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30일 금요일
모든 것을 그날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내 영화 이야기를 북릿이라는 e-Book에 발행하기 위한 계약을 하기 위해 일산의 위즈덤 하우스 출판사 회의실에 앉은 그 날, 그 순간말이다.
위즈덤 하우스의 기획편집팀을 맡고 있다는 그는 내게 신작 영화 리뷰 말고도 영화에 대한 특성화된 기획 기사를 언급했다.
"신작 영화 리뷰도 좋지만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는 것 같은 기획 기사도 일주일에 하나 이상은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단순히 신작 리뷰, 그러니까 내 영화 이야기를 북릿에 발행하면 될것이라 생각했는데 위즈덤 하우스는 영화 이야기 외에도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이야기를 쓴다는 것과 그것 외의 다른 영화에 대한 기획 기사를 쓴다는 것은 내게 하늘과 땅 차이이다.
영화 이야기는 영화를 보면 마치 습관처럼 써오던 20년 동안 간직했던 버릇이지만, 그 외의 기획 기사는 내가 시간을 내서 글을 써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연 내게 그럴 시간이 있기는 한걸까?
"예를 들어서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를 가지고 스티그 라그손의 원작 소설과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를 비교해보는 겁니다."
그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내게 긍정적인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그만 적대감이 생기고 말았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직장 다니며, 영화 보고, 신작 리뷰 쓰는 것도 제겐 벅찬데 책을 읽고 거기에 책과 영화를 비교하는 글을 쓰다니요... 제겐 그럴 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내 입장을 이해한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그렇게 계약을 마치고 위즈덤 하우스 사무실을 나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찝찝함을 느껴야 했다.
2012년 1월 2일 월요일
결국 나는 결심해야 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내 고집대로 영화 이야기만 북릿에 발행할 것인지, 아니면 위즈덤 하우스에서 원하는 영화에 대한 기획 기사를 발행해줘야 할 것인지...
내가 내린 결론은 북릿에 내 글을 발행하기로 한 만큼 내 고집만 내세우지 말고 위즈덤 하우스가 원하는 기획 기사도 써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퇴근 후 집에서 할 일 없이 뒹구는 자투리 시간들을 모은다면 책을 읽을 시간은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잠을 자는 시간을 매일 1시간 가량 줄이거나, 점심 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따지고 보면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결국 나는 위즈덤 하우스에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는 기획 기사를 쓰겠다는 메일과 함께 스티그 라르손 원작의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주문했다.
2012년 1월 3일 화요일
나는 지금 후회를 하고 있다.
내가 왜 이런 결심을 하고 말은 것일까?
그러한 후회 앞에는 두툼한 두 권의 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2권으로 나눠진 이 책은 1권이 무려 400페이지가 넘는 내 기준으로는 굉장히 두꺼운 책이었다.
붉은 표지에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라 쓰여 있었고, 등에 용 문신을 한 여성의 뒷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개봉에 맞게 영화에 대한 홍보 책갈피도 잊지 않았다.
이 두꺼운 책을 집어든 나는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영화가 개봉하는 날은 1월 12일.
나는 10일 안에 한 권도 아닌 두 권의 두꺼운 소설을 읽어야만 했다.
1년에 책 한 권을 읽을까 말까한 내겐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책임을 져야 했다.
어찌되었건 나는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원작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는 글을 쓰기로 위즈덤 하우스에 약속하지 않았던가!
2012년 1월 6일 금요일
점점 지쳐가고 있다.
아니, 소설이 지루해서는 아니다.
스티그 라르손은 꽤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창조했고, 그들에게 흥미진진한 사건을 맡겼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첫번째 책에서는 주인공인 미카엘과 리스베트 캐릭터 설명에 집중하고 있었다.
기업의 추악한 진실을 파헤치는 능력있는 기자인 미카엘이 부패한 기업인의 함정으로 인한 위기에 빠졌고, 때마침 40년 전 사라진 손녀를 찾아 달라는 은퇴한 늙은 재벌의 제안을 받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미카엘이 소녀를 찾기 위해 파헤쳐야 하는 방예르 가문의 가계도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책에서조차 한 페이지를 할애하며 방예르 가문의 가계도를 그렸을 정도로 책을 읽는 내게 방예르 가문의 방대한 가계도는 책을 읽는 속도를 자꾸만 더디게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카엘이 방예르 가문의 가계도에서 헤매고 있을 때, 또다른 주인공인 리스베트는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후견인에게 멋진 한 방을 먹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 문제가 있는 이 여성은 사회 통념적으로 보면 인간 쓰레기이다.
하지만 스티그 라르손은 이 문제 여성을 매력적으로, 그리고 사회 통념적으로 보면 성공한 지적 사회인인 변호사는 인간 쓰레기로 그리며 내 고정 관념에 멋진 펀치를 내리 뻗었다.
