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임필성, 김지운
주연 : 류승범, 고준희, 김강우, 김규리, 송새벽, 진지희, 배두나
개봉 : 2012년 4월 11일
관람 : 2012년 4월 18일
등급 : 15세 관람가
모두들 'NO!'라고 하는 영화를 가끔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지난 주에 개봉했던 영화 중에서 [배틀쉽], [간기남]과 더불어 [인류멸망보고서]는 제 기대작이었습니다. 한국영화로는 보기 드문 SF영화이며, [라스트 스탠드]를 통해 할리우드에 데뷔할 예정인 김지운 감독과 [남극일기],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독특한 공포영화를 만들었던 임필성 감독이 연출한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부스 영화라는 점도 제 이목을 끌었습니다.
일찌감치 [배틀쉽]과 [간기남]을 본 저는 [인류멸망보고서]를 볼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바쁜 회사일로 관람이 차일 피일 미뤄졌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인류멸망보고서]에 대해서 안좋은 소문들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이 '최악'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에서도 [인류멸망보고서]는 신작임에도 불구하고 주말 관객 3만명으로 겨우 9위에 턱걸이를 했습니다.
도대체 영화가 어떻길래? 청개구리와도 같은 제 심보는 다른 관객들의 반응이 '최악'이라는 평가가 나오면 나올수록 점점 [인류멸망보고서]에 끌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인류멸망보고서]를 기대했다가 이 영화에 대한 다른 이들의 평가를 듣고 안보겠다고 선언한 구피. 하지만 저는 [타워 하이스트]의 '아주 짧은 영화평'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구피는 각성하라!!!'라고 외친 끝에 결국 구피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래, 내가 졌다. [인류멸망보고서] 보러 가자.'라며 체념을 해버린 구피. 그렇게 저는 승리의 깃발을 높이 치켜 세우고 구피와 함께 목동 메가박스로 향했습니다.
'[인류멸망보고서] 보러 간다고 했더니 직원들이 모두 실망할거라며 말리더라.'라며 제게 눈을 흘기는 구피. 하지만 어쩌겠습니다. 모두들 최악이라고 하니 오히려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을요.
결국 그렇게해서 '얼마나 최악일까?'라는 호기심으로 [인류멸망보고서]를 관람하고야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평가는 '최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다'입니다.
솔직히 저는 [인류멸망보고서]가 흥미로웠습니다. 할리우드 SF영화의 단골 소재인 좀비, 로봇, 혜성 충돌과 같은 소재를 감독 특유의 개성과 상상력으로 비튼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할리우드의 SF영화처럼 만들 수 없다면 같은 소재라도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서 할리우드 SF영화와 차별화를 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멸망보고서]는 그러한 차별화 전략을 착실하게 수행하는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영화가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하는 이유는 영화가 어중간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B급 정서를 이어 받으며 할리우드 SF소재를 마구 비트는 블랙코미디로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 김지운 감독과 임필성 감독은 욕심을 부립니다. 두 감독은 이 영화가 단순한 블랙코미디에 그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를 주려합니다. 하지만 두 감독이 추구한 철학적 메시지는 이 영화의 블랙코미디와 충돌을 하며 [인류멸망보고서]를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영화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멋진 신세계] - 우리 사회를 풍자하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이 영화의 어중간함은 [인류멸망보고서]의 첫번째 에피소드인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버린 음식물 쓰레기. 그리고 그러한 비위생적인 음식물 쓰레기로 만든 사료를 먹은 가축들. 결국 그 가축들은 우리들의 입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멋진 신세계]는 처음부터 역겨운 음식물 쓰레기가 사료가 되고, 그러한 사료를 먹은 소고기가 음식점에 유통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햄버거를 먹었던 구피는 그 장면을 보면서 구토 증상을 호소했을 정도로 [멋진 신세계]의 첫 장면은 강렬합니다.
그 장면이 강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무심코 버린 비위생적인 음식물 쓰레기로 가공한 사료를 먹은 가축의 실상은 영화적 상상력이 아닌 실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미국의 광우병으로 인해 온 나라가 들썩였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미국의 소고기만 위험하고 한우는 안전한 것인지 [멋진 신세계]를 보니 뒤돌아 보게 됩니다.
