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고지전] - 지옥을 경험하다.

쭈니-1 2011. 8. 8. 13:01

 

 

감독 : 장훈

주연 : 신하균, 고수, 이제훈, 류승수, 고창석

개봉 : 2011년 7월 20일

관람 : 2011년 8월 6일

등급 : 15세 이상

 

 

난 이 지옥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올해 여름에 개봉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중에서 제가 보지 못한 영화는 아직 개봉을 하지 않은 [최종병기 활]과 더불어 이젠 [고지전]만이 남았습니다.

쇼케이스 형식의 [고지전] 발대식까지 참여했던 제가 [고지전]의 관람을 차일피일 미룬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영화 시작 시간과 제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아뇨. 사실 그건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고지전]을 훨씬 이전에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고지전]의 관람을 미룬 이유는 바로 전쟁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이야기를 통해 여러번 밝혔지만 저는 전쟁 영화가 싫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극한 상황이 싫고, 그러한 상황에서 영화적 재미를 위해 영웅으로 태어나는 캐릭터들이 역겨웠습니다.

물론 [고지전]은 영웅주의 전쟁 영화는 아닐 것이라는 점은 영화 개봉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우리 전쟁 영화인 [태극기 휘날리며]를 연상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제게 [태극기 휘날리며]를 다시 보라고 한다면? 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표현해낸 지옥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태극기 휘날리며]를 좋아했듯이 이 영화도 좋아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려낼 지옥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도록 강요된 상황. 도대체 왜 죽여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명령에 따라야만 합니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괴물이 됩니다.

미루고 미뤘다가 결국 더 이상 이 영화의 관람을 미룰 수만은 없게된 지난 토요일 저녁. 웅이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구피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나가 야근 중이었습니다. 저는 후덥지근한 더위를 날릴 시원한 액션 영화가 보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제 욕망을 누르고 결국 [고지전]을 보러 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예상했던대로 생생한 지옥의 현장을 맛보고 왔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더욱 강력하고 잔인한 지옥을... 전쟁이 끝난지 60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 우리는 6.25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고지전]은 말합니다. 우리나라에게, 우리 국민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지옥의 실체를 직접 경험하고 확인하라고...   

 

 

도대체 왜 싸워야 했는지 그대는 아는가?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투철하게 반공 교육을 받았었던 세대입니다. 북한에는 굶주린 거지들이 넘쳐나고,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할 것 없이 힘든 노동을 하루 종일 해야하는... 말 그대로 생지옥같은 곳이 북한이라 배웠습니다.

당시 TV에서는 '똘이장군'과 같은 반공 정신이 투철한 만화 영화가 특선 영화라며 반복해서 방영했었고, '배달의 기수'와 같은 반공 프로그램도 TV에서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6.25 전쟁은 북한의 남침 전쟁이었고, 우리 국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 공산당과 싸운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세상은 흑과 백, 선과 악으로만 나뉜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6.25 전쟁에 대해서 한가지 의문점이 생겨났습니다. 북한도, 남한도,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인데 누가 누굴 침략하고, 누가 누구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것일까?... 라는 의문이...   

초등학교 시절 단군신화를 배우며 우리는 자랑스러운 단일 민족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누어진 삼국을 최초로 통일한 신라는 위대한 나라이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장군 김유신은 이순신, 세종대왕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일 민족의 나라에서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것입니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왜 그들은 서로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것이 제가 성인이 된 이후 6.25 전쟁에 대해서 생긴 의문점입니다.

당시 6.25 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주도했던 냉전 체제 아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패권을 다툰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문제는 일제의 침략으로 핍박받았던 일반 국민들에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문제였을 뿐,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뭔지 몰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그러한 이념은 중국과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로 북한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 정권과 미국, 일본을 등에 업고 남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 정권의 문제이고, 그들의 한반도를 향한 패권의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인 지배층은 안전한 뒷켠에 물러 앉아 일반 국민들을 선동하고, 협박하여 자기들을 대신하여 전쟁터로 내몹니다. 그렇게 전쟁터로 내몰린 젊은 이들은 자신이 왜 싸워야하는지도 모르는채 살기위해 적을 죽여야 하는 지옥에 갇혀 버립니다. [고지전]의 애록고지는 바로 그러한 지옥의 현장입니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지배층이 안전한 곳에서 '애록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내걸고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 지옥인 걸까요?

