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모비딕] - 서로를 믿지 못하는 우리가 만든 음모론

쭈니-1 2011. 6. 14. 07:01

 

 

감독 : 박인제

주연 : 황정민, 진구, 김민희, 김상호

개봉 : 2011년 6월 9일

관람 : 2011년 6월 10일

등급 : 15세 이상

 

 

내 인생의 음모론

 

제가 30대 초반에 다니던 회사가 있었습니다. 그 회사의 사장님은 일본에서 공부를 했던 제 나이 또래의 여자분이었는데, 상당히 카리스마가 있으신 분이었죠.

그런데 하루는 회사 직원들만 알고 있는 일들을 사장님이 자세히 알고 계신 겁니다. 처음엔 직원들이 서로를 의심했습니다. '네가 사장님께 일러 바쳤지?'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같은 부서의 직원들끼리도 사이가 급속도로 안좋아 졌습니다.

그러던중 제가 직원들과 수다를 떨며 농담으로 '우리 회사에 도청 장치가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사장님이 우리가 하는 말들을 전부 알고 계시지.'라고 말했고, 직원들도 웃으며 '정말 그런가보다. 이제 말 조심해야지.'라며 웃어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사장님이 보안업체 사람들을 불러 사무실 보안을 직접 점검하시는 겁니다. 마치 '우리 회사엔 도청 장치는 없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사무실에 도청장치가 있는지 점검하시더니 당연하게도 '도청장치 없음'이라는 결과물을 얻어 내셨습니다. 순간 저는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어쩌면 우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사장님이 직원들을 도청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제가 20대 초반이었던 시절, 저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가 국회의원이 되던, 누가 대통령이 되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치에 관심이 생기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IMF였습니다. 제 대학 졸업 연도에 터진 IMF로 저는 졸업과 함께 실업자가 되었고,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국민이 얼마나 괴로운지 몸소 경험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선거날이 다가오면 하나 하나 꼼꼼히 누굴 뽑아야 할지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수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유독 북한의 도발은 선거날 즈음에 발생하더란 것입니다. 보수 정권의 정치에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할 때쯤 북한이 알아서 도발을 해주고 그러면 국민들은 보수 정당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그냥 제 추측일 뿐이며, 농담같은 음모론일 뿐입니다. 정말 보수 정권과 북한의 무력 도발이 상관이 있는건지는 일개 국민에 불과한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음모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음모론이 생겨났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입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이 직원들을 도청한 것은 아닌지 의심한 것은 그만큼 사장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의 개입으로 직원들 사이가 나빠졌고, 저 역시 같이 일하는 여자 대리와 사이가 나빠져 엄청난 스트레스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보수 정권과 북한의 무력도발의 음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현 정부가 제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굳이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영화중 처음으로 음모론을 소재로한 [모비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 사고들이 사실은 정부를 통해 조작되었다는 것은 군사 정부 시절의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고(그러한 조작이 실제하였음을 밝혀진 것도 여러건 있었습니다.) 현 정부와 보수 언론의 조작이 의심되는 사건도 요즘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으니까요.

[모비딕]은 199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서울 근교의 발암교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 사건을 배경으로 그것이 '모비딕'이라는 비밀스러운 정부 위의 정부가 벌인 조작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굳이 [모비딕]은 2011년이 아닌 199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점입니다. 이 영화의 주요 소재인 민간인 사찰로 현 정부가 입방아에 오르 내린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니 지금 현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홍보 효과가 꽤 컸을 것이며, 199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으로써 소품이라던가, 거리 풍경 등을 17년 전으로 꾸미느라 제작비가 더 많이 들었을텐데 말입니다. 설마 현 정부의 압력 때문은 아니겠죠?(이건 너무 지나친 음모론일까요?)

 

이유야 어찌되었건, 음모론이라는 그럴 듯한 소재로 제 호기심을 마구 자극시켰던 [모비딕]은 1994년이라는 시대 배경으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욱 많습니다.

최첨단 시대, 할리우드의 음모론 영화들이 인공위성까지 동원하며 영화를 보는 동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섬뜩함을 안겨 주지만, [모비딕]은 1994년을 배경으로 한 탓에 그러한 섬뜩함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윤혁(진구)이 비밀 단체에서 갖고 도망친 자료들은 플로피 디스크이고, 이방우(황정민)와 성효관(김민희)은 그 디스크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서 숫자를 몇 시간동안 조합하기 시작합니다. 정부 위의 정부라는 비밀의 단체는 윤혁을 찾기 위해 고작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뭔가 스릴이 느껴져야 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오히려 '맞아, 그땐 그랬지!'라는 추억의 소품들과 암호를 풀겠다고 숫자들을 조합하는 이들의 삽질을 보며 살포시 웃음을 짓게 만듭니다. [모비딕]이 관객에게 추억을 안겨 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스릴러 장르의 영화가 스릴 대신 이러한 이러한 아련한 추억을 선사한다는 것은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1994년이라는 17년 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 [모비딕]은 현대의 음모론보다는 '예전엔 그랬지.'라는 과거형 음모론을 제시합니다. 저는 이 영화의 그러한 선택이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대 이상... 김상호, 김민희

