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스티븐 스필버그
주연 : 제레미 어바인, 에밀리 왓슨, 피터 뮬란, 톰 히들스톤
개봉 : 2012년 2월 9일
관람 : 2012년 2월 14일
등급 : 12세 관람가
스필버그의 이중생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흥행의 마술사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만큼 그가 연출한 영화는 영화 흥행에서 큰 획을 그었던 굵직한 영화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해양 공포 영화의 원조격인 75년작 [죠스]는 영화사상 처음으로 1억 달러 흥행을 기록하며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탄생시켰고, 82년작 [E.T.]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이 개봉되기 전까지 무려 15년 동안 영화사상 최고 흥행작 자리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그 외에도 어드벤처 영화의 전설이라 할 수있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비롯하여 특수효과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쥬라기 공원] 등 그의 흥행작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판국입니다.
하지만 그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도 꿈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미국 최고의 영화 축제 아카데미를 움켜쥐는 것입니다. 상업 영화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그에게 아카데미는 자신이 연출한 영화의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입니다.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아카데미 도전사는 그 역사가 생각보다 깁니다. 그가 아카데미에 처음으로 노미네이트된 것은 76년 [죠스]부터였습니다. 하지만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은 밀로스 포먼 감독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차지했고 [죠스]는 음향상, 편집상, 음악상 등 기술상 수상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2년에는 [레이더스]가, 83년에는 [E.T.]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지만 언제나 그의 손에 돌아온 것은 기술상에 불과했습니다. 아카데미는 그의 영화에서 작품성보다는 기술적인 성과를 더욱 치하한 셈입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가 두 종류의 영화로 갈라진 것 말입니다. 그는 흥행을 위한 상업 영화와 아카데미를 위한 영화를 번갈아 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아카데미를 위한 맞춤형 영화의 시발점은 85년작 [컬러 퍼플]부터였습니다. 어느 흑인 여성의 고단한 삶을 직설적으로 그렸던 [컬러 퍼플]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계산대로 86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지만 이번에도 수상의 기쁨은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특히 [컬러 퍼플]은 무려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단 한개의 상도 수상하지 못했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어빙 탈버그 상을 수여하며 위로를 하기도 했습니다.(흑인의 삶에 대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관심은 이후 [아미스타드]로 이어지지만 역시 아카데미 수상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매번 아카데미에게 물만 먹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희망을 안겨준 영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87년작 [태양의 제국]입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상하이 외국인 자치구에 거주하던 영국인 소년의 눈에 비친 전쟁의 비극을 담은 [태양의 제국]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중 데뷔작인 [슈가랜트 특급]을 제외하고는 가장 저조한 흥행을 기록했고, 예상과는 달리 아카데미 후보에조차 오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아카데미를 위한 억지 짜맞춤 영화가 아닌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전쟁영화에 대한 눈을 뜨게 된 것이죠.
스티븐 스필버그의 전쟁영화 연대기
[죠스], [레이더스], [E.T.]가 기록적인 흥행에 대한 댓가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아카데미를 노골적으로 겨냥하며 만든 [컬러 퍼플]은 11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단 한개의 상도 수상하지 못하는 아카데미 사상 최악의 수모를 당하는 비참한 결과만을 가져왔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태양의 제국]을 통해 드디어 자신만의 감동적인 영화를 만드는 법을 터득했고, 그 결과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최고의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쉰들러 리스트]는 94년 아카데미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그토록 원했던 작품상을 안겨줬습니다. 그 해 아카데미에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쉰들러 리스트]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등을 수상했으며 [쥬라기 공원]으로는 음향상, 음향효과상, 시각효과상 등 기술부문마저도 휩쓸었습니다. 한마디로 94년 아카데미는 그동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소홀했던 것을 단숨에 보상한 셈입니다.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99년 아카데미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다시 감독상을 거머쥡니다. 비록 작품상은 [세익스피어 인 러브]에게 양보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촬영, 편집, 음향상을 비롯한 기술상을 휩쓸며 [세익스피어 인 러브]와 함께 99년 아카데미를 양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전쟁영화에서 유난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전쟁영화라는 장르가 거대한 스펙타클과 감동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블록버스터 영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으로서는 소소한 드라마가 담긴 영화보다는 거대한 스펙타클로 감동을 포장한 전쟁영화에서 더욱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도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한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유일 것입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유대인이었고, 그러한 그의 태생적 특성은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워 호스]는 비록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한 영화는 아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인 소년과 말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답게 전쟁씬은 스펙타클하게 포장되어 있으며, 말의 눈을 통해 본 전쟁의 비극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말과 사람의 우정이라는 감동 코드까지 적절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2011년 [틴틴 : 유니콘호의 비밀]과 [워 호스]를 연출했는데 [틴틴 : 유니콘호의 비밀]은 흥행을 위한 영화이며, [워 호스]는 아카데미를 겨냥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워 호스]는 2012년 아카데미에 작품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물론 현지 반응은 [워 호스]가 수상하기는 힘들것이라는 전망이 대세이지만 '전쟁영화 = 아카데미후보'라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공식이 이번에도 성립된 셈입니다.
