 맞이한 근로자의 날 휴일. 전날 관리부 회식으로 과음을 한 탓에 컨디션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웅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극장으로 향하여 [은교]를 보고 왔습니다.

근로자의 날 휴일이라 그런지 극장 안에는 의외로 관객들이 제법 차있더군요. 특히 저처럼 혼자 온 관객들도 있었지만, 중년 부부가 함께 [은교]를 보기 위해 극장 나들이를 한 관객들도 꽤 있었습니다. 어쩌면 자녀들이 학교를 가는 근로자의 날 휴일이라 가능한 풍경이었을지도... 덕분에 한산한 극장에서 조용히 [은교]를 감상하려는 제 계획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은교]는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화제성은 성적인 것에 국한이 되어 있습니다. 남녀 배우의 성기 노출, 그리고 70대 노시인과 10대 여고생의 사랑 등등

소재자체가 파격적이고, 그러한 파격적인 소재를 국내 영화로는 보기 드문 성기 노출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만으로도 [은교]는 충분히 민망한 영화입니다.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제 뒤에 앉은 중년 부부 관객은 계속해서 민망한 헛웃음과 서로가 민망할 때 나누는 쓸데없는 대화로 제 영화 감상을 방해했습니다.(왜 사람들은 민망하면 말이 많아지는걸까요? ^^)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 영화가 전혀 민망하지 않았습니다. 70대 노시인과 10대 여고생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도 직설적이지 않았고, 영화 속에 드러난 성기 노출 역시 생각보다는 과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적요(박해일)에 감정이입을 한 저는 '선생님의 사랑은 더러운 추문'이라며 다그치는 서지우(박무열)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늙음이 죄가 아닌데, 왜 그의 사랑은 더러운 추문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욕망을 거세당한 그의 처절한 외침.

 

이적요... 그는 한국 문학사에서 모든 것을 이룬 대문호입니다. 그의 시는 교과서에 실렸고, 군청 사람들은 이적요 문학관을 지으려합니다. 하지만 이적요는 그러한 군청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말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데 무슨 문학관이냐, 이적요 문학관을 지으려면 내가 죽거든 해라, 하지만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이 장면은 [은교]에서 이적요라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아니 세상 사람들이 이적요라는 캐릭터에게 바라는 것을 표현한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적요는 70대 노인이고 모든 것을 이룬 한국 근대 문학사의 역사와도 같은 인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적요가 그러한 이미지를 안은채 조용히 역사 속에 파묻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은교(김고은)의 매력에 흔들리고 있는 적요를 보고 지우가 불안해하며 은교에게 더이상 선생님의 집에 가지 말라고 다그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적요를 만들기 위해서 그를 거세하고, 산송장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늙었다고 그에게 욕망이 없는 걸까요? 창작에 대한 욕망이 거세되어 자신의 이름으로 소설을 낼 수 없었던 적요는 제자인 지우의 이름을 빌립니다. 지우의 소설 '심장'은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적요는 지우에게 '새경을 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우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국 근대문학사의 역사와도 같은 적요의 세속적인 소설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적요가 자신의 소설 '심장'을 세상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우를 통해서였을 뿐입니다. 적요는 그렇게 창작에 대한 욕망을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로 인하여 거세당합니다.

그런 그가 은교를 만나고 활기를 되찾습니다. 산송장과도 같은 일상이 화사해졌고, 은교의 활발함에 웃음도 되찾았습니다. 지우는 그것을 더러운 추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더러운 추문인 것일까요? 은교에 대한 적요의 성적 욕망은 상상 속에서, 그리고 그가 써내려간 단편 '은교'에서만 이뤄집니다. 그가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조차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요?

결국 은교를 향한 자신의 욕망마저 거세당하고, 단편 '은교'마저도 지우에게 빼앗긴 적요는 무너집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단편 '은교'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는 지우 앞에서 적요가 한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그의 표정은 온화했지만, 저는 적요의 처절한 외침이 처렁처렁하게 들렸습니다.    

 

 

'헐'과 '할'의 차이

 

[은교]의 초반은 숨이 막히는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됩니다. 지우와 함께 식사를 하는 적요의 모습은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둔 노인의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담의 사다리를 넘어 은교가 적요의 일상에 들어오며 모든 것을 바뀝니다.

