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샘 레이미
주연 : 토비 맥과이어, 키어스틴 던스트, 알프레드 몰리나, 제임스 프랑코
개봉 : 2004년 6월 30일
관람 : 2004년 7월 4일
2002년 5월 3일... 그날은 [스파이더맨]이 개봉하는 날이었습니다. 전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회사동료들과 함께 개봉 당일날 보러가기로 약속을 했었답니다. 인터넷으로 예매도 끝내놓고 퇴근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퇴근시간이 다되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야근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전날까지 거의 매일같이 야근으로 밤을 새웠던 저는 분명 그날은 야근이 없을것이라 확신했었는데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거죠.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스파이더맨]을 포기할수는 없었습니다. 예매를 하지 않았다면 다음 기회로 미뤘겠지만 이미 예매도 다되어있는 상태여서 전 무리를 해서라도 영화를 보러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영화를 보기위해 야근을 하지 못하겠다는 제 이야기는 윗사람들이 듣기엔 말도 안되는 헛소리였나봅니다. 팀장은 영화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며 다그쳤지만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영화를 보러가겠다고 우겼습니다. 팀장은 제가 괜한 반항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저는 그럴수록 더욱 오기가 생겼습니다. 결국 그날의 사건은 폭력으로 이어졌고, 전 회사의 모든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극장으로 향하고 말았습니다. 저와 함께 영화를 보기로했던 동료들은 삭막한 분위기에 눈치만 보며 야근을 택했고요.
2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 까짓거 예매를 취소하던가, 취소가 안되면 그따위 몇만원 잊어버리면 될것을, 그리고 영화는 며칠후 야근이 없는 날 보면 될것을, 그땐 왜그리 고집을 부렸었는지... 하지만 그땐 정말 영화만이 제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답니다. 1년가까이 솔로로 지내다보니 외로움은 몸에 베어있었고, 서른이 다된 나이에 희망조차없는 조그마한 회사에서 말단 사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제 처지는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럴때마다 영화는 제게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이었고, 영화속 화려한 세계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도망갈 수 있는 멋진 도피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 상황과 너무나도 어울렸던 영화가 바로 [스파이더맨]이었습니다. 거미에게 물려 초능력을 가지게된 슈퍼 히어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소심한 청년에 불과했던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뛰어난 힘과 그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감때문에 고민합니다. 그는 영웅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즐기며 악당과 싸우기보다는 영웅이라는 고단한 처지에 괴로워하고 차라리 포기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터 파커의 모습은 납루한 현실을 외면하고 영화속 화려한 영웅담을 동경했던 제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과 겹쳐졌습니다. 화려한 영웅의 모습뒤에 숨겨진 힘겨운 책임감... 영웅의 현실도 그리 행복한건만은 아니었던겁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영화속에서 도피처를 찾으며 집착하지않고, 영화를 순수하게 즐기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파이더맨]과 저의 첫만남이었습니다.
그날로부터 2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저는 2년전처럼 외롭지도 않고, 현실을 외면하고 영화속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여전히 돈 한푼없는 중소기업의 말단 사원이고,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도 자금난 때문에 위태위태하지만, 제 곁엔 이런 절 믿고 따라주는 아내와 10개월된 어린 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제게 찾아온 [스파이더맨 2]는 마치 오래된 친구와 같은 영화였습니다. 제가 정말 어려웠을때 힘이 되어준 친구. 그런 친구는 상황이 좋아졌을때도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는 법입니다. 2년전 함께 오지 못한 회사 동료들의 텅빈 극장 좌석을 양옆에 두고 혼자 쓸쓸하게 영화를 봤던 저는, 이번엔 아내의 손을 꼭 붙잡고 2년만에 돌아온 반가운 친구를 맞이했습니다.
1. 피터 파커... 그는 여전히 괴롭다.
2년만에 돌아온 피터 파커. 저는 이미 2년전의 그 암울한 불행에서 벗어났지만 이 불쌍한 친구는 오히려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삼촌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여전히 떨치지 못했고, 영웅의 책임감을 완수하려다 보니 경제적인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만갑니다. 학교 생활은 점점 꼬여만 갑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혔던 것은 메리 제인(키어스틴 던스트)의 사랑을 포기해야만하는 상황이었을겁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피터를 벼랑끝까지 밀어붙일 작정이었나봅니다. 부자 친구인 해리 오스본(제임스 프랑코)의 덕을 볼만도 하지만 1편에서 악당으로 변한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때문에 그것조차 여의치 않습니다. 게다가 영웅보다는 악당이 신문 판매부수를 늘린다고 생각하는 언론은 그를 악당으로 묘사하고, 닥터 옥토퍼스(알프레드 몰리나)라는 한층 강화된 악당은 피터 파커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이즈음에서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 복장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립니다. 그 때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활기찬 피터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피터는 스파이더맨 복장과 함께 영웅으로써의 힘겨운 책임감도 벗어버림으로써 헐리우드가 생산해낸 그 어떤 슈퍼 영웅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저지른 겁니다. 다른 영웅들은 책임감에 대한 힘겨운 고민이 없으며 오히려 그 책임감을 즐기는 듯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영웅복장을 버린다는 것은 악당에게 굴복하는 것을 뜻하기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그 있을 수 없는 일을 이 나약해보이는 청년이 해냅니다. 그가 결국 다시 스파이더맨복을 되찾았을때 저는 그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이봐! 친구, 짧은 휴가는 즐거웠나?"
2. 스파이더맨... 그는 여전히 막강하다.
