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태균
주연 : 이청아, 강동원, 조한선
개봉 : 2004년 7월 22일
관람 : 2004년 7월 23일
정말로 [늑대의 유혹]을 극장에서 볼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놈은 멋있었다]를 극장에서 본 마당에 비슷한 류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에는 요즘 제게 영화를 보기위해 주어진 시간이 너무 없었고, 그와는 반대로 보고싶은 영화들은 너무 많았습니다. 일주일내내 계속된 야근과 휴일인 토요일에도 회사에 나와서 일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스트레스가 쌓일대로 쌓인 저는 [킹 아더]를 보며 헐리우드의 시원한 특수효과로 제 스트레스를 확 풀어버릴 생각이었습니다.
금요일에도 야근을 하고 이어진 간단한 회식자리. 피곤해서인지, 스트레스때문인지 동동주 몇잔에 취기가 확 올라오더군요. 하지만 회식자리가 끝나는대로 구피와 함께 심야 영화로 [킹 아더]를 보기로 했던 저는 영화를 보겠다는 일념하나로 술과의 사투를 벌였습니다. 술기운이 올라오며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지만 절대 질수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로 참아냈죠. 드디어 지긋지긋한 회식 자리가 끝나고 서둘러 택시를 잡고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길은 또 왜그리 막히는지... 우여곡절끝에 극장에 도착했지만 [킹 아더]를 단 몇분차이로 놓쳤습니다. 그때 시간이 12시 30여분. 다음 타임을 보려면 무려 2시간를 기다려야하는 상황. 어쩔수없이 그냥 시간대 맞는 아무 영화나 볼 심정으로 고른 영화가 [늑대의 유혹]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킹 아더]대신 보게된 영화이지만 [늑대의 유혹]은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그놈은 멋있었다]보다 재미있었다고 한다면 또다시 [그놈은 멋있었다]의 알바들과 맹목적인 팬들의 거센 항의를 받겠지만, 제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 두 영화를 평가하라면 [늑대의 유혹]의 판정승으로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관점임을 강조합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죠.
1. [늑대의 유혹]엔 일관성이 있다.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제게 가장 큰 아쉬움은 일관성없는 영화의 분위기였습니다. 초반엔 톡톡 튀는 신세대적인 분위기와 코믹한 상황 연출로 끝없이 관객들을 웃겼던 [그놈은 멋있었다]는 후반부에 들어서며 갑자기 신파적인 분위기로 접어듭니다. 초반엔 웃겼다가 후반엔 가슴찡한 감동을 관객에게 남기겠다는 이 영화의 무리한 욕심은 신세대적인 감성이 돋보이는 이 영화의 장점을 오히려 가려버리는 부작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10대 소녀의 슬픈 사랑에 대한 풋풋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영화의 재미만을 따진다면 아쉬움은 어쩔수없었습니다.
하지만 [늑대의 유혹]은 다릅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코믹한 분위기를 최대한 배제합니다. 이 영화의 정한경(이청아)은 [그놈은 멋있었다]의 한예원(정다빈)과 캐릭터의 성격이 비슷하지만 한예원처럼 코믹 만화에 등장할만한 웃긴 에피소드는 만들지 않습니다. 그녀는 평범해보이고, 영화 역시 그녀의 평범함을 최대한 부각시킵니다. 정한경과 풋풋한 로맨스를 이루는 반해원(조한선)은 영락없이 지은성(송승헌)의 또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반해원 역시 지은성처럼 코믹하지는 않습니다. 자신과 키스했다고 무작정 책임지라고 쫓아다니는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닙니다. 결국 이 영화는 [그놈은 멋있었다]와 비슷한 캐릭터들로 이루어졌으면서도 코믹함을 최대한 배제합니다.