 

하지만 그렇다고 [모비딕]이라는 영화에 낙제점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1994년이라는 시대 배경 탓에 영화의 스릴러적인 장점은 뒤떨어졌지만, 그 대신 이 영화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메꾸고 있었습니다.

특히 손진기 역을 맡은 김상호라는 존재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주연보다는 조연이 더 잘 어울리는 그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가 다른 영화에서도 그러했듯이 그저 영화의 감초 역할을 해내는 조연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손진기는 달랐습니다. 그는 어쩌면 사건을 파헤치는 이방우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로 자기 자신을 끌어 올렸습니다.

어린 아들이 소아암에 걸렸지만 결코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무례한 이방우에게도 항상 공손한 태도를 지니며, 죽음의 순간에서도 기자로써의 기질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은 우리 소시민들이 가져야할 덕목을 모두 모아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손진기는 자기 자신을 불살라, 하마터면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뻔한 이 맥빠진 스릴러 영화에 적절한 긴장감을 불어 넣습니다. 만약 손진기가 없었다면 저는 심하게 긴장감이 없는 이 영화에 더욱 깊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배우들의 기대이상의 활약은 김상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의 유일한 홍일점 김민희도 빛이 났는데, 영화를 보기 전에 '과연 김민희가 어울릴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화를 보니 그러한 제 생각은 그저 선입견이 불과했습니다.

손진기가 영화의 긴장감을 살려 냈다면 김민희는 영화의 활력을 살려냈습니다. 김민희 만의 톡톡 튀는 매력은 17년 전이라는 시대 배경에도 불구하고 매력이 넘쳐 흘렀는데, 남성 캐릭터만 가득 넘쳐나는 이 영화에서 그녀의 매력은 너무 튀지 않고 오히려 밸런스를 잘 맞춰주는 역할을 해냅니다.

특히 겁 없이 '모비딕'의 요원들이 민간인 사찰을 진행 중인 곳으로 들어가 녹음기를 되찾아 오는 장면에서 그녀의 매력이 돋보였는데 긴장감과 웃음을 동시에 안겨주는 명장면이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황정민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단, 조직의 배신자인 진구의 연기가 너무 틀에 박힌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이라 영화를 관람하는데 별다른 방해를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형 음모론의 실체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채 끝맺음을 하는 이 영화의 쿨한 결말입니다.

사실 조직의 배신자 한 명과 신문기자 세 명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고 무너질 조직이라면 이런 거대한 사건을 조작하지 못하죠. 애초에 음모론의 실체는 일개 기자들이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방우가 꿈 속에서 거대한 고래를 보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분명 실체는 있지만 너무 커서 그 실체를 확인할 수도, 밝혀 낼 수도 없는 고래의 거대함이 '모비딕'이라는 조직과 맞물리며 그 거대한 실체를 관객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영화가 '모비딕'의 실체를 더 감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후반에 '모비딕'의 수장으로 보이는 한 노인네가 등장하여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저는 그러한 장면이 이 영화의 음모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음모론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음모론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다행히 이 영화는 '모비딕'의 실체를 더 이상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방우가 기지를 발휘하여 그들의 음모를 막고, 윤혁이 기자회견을 열어 양심 선언을 하지만 분명 그것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러한 이 영화의 결말이 미지근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음모론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다면 오히려 재미가 없어지죠. 이런 열린 결말이 [모비딕]의 음모론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정말 우리나라에 은밀히 사건을 조작하는 세력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비딕]에서도 그러했듯이 그들의 실체는 분명 존재하지만 국민 개개인이 실체를 모두 보기엔 너무 거대해서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상상력이 음모론을 만들고 [모비딕]을 만드는 것이겠죠.

그러나 저는 음모론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정부가 국민에게 진정 믿음을 준다면 제가 음모론을 믿을 이유가 없어질테니까요. 우리들 사이에서 음모론이 생긴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못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서로를 믿지 못하는 우리가 만든 음모론... 그리고 그러한 음모론을 토대로한 [모비딕]... [모비딕]을 보며 음모론이 유행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불행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정말... 정말... 난 이 정부를 믿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제발 믿을 수 있는 정치를 펼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