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언피니시드] - 조작된 진실로 그들은 행복했었나?

쭈니-1 2011. 10. 11. 11:26

 

 

감독 : 존 매든

주연 : 헬렌 미렌, 제시카 채스테인, 샘 워싱턴, 제스퍼 크리스텐슨

개봉 : 2011년 10월 6일

관람 : 2011년 10월 10일

등급 : 15세 이상

 

 

내가 보고 싶은 영화와 흥행하는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다.

 

Daum view 황금펜촉 마크를 달았던 지난 주말, 저는 영화 블로거로서 더욱 많은 영화를 보고 영화 이야기를 써야 겠다는 의무감에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퇴근 후 9시까지는 웅이와 놀아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피에게 '이번 월요일은 퇴근하고 바로 영화보러 갈께.'라고 선언해 버렸죠.

황금펜촉 마크를 달고 어린 아이처럼 들뜬 철없는 남편이 귀여웠는지(?) 구피도 바로 승낙을 하더군요. 이렇게해서 저는 황금펜촉 마크를 달고 첫번째 영화 관람에 나섰습니다.

당연히 제가 보고 싶었던 영화는 지난 주 개봉작 중에서 기대 1순위였던 [언피니시드]였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에 확인하는 국내 박스오피스 사이트인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보고 그만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가 보려 했던 [언피니시드]는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8위에 불과했고, 지난 주에 [언피니시드]와 함께 개봉했던 [투혼]이 [도가니], [의뢰인]에 이어 3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대개 이런 경우 저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당연히 현재 박스오피스 순위가 어떻던 자기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영화 관람이 영화를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화 이야기로 이어지는 제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영화의 영화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꺼려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거의 10년 동안 개인 홈페이지, 블로그에 영화 이야기를 올리며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제 영화 이야기를 보고 허탈해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언피니시드]를 보고 영화 이야기를 쓴다면 역시 거의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영화 이야기가 될 것은 뻔해 보였습니다. 대신 [투혼]을 본다면 [언피니시드]보다는 더 많은 분들이 제 영화 이야기를 읽어 주시겠죠.

아니, 그렇게 따진다면 [도가니]나 [의뢰인]의 영화 이야기를 한번 더 쓰는 것이 효과적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영화 관람과 영화 이야기를 결부시키는 그 순간 제 영화 관람은 단순히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좀 더 복잡한 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극장에 도착한 그 순간까지 제 고민은 계속되었는데 결국 [언피니시드]에 대한 궁금증이 더 많은 분들이 내 영화 이야기가 읽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이기고 말았습니다.

 

 

1965년 동베를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언피니시드]는 1965년과 1997년을 오고가는 영화입니다. 1965년 이스라엘 모사드의 요원인 레이첼(제시카 차스타인), 데이빗(샘 워싱턴), 스테판(마튼 초카스)은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을 상대로 끔찍한 살상을 저질렀던 보겔(제스퍼 크리스텐슨) 박사를 이스라엘로 납치하여 법정에 세우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임무를 완수한 그들이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30년 후 레이첼과 스테판의 딸이 부모의 영웅적 활약상을 담은 책 출판기념회 장면이 이어집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임무가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상 기류가 흐릅니다. 출판기념회 내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레이첼(헬렌 미렌)에게 스테판(톰 월킨스)이 데이빗(시아란 힌즈)의 죽음 소식을 알립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30년 전의 비밀이 벗겨집니다.

 

[언피니시드]는 1965년과 1997년을 오고가며 30년 동안 감춰졌던 비밀을 하나씩 벗기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솔직히 보겔 박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영화 사이트에 공개된 스토리 라인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보겔 박사의 생존에 대한 반전으로 영화적 재미를 이끌어 가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입니다.

그 대신 놀랍게도 존 매든 감독이 선택한 영화적 재미는 바로 레이첼 일행과 보겔 박사가 벌이는 심리 게임입니다. 보겔 박사를 납치해서 서독으로 빼돌리려는 첫 번째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고 동독내 모사드 아지트에서 한동안 보겔 박사와 숨어 지내야 하는 레이첼 일행. 동독 경찰은 집집마다 수색을 하고, 그들을 도와줬던 미국마저 일이 틀어지자 뒤로 빠진 상황. 극도로 불안해진 레이첼 일행. 보겔 박사는 그러한 불안을 이용하여 그들을 자극합니다.

마치 [양들의 침묵]에서 렉터 박사(안소니 홉킨스)와 스탈링(조디 포스터)의 심리 게임을 보는 듯한 스릴을 안겨주는 레이첼과 보겔의 심리 게임은 영화의 중반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냅니다. 