임필성 감독은 [멋진 신세계]를 통해 우리 사회를 맘껏 풍자합니다. 좀비 바이러스에 오염된 소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뉴라이트 전국연합'이라는 자막을 보며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습니다. 어쩌면 임필성 감독은 진정으로 그들에게 광우병 소고기를 먹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비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뒤덮자 TV 90분 토론에 나와 원인과 대책을 논의하는 사회 지도층 사람들의 어이없는 행각은 이 영화가 가진 풍자의 힘입니다.
90분 토론에 나온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토론은 아무 근거없이 모든 것을 정부의 음모로 치부하고, 여성 정치인에게 여성 비하적 발언을 서슴치않고, 사안과는 전혀 상관없는 헛소리들만 늘어 놓으며 방송을 난장판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어쩌면 풍자에 불과하겠지만 가끔 TV 토론을 보면 정말 저런 정신나간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멋진 신세계]는 중반까지 꽤 멋진 풍자와 그럴듯한 좀비물로 분위기를 이어 나갑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에 가서는 좀비가 된 석우(류승범)와 유민(고준희)를 재회시키며 갑자기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이성을 잃은 좀비가 되었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던 석우와 유민.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석우와 유민이 좀비가 되어서도 서로의 감정을 잊지 않았을 정도로 사랑하긴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아무래도 러닝타임이 짧은 단편영화이다 보니 석우와 유민의 감정선을 그릴 시간적인 여우가 없었고, 그러한 가운데 무리하게 석우와 유민의 아련한 감정으로 영화를 마무리지으니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천상의 피조물] - 뭔 소리야?
[멋진 신세계]는 마지막 부분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인류멸망보고서]를 조금은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초반은 '정말 저럴수도 있겠다.' 싶어서 섬뜩했고, 이성을 잃은 좀비의 모습에서 다람쥐 쳇바퀴돌듯 아둥바둥거리며 살고 있는 소시민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 서글펐습니다. 석우와 유민의 감정선만 잘 살려냈다면 참 좋았을텐데...
하지만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천상의 피조물]은 [멋진 신세계]와는 또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미래의 사회. 어느 절의 가이드 로봇 RU-4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절의 스님은 RU-4에게 인명스님이라며 숭배를 하지만 로봇의 제조사인 UR은 RU-4의 이상 행동을 경계하며 RU-4를 해체하려 합니다.
마치 [아이, 로봇]과 [블레이드 러너]를 살짝 연상하게 하는 설정인데, 불교적 깨달음을 얻은 로봇과, 그러한 로봇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대비로 김지운 감독이 관객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남겨 주려고 했음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RU-4가 지껄이는 소리가 도대체 뭔소리인지 당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애초에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보러 간 것이 아니었고,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재미난 풍자의 가능성을 기대한 마당에 [천상의 피조물]은 갑자기 알아듣기 어려운 불교의 철학적 메시지를 관객 앞에 늘어 놓은 것입니다.
이건 너무 당황스러운 한 방이었습니다. 전혀 이런 분위기의 영화를 기대하지 못한 상황에서 펼쳐진 일이라 그 당황스러움은 더욱 더했습니다.
영화를 보며 RU-4가 하는 소리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고, UR의 회장인 강회장(송영창)이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로봇이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야기에 공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천상의 피조물]이 30분 내외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단편 영화라는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천상의 피조물]은 단편 영화의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짧은 러닝 타임동안 김지운 감독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영상을 통한 상황 이해보다는 캐릭터들의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상황을 이해시키려 합니다. 강회장의 열변이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장점은 영상이지 대사가 아닙니다. 소설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캐릭터들의 철학적 대사를 곱씹으며 읽고 또 읽어서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눈에 들어오는 영상없이 캐릭터들의 대사로 상황을 이해시키려 한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채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나 버립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관객의 공감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천상의 피조물]을 보며 김지운 감독이 말하고 싶은 철학적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캐릭터들의 대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한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한 귀로 빠져 나가버립니다. 결국 남은 것은 끝까지 [블레이드 러너]를 닮으려고 노력한 박도원(김강우)를 내세운 마지막 반전과 혜주 보살역으로 등장한 김규리의 그 커다란 눈에서 흐르는 억지스러운 눈물 뿐이었습니다.