피터 파커가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로는 드물게 무거운 책암감에서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하고 있을때 스파이더맨은 고층 빌딩숲 사이를 거미줄을 이용하여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블럭버스터로써의 임무를 책실하게 완수하고 있었습니다. 2년이라는 세월동안 진보된 기술력을 통해 전편보다 더욱 스피드해진 스파이더맨의 움직임과 전편의 그린 고블린(윌렘 데포)보다 한층 강화된 닥터 옥토퍼스의 등장은 아무 생각없이 스펙타클한 특수효과를 즐기고자하는 여름 관객들에게 시원한 쾌감을 줍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스파이더맨]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악당인 그린 고블린이라는 캐릭터였습니다.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 혹은 헐크를 연상시키는 고블린은 그렇기에 전혀 개성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촌스러운 초록색 복장과 가면은 또 왜그리 유치하게 보이던지... 그가 피터의 절친한 친구인 해리의 아버지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린 고블린은 스파이더맨에게 대적하기엔 여러면에서 모자란 악당이었습니다.
그러나 닥퍼 오토퍼스는 다릅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스스로 닥터 오토퍼스가된 옥타비우스 교수는 피터와 닮았으면서도 다릅니다. 아마 피터가 평범한 과학자로써 성장했다면 몇십년 후의 모습은 옥타비우스 교수처럼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는 닮았습니다. 하지만 피터가 영웅으로써의 책임감을 위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을 포기했다면, 옥타비우스 교수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을 얻기위해 인간으로써의 책임감을 포기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됩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죠.
샘 레이미 감독은 옥타비우스 교수에 알프레드 몰리나라는 평범한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영화적인 묘미를 살립니다. 스파이더맨역의 토비 맥과이어가 영웅이라고하기엔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심하게 생긴 청년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알프레드 몰리나의 캐스팅은 그야말로 절묘했습니다. 그의 뚱뚱한 몸매와 선한 얼굴은 닥터 오토퍼스에게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이 아닌 그냥 평범한 옆집의 아저씨같은 느낌을 전해줍니다. 영웅이 되기엔 너무 소심해보이는 평범한 청년과 악당이 되기엔 너무 선해보이는 평범한 아저씨의 대결, 이러한 이색적인 영웅과 악당의 모습은 최소한 제겐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피터 파커와 옥타비우스 교수는 평범한 외모를 지녔지만 스파이더맨과 닥터 오토퍼스는 다릅니다. 그들의 대결은 그 어떤 블럭버스터 영화보다 스펙타클하고 스피드합니다. 특히 지하철에서의 결투씬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죠. 피터가 영웅으로써의 무거운 책임감에 괴로워하는 동안 스파이더맨은 블럭버스터로써의 책임감을 성실하게 완수하고 있었던 겁니다.
3. 어쩌면 더이상 고뇌하는 스파이더맨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파이더맨 2]를 보면서 계속 절 괴롭혔던 것은 어쩌면 샘 레이미 감독과 토비 맥과이어 주연의 [스파이더맨]은 더이상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샘 레이미 감독은 [스파이더맨 2]를 마치 시리즈의 마지막처럼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해리의 복수심은 여전히 [스파이더맨 3]가 존재할것임을 예고하고 있으며, 1편에 이어 2편도 천문학적인 흥행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니 [스파이더맨 3]를 넘어 4편, 5편까지 관객의 외면을 받는 그 날까지 만들어질테지만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2편이 마지막인것처럼 보입니다.
피터는 이미 스파이더맨으로써의 삶과 피터 파커으로써의 삶에 대한 선택의 방황을 끝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으며, 이제 그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은 더이상 비밀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악명높은 신문 편집장마저 스파이더맨을 악당이 아닌 영웅이라고 인정한 마당에 [스파이더맨 3]는 이전의 [스파이더맨]과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 자명합니다. 샘 레이미 감독은 [스파이더맨]에서 피터 파커를 영웅의 무거운 책임감에서 고뇌하는 평범한 영웅으로 탄생을 시켰으며, [스파이더맨 2]에서는 그에게 진정한 영웅의 명함을 달아주기에 이르릅니다. 마치 샘 레이미표 [스파이더맨]은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샘 레이미 감독이 [스파이더맨 3]의 감독을 맡지 않는다면 [스파이더맨 3]는 제 2의 [배트맨 포에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팀 버튼이 만들어낸 암울한 배트맨을 전형적인 블럭버스터 영웅으로 탈바꿈시킨 [배트맨 포에버]는 이후에도 [배트맨 앤 로빈]을 거치며 [배트맨 시리즈]를 망가뜨렸습니다. 최근엔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새로운 감독을 영입함으로써 달라진 면모를 선보일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조엘 슈마허로 인하여 망가진 [배트맨 시리즈]가 얼마나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지 의문입니다.
샘 레이미 감독은 마치 [배트맨 포에버]처럼 갑작스럽게 평범한 블럭버스터로 변하는 것을 막기위해 [스파이더맨 2]에서 평범한 블럭버스터의 길을 활짝 열어준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그렇게된다면 '배트맨'이 마이클 키튼에서 발 킬머와 조지 클루니로 바뀌었던것처럼, '스파이더맨'도 토비 맥과이어에서 좀더 흥행성이 있는 스타급 배우로 바뀔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아직 [스파이더맨 3]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나와있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섣부른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샘 레이미 감독이 메가폰을 잡지 않더라도 [스파이더맨 3]가 평범한 블럭버스터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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