이 영화가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철칙처럼 여기던 코믹함을 버린 연유에는 정태성(강동원)이라는 히든 카드가 있었습니다. 한경과 해원의 로맨스와는 별도로 한경의 주위를 맴도며 왠지모를 비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태성은 결국 마지막엔 [늑대의 유혹]을 최루성 멜로 영화로 변모시킵니다. 만약 한경과 해원이 예원과 은성처럼 코믹한 사랑을 엮어나갔다면 아무리 태성이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영화의 마지막을 슬프게 장식한다고 할지라도 관객들은 쉽사리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겁니다. [늑대의 유혹]은 코믹함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스스로 버림으로써 마지막에 관객의 눈물을 얻어내는 유종의 미를 거둡니다.
이러한 일관성있는 영화의 분위기가 원작에 의한 것이라면 정말 새로운 발견입니다. 싫증을 금방느끼는 네티즌의 성격상 호흡이 짧은 코믹함이 분명 인터넷 소설의 대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하는 슬픈 분위기의 이야기가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어내고 인기를 끌수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만큼 원작자인 귀여니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되겠군요.
2. [늑대의 유혹]엔 강동원이 있다.
분명 [그놈은 멋있었다]의 송승헌도 멋있는 배우입니다. 예전에 그가 나오던 청춘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에서 그가 이의정과 커플을 이루었을땐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왜하필 저렇게 엽기적으로 생긴 여자와...'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의 연기력은 그의 외모에 비해 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놈은 멋있었다]에서의 지은성 연기는 분명 괜찮았지만 정말 뛰어나게 잘했다고 평가할만한 연기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잘했다 정도의 평가가 알맞을 겁니다.
하지만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은 남자인 제가 봐도 숨이 막힐 정도로 멋있었습니다. 처음 한경의 우산속으로 뛰어들어온 태성의 그 장난끼 가득한 미소는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 천진한 미소를 가진 남자를 그 누가 우산밖으로 밀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가 한경과의 이룰수 없는 슬픈 사랑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선 많은 여성 관객들의 탄성소리와 함께 제 입에서도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어쩜 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모습이 저렇게 멋있을수가 있을까? 안약을 눈에 주입해서 그냥 주루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닌, 정말로 눈에서 글썽글썽 맺히는 그런 진짜 눈물을 그는 흘릴줄 아는 것입니다.
솔직히 외모면으로 따진다면 강동원보다는 송승헌이 객관적으로 휠씬 잘생겼습니다. 하지만 송승헌이 연기한 지은성보다 강동원이 연기한 정태성이 휠씬 멋있어 보였던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강동원의 연기력입니다. 아직 소년의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세상 그 누구보다 뜨거운 눈물을 흘릴수 있는 배우. 이것이 바로 연기력입니다. 영화속 캐릭터는 비현실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연기자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에 따라서 그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관객의 마음속에 현실적인 인물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강동원은 어느새 그러한 위치까지 올라온 겁니다. 분명 태성이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 비현실적인 모든 요소를 전부 가지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관객에게 웃음과 눈물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강동원의 힘입니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김하늘의 종횡무진 코믹 연기에 가려졌던 그가 드디어 [늑대의 유혹]에서 그 날개를 활짝 펼친겁니다. 그는 아직 젊기에 그의 가능성은 아직도 무한해 보입니다. 이제부터 그를 눈여겨 보기로 했습니다. 스타 강동원이 아닌 연기자 강동원으로 거듭태어나는 그 순간을 말입니다.
