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 - 이보다 완벽한 '비기닝'은 없었다.

쭈니-1 2011. 6. 3. 11:27

 

 

감독 : 매튜 본

주연 : 제임스 맥어보이, 마이클 패스벤더, 케빈 베이컨, 로즈 번, 제니퍼 로렌스

개봉 : 2011년 6월 2일

관람 : 2011년 6월 2일

등급 : 12세 이상

 

 

내가 웃어도 웃는게 아니야.

 

제가 영화만큼, 아니 어쩌면 영화보다 더 좋아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프로야구입니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부터 OB(현 두산) 베어스의 팬이었으니 벌써 30년 동안 베어스만을 응원하며 프로야구의 재미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힘드네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하여 두산 베어스가 전국구 안티팀이 되어 버렸고, 그와 발 맞춰 지난 5월 한달 동안 도저히 베어스의 야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졸전에 졸전을 펼치며 하위권으로 순위가 곤두박질 쳤으니까요.

그래서 올해는 순위에 연연하지 않고 응원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야구 중계를 보는 저는 어느새 승리에 웃고, 패배에 아쉬워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5월의 기나긴 부진에서 벗어나 3연승을 달리며 선두 SK에 스윕을 눈 앞에 둔 두산이 9회말 역전 투런 홈런을 맞으며 무너지는 그 순간 저는 제 DMB폰을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멋진 경기였는데, 졌어도 박수를 쳐줘야할 경기였는데 제 속은 부글부글 꿇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잠자리에 들면 경기에 대한 아쉬움에 잠을 설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씻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구피를 끌고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폭발 직전임을 눈치챈 구피는 다행히 극장을 따라와 주더군요. (제가 불쌍해서 극장 가줬다고 하네요.)

그날 제가 고른 영화는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 영화 자체는 환상적일 만큼 재미있었지만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 경기의 아쉬움이 불쑥 기억나서 저를 괴롭혔고, 영화를 보고나서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침대에 누었지만 눈을 감으면 홈런 맞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한동안 잠을 못이루고 뒤척여야 했답니다.   

 

 

엑스맨... 인류의 근대사에 뛰어들다.

 

비록 영화를 보며 너무나도 아쉬웠던 두산의 패배가 떠올라 영화 감상을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는 요근래 봤던 영화 중에서도 최고였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우와!'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 나올 정도로 이 영화는 캐릭터 구성이라던가, 스토리의 전개, 그리고 이미 흥행 대작으로 우뚝 선 [엑스맨] 시리즈의 완벽한 '비기닝'으로 제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1940년대에서부터 1960년대까지 인류의 근대사를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그려 넣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SF 영화들은 미래, 혹은 불분명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습니다. [엑스맨]도 마찬가지인데,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갖가지 희안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의 활약으로 영화의 현실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비현실성이 SF 영화의 매력이며, 재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는 그러한 비현실성을 뒤집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인류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에릭(마이클 패스밴더)의 캐릭터를 설명해 냈고,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려 함으로써 소련과 미국의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이 영화의 전체적인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보면 '정말 저랬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는 현실적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현실성이 영화의 재미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으면서 이전 [엑스맨] 시리즈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보니 [엑스맨]과 [엑스맨 2]를 연출했지만 [수퍼맨 리턴즈]를 연출하기 위해서 [엑스맨 : 최후의 전쟁]을 떠났던 브라이언 싱어가 제작을 맡았네요. 역시 제 취향에 맞는 [엑스맨]은 브라이언 싱어가 있어야하나 봅니다. 브라이언 싱어... 돌아와줘서 고맙습니다.

 

 

수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일수록 구심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제가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1, 2]에 환호했지만 브렛 래트너 감독의 [엑스맨 : 최후의 전쟁]에 실망했던 것은 영화의 구심점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습니다.

[엑스맨]은 각기 개성이 다른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의 영웅담입니다. 그렇기에 '슈퍼맨', '배트맨'과 같은 1인 영웅담이 애초에 될 수 없었던 영화입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그러한 점을 인식하고 영화의 구심점이 될 캐릭터를 선정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울버린(휴잭맨)입니다. 수 많은 영웅들이 난립하지만 [엑스맨]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울버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브렛 래트너는 스케일에 매달리며 영화의 구심점을 없앴습니다. 그는 수 많은 돌연변이들로 [엑스맨 : 최후의 전쟁]을 밀어 부쳤고, 그 덕분에 화려한 특수효과와 거대한 스케일을 갖추었지만 영화는 집중이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한 것은 흥행 결과로 나타났는데, 7천5백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엑스맨]은 전 세계적으로 3억 달러에 약간 못미치는 흥행 수입을 올렸고, 1억1천만 달러가 투입된 [엑스맨 2]는 4억 달러가 훌쩍 넘는 흥행 수입을 올렸지만, 2억1천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투입된 [엑스맨 : 최후의 전쟁]은 4억 6천만 달러의 흥행 수입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수치상으로 본다면 [엑스맨 : 최후의 전쟁]이 가장 많은 흥행 수입을 올렸지만 제작비 대비로 따진다면 가장 저조한 수익률을 올린 영화인 셈입니다.  