[해피 버스데이] - 조금 재미있어 지려고 하니 끝나네.
결과적으로 제가 [인류멸망보고서]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마지막 에피소드인 [해피 버스데이]입니다.
어느날 아빠의 8번 당구공을 부셔버린 민서(진지희). 민서는 당구공을 사기 위해 정체불명의 사이트에 접속하여 당구공을 주문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민서가 주문한 당구공은 거대한 혜성이 되어 지구로 향해 날아옵니다. 민서로 인하여 지구 멸망이 임박해져 버린 것이죠.
[아마겟돈], [딥 임팩트] 등 한때 혜성 충돌은 할리우드에서 자주 써먹던 지구 멸망 소재였습니다. [해피 버스데이]는 그러한 소재를 살짝 비트는데 지구를 향하는 혜성이 8번 당구공 모양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 혜성에는 민서의 인터넷 아이디까지 적혀 있습니다.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해피 버스데이]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카이스트를 나왔지만 남들과는 다른 뇌구조를 가진 민서의 삼촌(송새벽)를 통해 블랙홀 이론 등을 꺼내들며 나름 그럴 듯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애초부터 [해피 버스데이]가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만들어진 SF영화는 아니니 말입니다. 이 괴상한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제 궁금증을 자극한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스럽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지구 멸망의 순간에도 뉴스를 보도하는 앵커들의 모습은 소소한 재미를 안겨줍니다. 마치 개그 프로를 보는 듯한데, 심각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어이없는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임필성 감독의 뚝심이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도 마지막까지 뒷심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당구공 모양의 행성 충돌, 그리고 10년 후. 갑작스러운 엄청난 진동과 함께 성인이 된 민서(배두나)는 지하 벙커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시종일관 번뜩이는 기발함으로 저를 놀라게 했던 [해피 버스데이]인 만큼 저는 마지막 장면도 번뜩이는 결말을 기대했지만 솔직히 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부셔질 때가 되어서 부셔진 8번 당구공처럼,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대한민국도 한번은 완전히 부셔서 새롭게 해야될 필요가 있다는 임필성 감독의 조용한 외침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해피 버스데이]는 장편 영화로 리메이크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 이야기는 모두 했지만 짧은 러닝 타임 때문에 중간 부분을 지나친 듯한 [멋진 신세계]와 [천상의 피조물]과는 달리 [해피 버스데이]는 앞으로 더 많은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블랙코미디냐? 철학적 메시지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세 개의 에피소드를 따로 떼어서 보니 [해피 버스데이]가 가장 좋았고, 그 다음이 [멋진 신세계]였으며, 마지막으로 가장 실망스러웠던 에피소드는 [천상의 피조물]이네요.
사실 [남극 일기]를 실망스럽게 본 저는 오히려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천상의 피조물]을 가장 기대했었는데 결과는 정 반대로 나온 셈입니다.
제가 [인류멸망보고서]를 재미있게 보는 기준은 '얼마나 기발한 풍자를 했는가?' 입니다. 애초에 저는 [인류멸망보고서]에게 장준환 감독의 블랙 코미디 [지구를 지켜라]를 기대했으니까요. 그런 만큼 기발한 풍자가 부족하고, 그 대신 불교의 깨달음을 얻은 로봇의 심오한 철학을 다룬 [천상의 피조물]에게 이질감을 느낀 것입니다.
물론 [해피 버스데이]와 [멋진 신세계]도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철학적 메시지를 살짝 노출시킵니다. 하지만 그러한 메시지는 영화의 블랙코미디적 재미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나 [천상의 피조물]은 아예 블랙코미디적 재미를 포기한채 짧은 시간 내에 될수록 많은 철학적 메시지를 늘어놓기에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일단 [인류멸망보고서]가 다른 분들처럼 '최악'은 아니었습니다. 영화의 방향을 일관되게 밀어부쳤더라면 어쩌면 저는 [지구를 지켜라]를 보았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이 영화에서도 느낄 수 있을뻔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세 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해피 버스데이]이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에피소드는 역시 [멋진 신세계]이다.
특히 류승범과 고준희의 좀비 분장은 악몽을 꿀 정도로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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