2차 세계대전과는 다른 1차 세계대전의 따뜻함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점이 떠오릅니다. 왜 2차 세계대전이 아닌 1차 세계대전일까요? 그 동안 그가 연출한 전쟁영화들은 모두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었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차 세계대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워 호스]는 그러한 그의 전쟁영화의 연대기에서 한발자국 물러서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차 세계대전이 아닌 1차 세계대전을 선택한 그의 결정은 의외의 아름다움,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전쟁영화에서 아름다움, 따뜻함이라니... 얼핏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리시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워 호스]는 전쟁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따뜻합니다.
영화의 시작은 광활한 대초원에서 조랑말이 태어나는 장면입니다. 그 이후에도 자연을 벗삼은 알버트(제레미 어바인)와 말 조이의 우정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을 토대로 놀라운 광경을 연출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알버트와 조이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자갈밭을 함께 힘을 합쳐 일궈내 농작물을 심을 수 있는 밭으로 만드는 장면 등 조금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익숙한 감동적인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 영화의 초반은 전쟁영화라고 하기엔 평화롭고, 아름다우며, 따뜻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따뜻함은 조이가 영국군의 기마대 말로 차출되는 장면에서도 이어집니다. 본격적인 전쟁장면이 나오며 초반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중반의 첫 전투씬은 말을 타고, 긴 칼을 든채 갈대밭에서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가는 다소 아름다운(?) 장면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의 그 끔찍하고 리얼했던 전쟁의 생생한 현장과 비교가 될만합니다.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적을 더 많이,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연구했고, 그러한 결과 고작 몇 십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전쟁 장면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전쟁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지옥도와도 같은 장면에 익숙한 제게 [워 호스]의 전쟁 장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해서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죠.
어쩌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역시 그러한 것을 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이가 독일군에게 차출되어 대포를 이끄는 장면이라던가, 영국군과 독일군의 근접전을 제외하고는 [워 호스]는 전쟁영화라고 하기엔 뭔가 착하다 싶을 정도의 장면들이 연달아 나옵니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장면을 비교하면서 만약 3차 세게대전이 벌어진다면 2차 세계대전과는 또 비교할 수도 없는 끔찍한 장면이 연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작 몇 십년 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상상 이상의 살상무기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전쟁.. 말의 시선을 따라가다. (스포 조심)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름답기만한 전쟁영화는 분명 아닙니다. 다른 전쟁영화에 비교해서 그 잔인성이 덜 하긴 하지만 [워 호스] 역시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조이의 시선을 따라 전쟁의 비극을 그려냅니다.
특이한 것은 이 영화가 그려내는 전쟁의 비극은 조이를 돌봐주는 캐릭터들의 허무한 죽음으로 표현되는데, 알버트에게 조이를 사면서 전쟁이 끝나면 꼭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하는 인간적인 영국군 장교 니콜스(톰 히들스톤), 조이를 맡게된 독일 어린 형제 병사, 버려진 조이를 기르게 되는 심장병에 걸린 프랑스인 소녀 등 한결같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러한 캐릭터들의 죽음을 감동스럽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마치 제 삼자의 입장에서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듯이 니콜스의 전사 장면도, 어린 독일 병사의 처형 장면도, 별 감정 없이 그려질 뿐입니다.(프랑스인 소녀의 죽음 장면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영화의 감동을 증폭시키려면 전쟁에 의한 안타까운 죽음에 비장미로 포장하여 표현해야 마땅한 일인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그러한 감동에 마치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조이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겠다는 그의 의지로 보입니다. 니콜스와 어린 독일군 병사의 죽음보다는 조이와 프랑스인 소녀의 이별이 더욱 안타깝게 표현된 것 역시 프랑스인 소녀와 조이의 각별한 관계로 인한 조이의 감정 때문이 아닐까요?
영화의 후반에 가서는 철조망에 휘감겨 쓰러진 조이를 영국군 병사와 독일군 병사가 힘을 합쳐 도와주는 장면으로 훈훈함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전쟁은 끝을 맺습니다. 사실 이러한 영화 전체를 놓고본다면 [워 호스]를 전쟁영화로 분류하는 것이 애매합니다. 전쟁영화라고 하기엔 너무 착하고 아름다웠으니까요.
2차 세게대전을 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에 대한 사람의 시선을 동물인 말의 시선으로, 사실 바뀐 것은 이것 두 가지밖에 없는데 [워 호스]는 이전의 스티븐 스필버그의 전쟁영화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답다.'라는 이야기가 저절로 나오는 이유는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이전 아카데미용 영화에서 보여준 스필버그식 감동 스토리는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제 개인적으로 [워 호스]는 너무 착하기만 해서 약간은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착함을 영화의 감동으로 포장할줄 아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연출력이 있었기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시한 감동에 만족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감동은 99% 이상 잘생긴 말 조이가 책임진다.
역시 사람보다는 동물에 의한 감동이 더욱 훈훈한 법이다.
배경이 전쟁이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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