통쾌했다.
리스베트의 활약이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1권을 읽다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역시 시간이었다.
퇴근 후 책을 읽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붓다보니 영화볼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럴수가... 밥 먹을 시간은 없어도 영화볼 시간만큼은 언제나 있었던 내가 아니던가.
400페이지가 넘도록 사건은 진행된 것이 없고, 캐릭터 설명과 방예르 가문의 빌어먹을 가계도 설명에 모든 것을 바쳤으니... 내가 지쳐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결국 1권을 다 읽은 나는 "세상에, 아직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만나지도 않았어."라며 한탄해야 했다.
2012년 1월 9일 월요일
모든 것은 일사천리였다.
1권을 읽고 2권을 집어든 그 순간부터 말이다.
미카엘이 2달간 교도소에 수감되어 출소한 이야기로 시작한 2권은 마치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듯이 갑자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하리에트 실종 사건은 미카엘이 아무 의미없어 보이던 어느 사진에서 뜻밖의 의문점을 찾으며 갑자기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방식이 너무 치밀하고 흥미로워서 나도 모르게 푹 빠졌다.
2권에서도 100페이지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서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서로 만나게 된다.
이 소설 전체가 800페이지라면 이 두 주인공이 조우하는 것은 500페이지가 지나고 나서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처음 조우하던 그 장면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이럴수가... 리스베트가 귀엽기까지 하잖아."
2012년 1월 10일 화요일
아마 고등학생때 시드니 셀던 소설에 푹 빠져 밤새워 책을 읽었을 때 이후 처음일 것이다.
이미 밤이 깊었고, 평상시라면 나는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쌀쌀한 새벽녁 거실에 쭈그려 앉은 나는 아직도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고 있다.
'안돼.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나의 이성이 말을 했다.
'하지만 이 부분만... 이 수수께끼를 밝히는 부분만 읽고 자면 안될까?'
나의 본성은 이성에게 애원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책을 덮을 수가 있었다.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오전
이미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는 예매해놓은 상태이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퇴근 후 저녁이면 나는 이 영화를 보러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책을 다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책을 읽어도 위즈덤 하우스에 약속한 기획 기사는 주말 내내 충분히 써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미카엘은 사건의 실체에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고, 나 역시 스릴러 영화의 매니아답게 내 나름대로의 추리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2권의 200페이지 쯤에서 범인은 밝혀졌다.
그것도 내가 애초에 예상했던, 바로 그자였다.
웃기지 않는가?
400페이지 동안 캐릭터를 설명했고, 방예르 가문의 가계도를 어지럽게 펼쳐 놓았던 스티그 라르손은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2권의 100페이지에서부터 200페이지에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사건을 단숨에 마무리해버렸다.
처음엔 너무 전개가 느리다고 투덜거렸던 나는 정신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책을 손에서 떼어내지 못했다.
한번 가속도가 붙은 사건의 전개는 빠르게, 그러나 치밀하게 그 끝을 보였다.
하지만 이제 겨우 200페이지란 말이다.
아직 남은 200페이지가 있던 말이다.
이건 할 말이 더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2012년 1월 11일 오후
내 예상은 맞았다.
그래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던 것이다.
책의 초반 설정을 뒤집는 그런 마지막 반전이 있었다.
그랬군. 그랬었군.
범인 맞추기에 급급했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한가지 가정을 스티그 라그손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스티그 라그손은 마지막 100페이지를 미카엘의(아니 어쩌면 리스베트의) 베네르스트륌에 대한 복수에 할애하고 있다.
소홀히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요소도 결코 놓치지 않고 깔끔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마무리지어 버린 것이다.
그게 끝이라고?
아니다.
스티그 라그손은 자신이 그토록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사건 해결 이후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타인과의 소통에 서툴렀던 리스베트가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에 흔들리고 상처받는 모습은 리스베트 캐릭터에 매료되었던 내게 아련함을 안겼다.
똑똑한 작자이다.
나는 지금 책을 덮는다.
"이 두꺼운 책을 어떻게 읽지?"라고 겁먹었던 나는 불과 10일 만에, 그것도 2권은 단 3일만에 책을 읽었다.
과연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는 어떨까?
2시간 40분에 달하는 긴 러닝 타임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캐릭터 설정과 방예르 가문 가계도 설명에 할애할 것인가?
그리고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초반의 전개와는 전혀 상반된 스피드한 전개로 사건을 해결해 나갈 것인가?
마지막 반전은 원작과 같을까?
베네르스트륌에 대한 미카엘과 라스베트의 복수는 어떤 비중으로 다룰까?
나는 오늘 밤 그 실체를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이번 주중으로 닐슨 아르덴 오플레브 감독의 스웨덴 영화 [밀레니엄 1부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러고보니 이번 주는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로 가득 채워진 주가 될 것 같다.
분명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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