 

 

실패한 임무, 그리고 조작된 진실 (스포 포함)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상대로 벌인 충격적인 대학살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이용한 보겔 박사의 도발. 레이첼과 데이빗은 그러한 도발을 견디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고 보겔 박사는 다시 행적을 감춥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입니다. 임무에 실패한 스테판. 정치적 야망이 있는 그는 자신의 경력에 오점이 남을 것을 우려해서 진실을 조작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레이첼과 데이빗은 그러한 스테판의 의견에 동조하고 맙니다.

[언피니시드]의 진짜 이야기는 바로 그 다음부터 시작됩니다. 나치 전범과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의 첩보물로 포장된 [언피니시드]는 그러나 그러한 첩보 영화의 재미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합니다. 레이첼 일행이 보겔 박사를 납치하는 장면에서 잠시 첩보 영화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할리우드의 정교한 블록버스터급 첩보 영화와 비교한다면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이 영화는 중반부까지 레이첼 일행과 보겔 박사의 팽팽한 심리 게임에 주목했고, 그들의 임무가 실패한 이후에는 조작된 진실과 그로인한 캐릭터들의 엇갈린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조작된 진실과 그로인한 엇갈린 운명의 사이엔 레이첼과 데이빗, 그리고 스테판 사이의 삼각 관계가 있습니다.

영화의 초반부터 레이첼과 데이빗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흐르고, 오직 개인적 야망으로 똘똘 뭉친 스테판의 욕망이 그 둘의 사이에 개입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존 매든 감독의 캐릭터 창조 능력이 정말 놀라웠는데, 그들의 삼각 관계는 3류 드라마의 흔하디 흔한 삼각 관계가 아닌 각자의 캐릭터와 조작된 진실로 인한 비극이 맞물린 너무나도 완벽한 삼각 관계였습니다.

임신으로 인하여 원치 않은 결혼 생활을 하는 레이첼. 조작된 진실에 지친 데이빗은 함께 떠나자고 합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는데 그들이 스스로 조작한 진실은 오히려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되어 버립니다. 결국 조작된 진실 위에 세워진 조작된 행복의 테두리를 벗어날 용기가 없었던 레이첼은 데이빗의 손을 놓고 맙니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은 엇갈리게 되고 맙니다.   

[언피니시드]는 다른 한편으로는 완벽한 멜로 드라마였습니다. 액션 전문 배우 이미지가 강했던 샘 워싱턴의 그 절절한 눈빛, 젊은 시절 줄리아 로버츠를 연상하게 하는 제시카 채스테인의 슬픈 표정은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조작된 진실로 그들은 행복했었나?

 

데이빗은 말합니다. 그때 우리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지만 레이첼은 냉정하게 대답합니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고...

분명 1965년 당시 그들에게 조작된 진실은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스테판에게는 자신의 경력에 오점 대신 화려함이 덧붙여질 절호의 기회였고, 보겔 박사의 심리 게임에 넘어가 임무를 실패하고 말았던 레이첼과 데이빗에게는 죄책감을 덮을 수 있었을테니까요.

하지만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고 그렇게 점점 커진 거짓은 결국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됩니다. 조작된 진실로 거짓된 영웅담 강의를 하는 레이첼의 표정은 어느덧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에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어쩌면 데이빗은 그러한 괴물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보겔 박사에 의한 얼굴의 상처 만큼이나 순수하고 예쁘던 레이첼을 변화시키고 지배하는 마음 속의 괴물. 조작된 진실처럼 조작된 행복은 레이첼을 점점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1997년 레이첼의 선택은 의미심장합니다. 자신을 존경하고 자신의 영웅담을 책으로 출판한 딸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계속 조작해야만 했던 레이첼은 아직 살아 있는 보겔 박사를 암살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죠.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녀는 자신을 압도한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사랑하는 딸에게 조작된 진실이 아닌 진짜 진실을 알려줄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왜 레이첼의 마지막 모습이 편안해 보였을까요? 화려한 조명 속에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그 순간에도 불편해 보이던 그녀. 그녀는 진정 편안했을 것입니다.

우린 수 많은 조작된 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조작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주위엔 조작된 진실이 만연해 있습니다. 과연 그런 조작된 진실을 만드는 그들은 행복할까요?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거짓이 키운 괴물에 함몰된 그들의 조작된 행복을 우린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존 매든 감독은 첩보 스릴러라는 상업 영화의 틀을 빌려 우리 사회에 조작된 진실에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 무겁지만 제 가슴에 떨림을 안겨줬습니다.

 

 

조작되는 그 순간 진실은 거짓이 된다.

우리 얼마나 많은 거짓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진심으로 진실을 조작하는 이들이 레이첼과 같은 선택을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