 

 

그들의 적은 북한군이 아니라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그 모든 것이다. (스포포함)

 

방첩대의 강은표 중위(신하균)는 휴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애록고지에 북한과 내통한 자가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됩니다. 그는 북한과 내통한 자를 색출하기 위해 이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고지전]은 강은표의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러하듯이 강은표 중위 역시 애록고지의 악어중대는 이해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전쟁은 내가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합니다. 승리를 한다면 살아남는 것이고, 패배를 한다면 죽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승리를 해야 하고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애록고지의 전투는 다릅니다. 전쟁을 이긴다고 해서 그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이 오늘도, 내일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승리와 패배 속에서 악어중대 대원들이 깨달은 것은 그들의 적은 북한군이 아닌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그 모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적들에는 무능력해서 대원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중대장도 속해 있습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악어중대원들은 점점 괴물이 되어 갑니다. 막내의 죽음을 희생시켜 북한군의 저격수를 찾으려 하고, 전투가 없는 경우에는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북한군들과 교류를 하기도 합니다.

북한군과 교류하는 장면은 [고지전]의 각본을 맡은 박상연의 [공동경비구역 JSA]와도 겹치는 부분인데, 그는 북한군이 그저 단순한 적이 아닌 우리들의 형제였음을 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왜 무서운건지 모르겠고, 민주주의가 왜 좋은지도 모르겠는 일반 국민들에게 6.25 전쟁은 그저 동족을 죽여야 하는 괴물들이 사는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쟁의 진정한 승리는 살아남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몸소 실천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강은표 역시 그러한 딜레마에 빠집니다. 중대원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능력한 중대장을 즉결 처분하는 괴물이 된 김수혁(고수)의 모습을 보며 그는 이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를 자신이 비난할 수 있는지 혼란에 빠져 버립니다.

 

 

전쟁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초능력자]에서도 그랬지만 고수의 그 순박한 얼굴은 [고지전]의 괴물을 표현하기에 딱 알맞았습니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며 괴물이 되어야만 했던 순박한 청년 김수혁. 고수가 연기했기에 그 임팩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습니다.

장훈 감독은 아예 작심을 하고 이 지옥을 관객에게 느끼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고수의 캐스팅도 그러한 지옥도의 한 일부분입니다.

그 외에도 지옥을 느낄만한 장치가 영화 곳곳에 발견되는데, 저는 특히 북한군의 저격수 차태경(김옥빈)의 존재가 가장 두려웠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날아들지 모를 총알. 그래서 대원들이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저는 긴장감을 풀수가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장훈 감독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러한 점은 [7광구]의 김지훈 감독이 배워야합니다.)  

영화의 후반, 중국군이 떼거지로 몰려 오는 장면은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무서웠습니다. 지금까지 본 전쟁 영화(제가 전쟁 영화를 안 좋아해서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의 그 어떤 장면보다도 가장 섬뜩한 장면일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휴전 협상의 효력이 발동되기 전인 12시간 동안 애록고지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는 부분입니다.

이제 끝났다 라는 안도감이 밀려 오는 그 순간을 파고드는 절망감. 장훈 감독은 '휴! 이 지옥도 끝이 났구나.'라는 안도의 순간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마지막 장면에서의 끔찍함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결국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새로 재건될 조국에서는 더 이상의 괴물은 필요 없기에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휴전과 함께 애록고지에 묻혀야할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끔찍한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강은표의 표정은 곧바로 영화를 감상하던 제 자신의 표정과 겹쳐졌습니다.

6.25 전쟁.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휴전한지 60년이 되어 가는 이 전쟁의 상처로 아직 대한민국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냉전체제는 끝이 났고, 이념전쟁은 전세계적으로 폐기처분된채 모두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매진하는 동안 우리나라만큼은 색깔논란, 이념전쟁에 파묻혀 분열되고 있습니다. 

그 끔찍한 지옥을 경험한 만큼 그 상처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북한이 아닌 전쟁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지전]은 관객에게 지옥을 맛보여주며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지옥에서 살아 남기 위해 허우적 댔던 그들.

그들 모두 전쟁의 희생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