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윤인호
주연 : 김석, 이세영, 나아현, 김명재
개봉 : 2004년 3월 26일
관람 : 2004년 3월 16일
'SBS 접속! 무비월드'의 접시꽃 3번째 시사회인 [아홉살 인생]에 다녀왔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 처음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는 배우라고는 전혀 나오지도 않고(정선경이 주인공의 어머니로 나왔지만 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어린 아이들이 주인공인만큼 스토리도 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나이에도 지키고 싶은 여자가 있다'라는 재치넘치는 광고 카피에서부터 제 눈길을 사로잡더니만 고풍수러우면서도 귀여운 포스터와 먼저 시사회를 본 네티즌들의 열화와같은 반응이 점점 제게 [아홉살 인생]을 기대작으로 만들어 놓더군요.
그렇지않아도 개봉되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가 볼 생각이었는데 덜컥 시사회 기회가 생긴 저로써는 정말 기뻤습니다. 회사일이 바쁜 와중에도 팀장의 어이없는 표정을 뒤로하고 칼퇴근을 감행했고, 오랜만에 신림동 순대촌에 들려 구피와 순대 볶음을 먹으면서 그렇게 [아홉살 인생]을 볼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시사회장인 강남 주공공이 극장에 앉아 영화가 상영이 되기만을 기다리던 찰라... 제게 또하나의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접속! 무비월드'의 새 진행자인 김범수와 박진희가 직접 무대 인사를 나온 것입니다. 기대작인 [아홉살 인생]을 다른 사람들보다 10일이나 일찍 보는 것은 커다란 행운인데 평소에 좋아하던 박진희를 멀찌감치나마 직접 볼 수 있다니... 사실 처음엔 박진희를 못알아 봤답니다. 그냥 단순한 시사회 진행 요원인줄로만 알았죠. 역시 TV에서보는 연예인과 직접 보는 연예인에는 큰 차이가 있나 봅니다. 하지만 그녀의 연예인답지않은 그 꾸밈없는 모습이 오히려 좋은 인상으로 다가오더군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바쁜 와중일텐데 극장의 뒤켠에 앉아 끝까지 영화를 감상하더군요. 왠지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과 같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생각을하니 거참 별것 아닌데도 기분이 좋더군요. ^^
[아홉살 인생]은 MBC 프로그램 '느낌표'에서 소개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하는 영화입니다. 한달에 책한권 읽을까말까한 저로써는 당연하게도 원작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은 흥행에서 참패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책으로 인하여 높아진 기대치를 영화가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호흡이 길고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소설은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들에게 표현할 수 있지만 이야기의 호흡이 짧고 시간의 구애를 받을 수밖에 없는 영화는 핵심이 되는 몇가지 에피소드들을 추려내 영화를 구성해야하고 그러다보니 캐릭터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는 없이 수박 겉헕기식으로 아쉽게 끝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담 [아홉살 인생]은???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읽지 못한 저로써는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윤인호 감독이 백여민(김석)과 장우림(이세영)의 알꽁달꽁 사랑 이야기에 모든 에피소드를 집중시킨 덕분에 영화가 간결하면서도 깔끔하게 그리고 백여민이라는 캐릭터를 결코 놓치지 않으며 흘러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원작소설에서는 분명 그려졌을법한 70년대 우리들의 납루하면서도 정감이 넘쳤던 생활상은 상당부분 삭제되었지만, 전 윤인호 감독의 선택에 지지를 보냅니다. 그 수많은 영화들이 원작 소설에서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전부 잡아내려고 에피소드들을 이것저것 조금씩 차입하여 오히려 이도저도 아닌 영화를 만들어버리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을 수도없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윤인호 감독은 원작 소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매력적인 것들은 모두 과감히 포기하고 여민과 우림의 아홉살이지만 진솔한 사랑 이야기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은 겁니다.
[아홉살 인생]은 연기 경력이 짧은 어린 연기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들이 처음에 서투른 경상도 사투리를 써가며 책읽는 듯한 서투른 연기를 할땐 솔직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영화는 어쩔수없이 연기자들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인데 영화를 표현해야할 연기자들이 대사조차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영화적 재미를 잃어 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린 아역 연기자들의 서투른 연기가 오히려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입니다. 왠지 어색하지만 그렇기에 귀여운 이 영화속 수많은 아역 연기자들은 이 영화의 재미를 확실히 책임집니다.
