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노트/1992년 영화노트

연인 / L'Amant The Lover

쭈니-1 2011. 12. 20. 08:00

 

 

1992년 7월 5일

MOVIE 명보극장

 

프랑스 점령 치하의 베트남. 방학을 가족들과 보낸 소녀(제인 마치)는 학교가 있는 사이공으로 돌아가기 위해 혼자서 긴 여행을 떠난다.

그녀가 탄 버스는 '사덱' 지역을 통과해 메콩강을 건너기 위해 페리호에 실린다 비단 드레스와 구식의 라메힐과 장미넝쿨색의 남자 모자 차림의 소녀는 버스에서 내려 배의 난간으로 다가간다. 이때 버스옆의 검정색 리무진안에 매우 세련된 중국인 청년(토니 륭)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흰비단 양복을 입어 유럽인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 그는 소녀를 지켜보고 있다. 청년은 차에서 천천히 내려 소녀에게 접근한다.

두 사람은 이내 친해져 사이공 시내를 드라이브하고 이후 소녀는 청년의 리무진으로 등하교를 하게 된다.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32세의 이 중국인 청년은 이 지역에서 최대 부호의 상속자이다.

어느날 그는 어두침침하고 도시의 끝없는 소음으로 북적대는 그의 침실로 소녀를 끌어 들인다. 이후 약 1년 반 동안의 밀월이 시작된다.

소녀의 집에서는 중국 남자라는 이유로 특히 성격이 거친 큰 오빠가 크게 반대하지만 이 청년이 부자라는걸 알고는 모두들 잠잠해진다. 소녀의 가족은 모두 형편없다. 어머니는 광기와 절망에, 오빠는 부패에, 동생은 나약함에 빠져 있다. 그들은 야만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서로를 의심하고 경멸한다.

그런 가정 환경으로 인해 소녀는 섹스에 몰입한다. 그것은 꼭 사랑의 행위일 필요는 없다. 단지 노련한 그의 연인에 대한, 친구 엘렌에 대한, 자기 혐오와 탈출에 대한 일환으로 욕망의 행위는 계속될 뿐이다.

청년의 아버지는 이미 중국인 처녀와 약혼을 한 아들의 이 미친 사랑 놀음에 격분한다. 결국 중국인 처녀를 신부로 맞아 들이는 청년. 그들의 관계는 이렇게 끝난다. 소녀가 사이공을 떠나 프랑스로 가는 배에 올랐을때 부두 한 귀퉁이에서 중국인 청년의 승용차가 숨어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끝까지 그녀를 배웅하고 있는데... 소녀는 배안에서 우연히 들은 쇼팽의 '왈츠'를 들으며 자신이 청년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유한 중국인 청년과 가난한 백인 소녀의 사랑. 내용이 너무 간단하고 스토리 전개 역시 단순하다. 그러나 장 자크 아노 감독은 이 간단한 스토리의 영화를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냈다. 특히 사이공과 메콩강의 풍경을 원색적으로 그려낸 화면은 마치 관객들이 그곳에 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화면을 가득 메운 제인 마치의 성숙되지 않은 알몸과 노련함이 옅보이는 중국 청년의 알몸의 결합은 매우 충격적이고 사실적이다. 전혀 외설적이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기까지하다. 북적거리는 시장 복판의 밀실에서 벌이는 정사 장면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단지 이 영화를 이런 말초적인 장면을 보기 위해 찾은 관객들은 대실망. 미국 여인들의 풍만한 가슴에 물들은 이들은 제인 마치의 성숙하지 못한 작은 가슴을 보는 순간 실망의 한숨을 짓는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처럼 지루하지 않게 계속 새로운 사건이 전개되고 내용이 얼키고 설키는 일은 절대 없이 단지 한가지 내용이 조용히, 천천히 2시간을 채운다. 자극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홍콩 영화에 물들은 이들에겐 지루하고 졸리운 영화가 될 것이다.

 

 

 


 

 

2011년 오늘의 이야기

 

1992년 7월...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 정도 지난 어느 여름날, 저는 친구들과 함께 지금은 극장이 아닌 공연 및 전시장이 된 명보 극장에서 [연인]을 관람했습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였는데, 이제 우리는 미성년자가 아니라며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극장 안에 들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땐 그것이 그렇게 뿌듯했습니다.

친구들은 이 영화가 지루하다고 영화를 고른 제게 항의했지만 저는 [연인]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연인]을 본 이후 한동안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를 찾아서 볼 정도였죠. 당시 봤던 [불을 찾아서], [장미의 이름] 등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최고 걸작이라는 [베어]는 결국 보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의 주연이었던 제인 마치는 [연인]에 이어 브루스 윌리스와 주연을 맡았던 [컬러 오브 나이트]에서 다시 파격적인 노출을 시도했지만 이후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하고 관객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토니 륭이라 표기한 배우는 최근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로 우리 관객에게도 친숙한 양가휘입니다. 당시엔 양가휘라는 이름보다는 그의 영어 이름인 토니 륭이라 표기를 했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