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신동엽
주연 : 하지원, 김재원
개봉 : 2004년 1월 16일
관람 : 2004년 1월 15일
2004년 1월 15일은 제 백수생활의 마지막 날입니다. 백수가 된지 고작(?) 2주만의 백수생활 청산이기에 아직은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가족을 위해(?) 다시 직장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백수탈출기념으로 영화 한편 보자고 조른 끝에 구피의 허락을 받아낸 저는 2004년 처음으로 돈내고 극장에서 볼 영광의 영화를 찾기위해 '맥스무비'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16일이라면 설날을 겨냥한 새로운 영화들이 대거 개봉을 할텐데 제게 허락된 시간은 15일이라는 겁니다. 할수없이 16일 개봉작을 하루 일찍 개봉하는 극장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목동 CGV에서 [내사랑 싸가지]가 15일부터 상영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솔직히 [내사랑 싸가지]보다 [빙우]가 더욱 보고 싶었지만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습니다. 제가 2주간 노는 바람에 반달치 생활비 예산이 비어버린 구피는 어떻게든 적은 비용으로 영화를 보겠다며 조조할인영화를 고집하는 겁니다. 다른 극장은 1회가 10시 30분 정도이건만 목동 CGV는 1회가 8시 10분이더군요. 8시 10분 영화를 보려면 최소한 6시 50분에는 일어나야하고, 7시 20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나와야 8시까지 극장에 도착하여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위해 6시 50분에 일어나야하다니... 아침 잠이 많은 제겐 정말로 끔찍한 일이지만 조조할인으로 영화를 보면 1인당 4천원밖에 안한다는 말에 솔깃한 구피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4천원은 '맥스무비'의 마일리지로 결재하고, 나머지 4천원은 신용카드 할인 2천원 받아 2천원만 결재하여, 구피와 저는 [내사랑 싸가지]를 단돈 2천원에 보는 쾌거를 이룩하고 말았습니다.
1월 14일 밤... 다음날 일찍 일어나려면 일찌감치 자야한다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2주간 놀면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질리 없죠. 결국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15일 새벽에 눈이 시뻘건채로 일어나 줄리운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오전 10시더군요. 평소같으면 이제서야 일어날 시간... 암튼 구피의 알뜰함은 아무도 못말린답니다. ^^;
[내사랑 싸가지]는 모두들 아시겠지만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이미 영화화된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도 그랬지만 [내사랑 싸가지]의 최대 덕목은 바로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의 코미디는 [엽기적인 그녀]처럼 초반엔 코미디로 진행하다가 후반엔 멜로적인 요소로 끝을 맺는 약간 변형된 슬픈 코미디와 [동갑내기 과외하기]처럼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편단심 코미디로 나뉩니다. 개인적으로 [엽기적인 그녀]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지지하는 저는 [내사랑 싸가지]를 보며 과연 이 영화는 어떤 코미디를 추구할 것인지 주의 깊게 봤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사랑 싸가지]의 코미디는 [엽기적인 그녀]식의 코미디입니다.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그랬듯이 [내사랑 싸가지] 역시 영화의 초반은 이유를 불문하고 관객을 웃기려 듭니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견우(차태현)의 평화로운 일상에 갑자기 엽기적인 그녀(전지현)가 끼어들며 이야기를 시작하듯이,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평범한 여대생 수완(김하늘)의 일상에 늙고 철없는 고딩 지훈(권상우)이 끼어들며 시작하듯이, [내사랑 싸가지]도 평범하고 발랄한 여고생 하영(하지원)의 일상에 싸기지 만땅인 대학생 형준(김재원)이 끼어들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형준의 싸가지는 하영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관객들은 그러한 과정을 보며 웃음을 쏟아내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엽기적인 그녀]도, [동갑내기 과외하기]도, [내사랑 싸가지]도, 모두 똑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영화의 후반입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초반의 코미디를 영화의 후반까지 끌고가며 끝까지 인터넷 세대를 겨냥한 가벼운 코미디 영화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면, [내사랑 싸가지]는 영화의 후반부에 하영과 형준이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며 슬픈 사랑 이야기의 전형으로 급반전됩니다. 코미디 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던 하지원과 김재원은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초반까지 끊임없이 관객들을 웃음의 도가니속으로 몰아넣던 영화의 분위기도 그에 맞춰 갑자기 축 쳐지기 시작합니다.
영화 초반의 웃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느닷없이 사랑이라는 슬픈 감정을 끌어들여 끝을 맺은 이 영화는 그렇기에 제겐 너무나도 아쉬운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내사랑 싸가지]는 최소한 영화 초반만큼은 꽤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첫장면부터 그 정체를 대담하게 드러냅니다. 오프닝씬인 백마탄 왕자와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공주의 꿈을 꾸는 하영의 모습에서 로맨틱 코미디임을 노골적으로 들어내더니만 그 왕자의 엽기적인 외모가 드러나며 이 영화의 로맨틱 코미디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관객에게 알려줍니다. 이러한 오프닝씬이 지나면 그 다음 장면에 바로 담임 선생의 코딱지가 하영의 입속으로 사정없이 들어가고, 여학생의 X이 변기속에 떨어지는 리얼한 효과음을 들려주며 화장실 코미디와 같은 가벼운 코미디를 추구하겠다고 선언하며 나섭니다.