 

1억5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지만 전세계적으로 3억7천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리며 겨우 제작비 회수에 그쳤던 [엑스맨 탄생 : 울버린]을 끝으로 결국 제작사는 브라이언 싱어를 다시 불러 들였고, 감독 대신 제작을 맡은 브라이언 싱어는 [킥 애스]라는 독특한 액션 영화를 만들었던 매튜 본에게 연출을 맡겼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울버린을 대신 할 영화의 구심점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는 수 많은 돌연변이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특별한 텔레파시 능력을 지닌 찰스(제임스 맥어보이)와 금속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에릭이 강력한 카리스마로 구심점을 잡고 버티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캐릭터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매그니토의 심복 역할을 톡톡히 해냈지만 캐릭터가 크게 두각되지 못했던 (그나마 [엑스맨 : 최후의 전쟁]에서 매그니토에게 매정하게 배신당했던) 미스틱(제니퍼 로렌스)과 야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뛰어난 두뇌로 프로페서 X의 무기를 담당했던 비스트(니콜라스 홀트)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캐릭터의 향연은 앞으로 이 시리즈가 찰스와 에릭, 그리고 울버린 외에도 얼마든지 새로운 버전으로 새로운 캐릭터를 내세워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줬으며, [엑스맨]에 열광했던 저를 더욱 가슴 두근거리게 해줬습니다.

 

 

그들은 어쩌다가 친구에서 적이 되었는가?

 

자! 그럼 이쯤에서 찰스와 에릭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이끌어 내려는 세바스찬 쇼우(케빈 베이컨)에 의해 눈 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에릭.

[엑스맨]에서 인간과의 화합을 위해 돌연변이에게 위협을 가하는 이들에 대한 공격조차도 조심하던 찰스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돌연변이의 안전을 주장하고, 그러한 안전에 위협이 되는 인간을 향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던 에릭.

그가 왜 그토록 인간을 증오하고 불신을 갖게 되었는지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는 서두르지 않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에릭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고, 그의 행동에, 그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조하게 됩니다.

문제는 찰스입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엘리트 코스를 받으며 자란 그는 선척적인 선함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에릭과는 자란 환경 자체가 다르기에 그가 인간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에릭에 비해 캐릭터가 약한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암튼 이렇게 상반된 환경 속에서 각자의 초능력을 키웠던 찰스와 에릭이 친구가 되고 공공의 적인 세바스찬 쇼우를 제거하기 위해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세바스찬 쇼우가 제거된 다음입니다.

공공의 적이 있을 땐 찰스와 에릭은 힘을 합쳤고, 세바스찬 쇼우에 맞설 힘이 없는 인간들도 그들의 힘을 빌렸습니다. 하지만 막상 공공의 적이 없어진 다음엔 상황이 변합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이 무서워 자신을 도와 핵전쟁의 위기를 막은 돌연변이들에게 공격을 가한 인간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가진 에릭, 그리고 인간과의 화합을 강조하던 찰스는 여기에서 적이 됩니다. 그리고 [엑스맨] 시리즈의 주제에 자연스럽게 맞닿게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엑스맨]에는 악당이 없었습니다. 돌연변이의 능력에 두려워 떠는 인간과 그러한 인간에 맞서 돌연변이들이 어떻게 살아나가야할지 상반된 생각을 지닌 찰스와 에릭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비록 [엑스맨 : 최후의 전쟁]이 에릭을 전형적인 악당으로 변모시켰지만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는 그 모든 잘못된 상황들을 되돌려놓습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말합니다. [엑스맨]의 진짜 적은 인간의 어리석은 두려움이라고... 그러한 외침 만으로도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는 잠시 잊혀졌던 [엑스맨]의 주제의식을 되살려낸 아주 성공적인 '비기닝'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선한 찰스보다

인간이 저지른 만행으로 악당이 된 에릭에 공감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육체적으로 약한 인간들이 두려움으로 다른 동물들에게 가한 만행을 생각한다면,

나도 모르게 에릭을 응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