그것은 분명 새로운 경험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아역 연기자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봐왔지만 그들은 언제나 베테랑 연기자들보다 더 완벽한 연기를 해왔습니다.(서투른 아역 연기는 예전에 아역 연기자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을때 만연했지만 뛰어난 아역 연기자들이 넘쳐나는 요즘엔 보기 힘든 일입니다.) [선생 김봉두]에서 강원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했던 아역 연기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연기를 한다기 보다는 마치 강원도 산골 마을의 순수한 아이들 그 자체처럼 느껴졋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린 서투른 연기에 열광을 보낼때도 있었습니다. 2002년에 개봉되어 선풍적인 흥행 바람을 일으켰던 [집으로...]의 경우는 아역 연기자인 유승호의 완벽한 연기보다는 김을분 할머니의 주름이 가득 담긴 연기에 더 많은 분들이 지지를 보냈었습니다. 마치 우리 할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던 김을분 할머니는 연기라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계신것만으로도 관객들을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파쿧히게 만들었었습니다. 만약 [집으로...]가 베테랑 연기자를 기용해서 할머니 연기를 맡겼다면 과연 이 영화가 그토록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런지 의심이갈 정도입니다.
[아홉살 인생]이 그렇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영화의 아역 연기자들은 뭔가 어색했습니다. 사투리 구사도 완벽하지 않았고, 완벽하다기보다는 뭔가 빈틈을 보여주는 연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벽해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지는 영화들에 비해서 이 영화는 꼭 끌어않아주며 그 부족한 빈틈을 관객의 힘으로 메꾸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아홉살 인생]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엔 두가지 사랑이 등장합니다. 어린 여민과 우림의 아홉살배기 사랑과 동네 피아노 여선생과 가난한 시인 아저씨의 성인들의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은 어쩌면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시골 촌놈인 여민과 서울에서 전학온 깔끔한 새침데기 우림의 사랑이나, 가난한 시인과 부잣집 피아노 선생의 사랑은 70년대 빈부의 차가 극심했던 시절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윤인호 감독은 철없는 어린 아이들의 사랑은 진솔하면서도 사랑스럽게 그린 반면, 시인과 피아노 선생의 사랑엔 애증이 가득 담긴 처절한 비극으로 막을 내립니다.
처음엔 시인과 피아노 선생간의 사랑 이야기가 뜬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민과 우리의 사랑 이야기에 모든 에피소드를 쏟아부었던 이 영화는 유독 시인과 피아노 선생간의 사랑을 중점있게 다룬 겁니다. 솔직히 그 두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어찌보면 여민과 우림의 사랑 이야기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민이 시인의 연애 편지를 본따 우림에게 연애 편지를 쓰다가 망신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굳이 시인의 사랑 이야기를 넣지 않아도 여민이 우림에게 연애 편지를 쓰는 계기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시인의 이야기를 넣지 않았다면 그 남는 시간에 여민과 우림의 사랑 이야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때쯤 여민과 우림의 예정된 이별의 장면에서 윤인호 감독이 굳이 시인과 피아노 선생의 사랑 이야기를 넣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 어른들의 속물적인 사랑과 아이들의 꾸밈없이 순수한 사랑을 비교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서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 두사랑의 끝이 똑같이 헤어짐이라는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 헤어짐의 느낌이 너무나도 다른 것은 어린 아이들의 때묻지않은 순수함에 있을 겁니다. 결국 시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인하여 여민과 우림의 순진한 사랑은 더욱 그 순수함이 빛을 발하는 겁니다.
영화가 끝나고 많은 분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물론 저도 보내고 싶었지만 그 감동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내게도 저런 순수한 사랑이 있었을텐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 일기에 등장하는 그녀의 쪼그마한 모습이 오래만에 떠올랐습니다. 어른들은 귀여운 자식을 보며 이런 소릴합니다. 눈에 넣어도 않을 거라고... [아홉살 인생]이 제게 그렇습니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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