[은교]의 중반부는 의외의 웃음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죽음을 목 전에 둔 노인의 답답한 일상을 담은 초반과는 달리 은교가 등장하며 영화의 분위기는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에게 선물로 받은 은교의 거울을 줍기 위해 위험한 등산로 낭떠러지를 위태롭게 내려가는 적요의 모습, 그러한 적요에게 '거울은 주머니에 넣으면 될 것 같습니다.'를 외치는 지우의 다급한 목소리. 그 장면은 의도했던, 아니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겨줍니다. 

[은교]의 의외의 코믹 장면은 이 뿐이 아닙니다. 적요와 은교의 시내 데이트 장면 역시 생각하지도 못했던 웃음을 안겨주는데, 특히 '헐'이라는 것이 '감사합니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한 적요가 음식점 종업원에게 '헐'이라고 하는 장면은 세대 차이를 적극 활용한 장면으로 이 영화의 웃음 코드가 내포한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명 장면이었습니다.

 

[은교]의 소재가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 자체적으로는 은교의 젊음을 동경한 적요가 그로 인하여 삶의 활력을 되찾는 형식이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적요가 은교를 보고 음란한 상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파격적인 소재의 영화라며 수근거립니다.

결국 문제는 나이 차이입니다. 만약 적요의 활력을 되찾아주는 상대가 10대 소녀 은교가 아닌 70대 할머니라면 이 영화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류의 훈훈한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적요가 70대 노인 분장을 한 박해일이 아닌 젊은 박해일이 연기를 했다면 이 영화의 소재는 파격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은교와 지우의 자극적 섹스 장면에게 거부감을 드러낸 관객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몰래 훔쳐보는 적요의 모습에서 민망한 헛웃음을 짓는 관객들은 많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비슷한 단어로 보이는 '헐'과 '할'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새로운 것, 놀라운 것, 어이없는 것을 볼 때 내뱉는 신조어 '헐'과 불교에서 스승이 참선하는 사람들을 인도할 때 질타하는 일종의 고함 소리인 '할'의 차이만큼이나 늙음과 젊음의 간격을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의식은 이 영화를 파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늙음을 죄로서 대하지 마라!

 

은교의 등장으로 잠시 활기를 되찾았던 이 영화는 지우가 단편 '은교'를 훔쳐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 밖으로 내보내며 다시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은교를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았던 적요는 자신을 거세한 세상 사람들의 올가미에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70대 노인의 욕망을 민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듯이 적요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적교와 은교의 관계는 더러운 추문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적요는 그러한 사회의 시선을 모두 날려 버리려 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지우를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지우가 적요와 세상의 유일한 가교임을 감안한다면(실제로 출판사 사장의 방문에 적요는 자신의 대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지우를 향한 적요의 살기는 자신을 거세하고 그대로 박제하려고 하는 세상을 향한 분노와도 같습니다.

어쩌면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삼각 관계에 대한 치정 드라마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외형을 띄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늙음을 죄로서 대하는 세상을 향한 노 작가의 외침으로 들렸습니다. '나, 아직 죽지 않았다.'라는... [은교]의 원작이 박범신임을 감안한다면 적요는 박범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파격적인 러브 스토리를 보러 갔지만 그 안에 담겨진 것은 사랑이 아닌 거세당한 욕망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욕망을 거세당한 적요. 그의 안타까운 눈물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가슴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은교]는 [해피 엔드]의 과감함으로 감독 데뷔를 했지만 [사랑니]의 소심함으로 실망을 안겨줬던 정지우 감독이 과감함과 소심함을 적절하게 섞은 역작입니다. 적요의 욕망을 좀 더 파격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에서 소심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소심함은 과감한 소재와 맞물려 관객에게 영화의 주제를 적절하게 전달해줬습니다.

박해일의 노인 연기는 처음엔 조금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적요가 아름다운 젊음을 간직했던 노인의 젊음을 향한 동경과 욕망을 표현하는 캐릭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지우 감독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젊은 배우를 노인으로 분장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늙은 배우를 젊게 분장시키는 것은 특수효과를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니까요.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은교를 연기한 김고은입니다. 특별하게 예쁘지 않지만 평범한 여고생의 외모를 지닌 그녀는 과감한 연기를 무리없이 해내며 우리 영화게에 주목할만한 대형 신인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박무열의 연기는 매우 평범했는데, 그의 캐릭터가 세상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그런 튀지 않는 평범함이 더 잘 어울렸습니다.

 

 

별이라고 해서 같은 별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화라고 해서 같은 영화는 아니다.

그대들에게 이 영화가 파격적인 치정 드라마였다면,

내게 이 영화는 거세당한 노인의 세상을 향한 몸부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