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태경
주연 : 김하늘, 류진, 남상미, 전혜빈, 신이
개봉 : 2004년 6월 17일
관람 : 2004년 6월 16일
올해도 역시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와 우리의 공포 영화의 맞대결로 썸머시즌이 시작되는 군요. 저는 썸머시즌에는 대체적으로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를 더욱 선호하는 편이지만, 우리의 공포 영화에 대한 유혹도 쉽게 떨치지는 못합니다. 작년엔 구피의 임신으로 [장화,홍련], [여고괴담 3 - 여우계단], [4인용 식탁], [거울속으로]등 국내 극장가를 융단폭격한 우리 공포 영화를 단 한편도 극장에서 보지 못한 저로써는 올해만큼은 우리 공포 영화중 한편을 선정해서 꼭 극장에서 보겠다고 결심한 상태였습니다.
[페이스], [령], [분신사바], [인형사]등 이번 썸머시즌에 개봉되는 수많은 우리 공포 영화중에서 제가 극장에서 보기로 일찌감치 결심한 영화는 [령]입니다. 김하늘과 류진이라는 공포 영화에 전혀 어울리지않는 배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전혜빈, 남상미, 신이 등 젊고 유망한 배우들을 조연으로 배치한 이 영화는 모든 면에서 제가 가장 무섭게 본 우리 공포 영화인 [가위]를 연상하게 합니다. 과연 [령]은 [가위]를 뛰어넘는 공포를 제게 안겨줄 것인지...
하지만 [령]의 개봉소식을 들은 순간 저는 [령]을 극장에서 못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령]이 하필 [슈렉 2]와 같은 날 개봉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영화를 한편보기도 힘든 요즘, 두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다음주로 영화보기를 미룬다면 매주 기대작이 개봉되는 상황에서 신작에 밀려 결국 [령]을 극장에서 못 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령]은 저와 인연이 되었는지 예기치않는 순간에 제게 영화 볼 기회를 제공하더군요. 저희 회사 동료가 [령]의 시사회권이 4매나 생겼다며 제게 2매를 줬습니다. '이게 왠 떡이냐'라는 심정으로 시사회권을 받긴 했지만 구피는 웅이때문에 나올수 없다고하더군요.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령]을 극장에서 못 볼것 같기에 구피에겐 미안하지만 회사동료들과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구피없이 공포 영화를 보게 될줄이야... 옆에서 겁에 질린 제 손을 꼬옥 잡아줄 사람이 없어서인지 [령]은 정말 무서웠답니다. 두 눈을 온전히 뜨고 영화를 볼 수 없을만큼...
[령]은 적극적으로 우리 공포 영화의 새 장을 열은 [가위]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영화입니다. [가위], [폰]으로 공포 영화 전문 감독으로 등극한 안병기 감독이 신작 공포 영화 [분신사바]에서는 과거의 비밀 즉 시간을 모티브로한 [가위]와는 다른, 여자고등학교 즉 장소를 모티브로한 [여고괴담]을 연상하게하는 스토리 라인을 취함으로써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신인인 김태경 감독은 [가위]의 모티브인 시간을 적극 활용하며 [령]을 만들어냅니다.
[령]의 스토리 라인은 정말 많은 부분에서 [가위]와 비슷합니다. [가위]에서 혜진(김규리)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비밀에 의해서 한때 절친한 선후배 사이였던 친구들이 한명씩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혜진은 그 죽음의 그림자가 자기 자신에게도 점점 다가옴을 느끼고 그 무시무시한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령]에서 지원(김하늘)은 잃어버린 고등학교 시절 기억의 비밀로 인하여 고등학교 시절 절친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이상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지원은 그 죽음이 자기 자신에게도 점점 다가옴을 느끼고 자신이 잃어버린 무시무시한 기억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만이 모르고 있는 무서운 비밀'이라는 [가위]의 모티브를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기억하지 못하는 무서운 기억'으로 살짝 변형시키고 그 위에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를 덧입힘으로써 스토리 라인을 발전시킵니다. [령]의 이러한 스토리의 발전은 [가위]의 혜진이 과거의 비밀에 대한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않아도 되는 제 3자의 입장인 것과는 달리, 지원을 과거의 비밀에 대한 주동자로 설정하여 지원이라는 캐릭터에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씌웁니다. 그러한 죄책감은 지원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있는 관객들 역시 효과적으로 영화속 공포의 세계에 끌어들입니다. 죄책감과 공포... 김태경 감독은 이 두가지 상반된 감정을 적절히 이용하여 [가위]와 비슷하지만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는 [령]이라는 매우 효과적인 공포 영화를 만들어낸겁니다.