3. [늑대의 유혹]엔 김태균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인터넷 소설 영화들은 신인 감독들의 등용 무대가 되었습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감독, [내사랑 싸기지]의 신동엽 감독, 그리고 [그놈은 멋있었다]의 이환경 감독까지... 분명 신인 감독의 재기발랄한 연출력은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면에서 인터넷소설과 어울리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인 감독에겐 분명 그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한편의 영화에 자신의 모든 능력을 보여주고자하는 욕심. 그러한 욕심은 대개 영화를 산만하게하는 악영향을 끼칩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감독은 그러한 욕심을 자제함으로써 영화를 인터넷 소설의 그 감수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유쾌한 영화로 만들었지만 신동엽 감독과 이환경 감독은 웃음과 감동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위해 초반의 유쾌함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태균 감독은 베테랑입니다. 그는 [박봉곤 가출사건]이라는 비평면에서 좋은 평가를 얻은 영화로 1996년 데뷔한 이래 벌써 9년동안 [늑대의 유혹]까지 4편의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입니다. 비록 그가 감독한 영화들이 흥행면에서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그의 전작인 [화산고]는 재기발랄한 상상력과는 달리 관객들에게 악평을 받았지만 그가 이렇게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편의 영화를 만들고 조용히 사라져간 감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는 신인 감독들처럼 서두르지도 않으며, 욕심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그는 [늑대의 유혹]이 톡톡튀는 가벼운 코믹 영화가 아닌 십대의 감수성이 빚어낸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며, 우리 영화의 오랜 트렌드인 코믹을 배제함으로써 [늑대의 유혹]을 색다른 10대 학원 영화로 만들어 냈습니다.
비록 그의 영화가 단한번도 관객들에게 제대로된 평가를 얻어내지 못했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영화를 만들었고, 이제 [늑대의 유혹]이 김태균이라는 감독과 관객과의 소통에 새로운 장을 마련할 것입니다. 김태균 감독을 좋아하는 저로써는 [늑대의 유혹]을 계기로 김태균 감독이 비평가들의 호의적인 평은 물론이고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 그런 감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늑대의 유혹]엔 업그레이드된 십대의 감수성이 있다.
[그놈은 멋있었다]는 귀여니의 십대 감수성이 물씬 풍겨나는 영화였습니다. 남자에 대한 그녀의 환상은 남자를 터프한 쌈짱으로 만들었으며, 아련한 과거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베일속의 인물로 만들었고, 슬픈 사랑을 이루어줄 로맨티스트로 만들었습니다.
[늑대의 유혹]은 귀여니의 또다른 인터넷 소설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그놈은 멋있었다]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늑대의 유혹]의 십대 감수성은 분명 [그놈은 멋있었다]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있습니다. [늑대의 유혹]의 남자 주인공들인 해원과 태성은 여전히 터프한 쌈짱이지만 [그놈은 멋있었다]의 은성과는 달리 한껏 폼잡으며 멋들어지게 싸움을 하는 쌈짱은 아닙니다. 그들은 싸움을 하면서도 죽도록 얻어터집니다. 은성처럼 일당백의 쌈짱이 아닌 조금은 현실적이 된 쌈짱이라는 뜻입니다. 태성은 여전히 과거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지만 한경과 사랑을 나누는 해원은 과거의 비밀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과거의 비밀이라는 다분히 드라마적인 설정은 태성에게 미뤄두고 한경은 조금은 현실적인 해원과 사랑에 빠진 겁니다. [늑대의 유혹]은 여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놈은 멋있었다]처럼 마지막의 해피엔딩을 위해 존재하는 어정쩡한 슬픔이 아닌 영화의 다른 부분이 그 마지막 슬픔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슬픔입니다. [늑대의 유혹]의 슬픈 사랑은 [그놈은 멋있었다]와 비교해서 더욱더 슬픈 감수성으로 치장되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업그레이드된 십대의 감수성은 [늑대의 유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놈은 멋있었다]와 [늑대의 유혹]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두 영화의 원작자가 같고, 관객을 겨냥한 연령층이 같기에 두 영화는 뗄래야 뗄수 없는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같은 날 개봉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헐뜯기 경쟁이 만연한 이 분위기에서 두 영화를 냉정한 눈으로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것 같아서 조목조목 비교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비교하다보니 저도 어느새 십대가 된듯한 느낌이 드는 군요. 이런 풋풋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도 [늑대의 유혹]과 [그놈은 멋있었다]는 충분히 존재의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더운 여름에 헐리우드의 시원시원한 특수효과도 좋지만 여름방학을 맞이한 십대 관객들과 함께 이렇게 십대 감수성으로 무장된 영화를 보는 것도 꽤 재미난 피서법이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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