이러한 이 영화의 대담한 선언은 영화의 중반까지는 무리없이 이뤄집니다. 발랄한 여고생 하영과 싸가지 만땅의 대학생 형준을 노비문서라는 말도 안되는 소재로 묶어 놓고 그들이 벌이는 티격태격 엽기발랄한 사랑 이야기를 관객에게 즐기게끔 합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지원과 김재원의 코미디 연기는 정말 압권입니다.
특히 하지원은 오랜 시행착오끝에 비로서 제대로된 코미디 영화를 만난 셈입니다. [색즉시공]으로 처음 코미디 연기에 도전한 하지원은 [색즉시공]의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코미디 연기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도그럴것이 [색즉시공]에서의 코미디 연기는 모두 임창정과 최성국, 그리고 수많은 엽기 조연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러한 코미디적인 요소에서 하지원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두번째 코미디 영화인 [역전에 산다]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실패작으로 판명받았습니다. [역전에 산다]에서 하지원은 [색즉시공]보다 적극적인 코미디 연기를 시도하지만 역시 코미디 연기의 달인인 김승우에게 가려진채 영화의 흥행에서마저 실패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내사랑 싸가지]는 다릅니다. 이 영화에서의 코미디는 전적으로 하지원의 몫입니다. 교복을 입고 평소 그녀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않던 코미디 연기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색즉시공], [역전에 산다]에서 코미디 연기의 달인인 임창정과 김승우에게 가려졌던 그녀의 끼는 인터넷 소설이라는 요즘 세대에 어울리는 재기발랄함과 만나 비로서 유감없이 발휘된 겁니다. 물론 '살인미소'를 '싸가지 미소'로 바꾼 김재원의 코미디 연기도 좋았지만, 세편의 코미디 영화에 연속으로 도전한 끝에 이루어낸 성공이기에 하지원의 코미디 연기는 앞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입니다. (하지원의 집요한 코미디 영화로의 도전이 경애로울 따름입니다.)
하나의 편견인지는 모르지만 인터넷 소설은 가볍습니다. 그것은 인터넷 소설을 경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지함보다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요즘 세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행이기에 가벼움은 당연한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딱딱한 정규 교육을 받고 등단한 정식 소설가에 의해서 쓰여진 소설이라면 이러한 가벼움은 약점일 수 있지만 톡톡 튀는 끼와 신세대적인 감각을 갖춘 아마추어 소설가에 의해서 쓰여진 소설의 가벼움은 오히려 오히려 최대의 강점인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벼움을 영화로 옮기며 간혹 무시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엽기적인 그녀]는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기 보다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 [클래식]과 같은 멜로 영화에 능력을 발휘했던 곽재용식 감수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그것은 곽재용 감독이 원작의 톡톡 튀는 감수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상상력으로 영화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내사랑 싸가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정말 가볍습니다. 하나의 작은 사건을 노비문서로 묶어버린 스토리 전개도 가볍고, 어느 한순간 웬수에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하영과 형준의 사랑도 가볍습니다. 김재원과 하지원의 연기도 한없이 가볍습니다. 하지만 신동엽 감독은 인터넷 소설의 덕목인 가벼움을 애써 감추려 합니다. 형준을 잊지못해 눈물짓는 하영의 모습은 이 영화의 가벼움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던지... 그런 하영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형준의 모습 역시 가벼움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벼움을 애써 감추고 신동엽 감독이 추구한 것은 슬픈 사랑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내사랑 싸가지]가 [엽기적인 그녀]식의 슬픈 코미디를 표방하면서도 [엽기적인 그녀]처럼 관객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엽기적인 그녀]가 후반부에 곽재용식 멜로 영화로 변신했다면, [내사랑 싸가지]는 슬픈 사랑이야기를 꺼내놓지만 초반의 코미디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결국 그러한 점은 [내사랑 싸가지]를 영화 초반의 웃음도 잃고 그렇다고 슬픈 사랑 이야기도 완성하지 못한채 이도 저도 아닌 영화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부천의 루미나리에의 그화려한 불빛속에 감동적으로 사랑을 이루는 하영과 형준의 모습이 얼마나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마무리인지 신동엽 감독은 정녕 몰랐을까요? 곽재용 감독처럼 자신만의 감수성으로 영화 자체를 바꿔버리는 능력도 없으면서 가벼움이라는 덕묵을 그대로 살리지도 못한채 우왕자왕하는 이 영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앞으로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질 것이라 합니다. 제발 그 영화들은 인터넷 세대의 재기발랄함을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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