하지만 [령]이 배우들의 캐스팅에서 [가위]와 다른 면을 보입니다. [가위]가 하지원, 김규리, 유지태, 정준, 유준상 등 그 당시에 젊고 유망하지만 결코 스타가 아닌 배우들을 캐스팅함으로써 스타 시스템에 기대지 않은 영화적 공포 그 자체만으로 관객에게 어필했다면 [령]은 감하늘이라는 스타급 배우를 정면으로 내세워 스타 스시템에 어느정도 기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김하늘... 솔직히 그녀가 공포 영화와 어울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령]을 보고나서도 그녀가 공포 영화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결국 김하늘의 캐스팅은 김하늘이 처음으로 공포 영화에 도전했다는 매스컴과 관객의 관심을 끌어내려는 전형적인 스타 마케팅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포 영화에 어울리지않은 김하늘이라는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운 대신 김태경 감독은 전혜빈, 남상미, 신이라는 젊고 유망한 배우들을 조연으로 캐스팅하여 [가위]의 방식을 어느정도 수용합니다. TV의 오락 프로에서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보여줬던 전혜빈의 연기는 분명 그녀가 가수가 아닌 배우로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최악의 영화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던 남상미도 [령]에서는 비로서 배우로써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코미디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이의 연기는 찬사를 보내줘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열연을 펼칩니다. 김하늘이 매스컴과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위한 선택이었다면 젊고 유망한 조연 배우들은 [가위]에서처럼 신선함을 무기로 관객들을 공포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선택이었던 겁니다.
단지 지원의 남자친구 준호를 연기한 류진의 출연이 아쉽습니다. 여자 주인공을 보필하는 든든한 남자 주인공이라는 조금은 식상한 면이 있는 준호라는 캐릭터는 오히려 영화의 공포의 반감시키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지원이 혼자 비밀을 밝혀나간다면 더욱 무서웠을텐데... 왜 준호라는 캐릭터를 지원의 옆에 둠으로써 그 공포를 반감시키는지 이해가되지 않는군요. 너무 헐리우드식 스릴러 영화의 공식을 뻔하게 따라간것은 아닌지... 아쉬운 생각이 들더군요.
비록 주연 배우의 캐스팅에서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는 무리수와 너무 뻔한 남자 주인공 캐릭터로 영화속 공포를 반감시키기는 했지만 김태경 감독은 꽤 잘만들어진 공포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공포를 자아내는 장면에서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공포 영화의 대가인 안병기 감독은 [가위]에서 공포의 존재는 쉽게 화면속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분명 무서운 장면이 튀어나올 순간을 예감하고는 있지만 안병기 감독은 공포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의 공포심을 증폭스킵니다. 그러한 안병기 감독의 전략은 [폰]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무언가 공포스러운 존재가 옆에서 떠돌고 있다는 느낌만으로 관객의 공포를 자아내더니 마지막 순간에서야 공포의 존재를 정면으로 관객에게 내보임으로써 관객의 공포를 극대화시킵니다.
[령] 역시 그러한 안병기 감독의 전작들의 기법을 적극 수용합니다. 지원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공포의 존재는 쉽사리 관객앞에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물을 이용하여 일상적인 소재를 공포의 소재로 끌어들임으로써 관객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공포의 존재가 정면으로 관객앞에 나서는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어지는 그 순간 관객의 앞에 정면으로 튀어나오는 공포의 존재. 김태경 감독은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공포의 존재를 꼭꼭 숨겨두는 영특함을 보인 겁니다. 최근 개봉작인 [페이스]가 영화의 초반 시도때도없이 정체불명의 귀신을 자주 등장시켜 오히려 영화 후반의 긴장감을 떨어뜨렸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김태경 감독의 공포 감각은 신인 감독답지않은 노련함이 엿보입니다.
이렇게 공포 감각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김태경 감독도 마지막 반전에 대해서는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 이 영화가 그토록 자랑하는 마지막 반전은 생각만큼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며 조금만 집중애서 추리를 해낸다면 마지막 반전이 무엇인지 알아차릴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하지만 전 그 마지막 반전을 알아차림으로써 오히려 마지막 장면이 더욱 무서웠습니다. 모두다 끝났다고 믿어지는 그 순간 새로 시작되는 공포. 그것은 이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가 잘 살아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마지막 반전에 기대지 않고도 마지막 장면을 충격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능력. 김태경 감독은 [령]이라는 공포 영화에서 공포적인 요소와 더불어 드라마적 요소를 잘 살려냄으로써 예기치못한 재미를 관객에게 안겨준 겁니다.
그렇기에 김태경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안병기 감독처럼 공포 영화의 전문 감독으로 성장하지 않더라도 그의 드라마를 살려낼줄 아는 능력은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서 위력을 발휘할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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