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적과의 동침] - 석정리는 동막골이 아니잖아요!

쭈니-1 2011. 4. 28. 14:50

 

 

감독 : 박건용

주연 : 김주혁, 정려원, 유해진, 변희봉

개봉 : 2011년 4월 27일

관람 : 2011년 4월 27일

등급 : 12세 이상

 

 

[적과의 동침]은 우울한 내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면 더 아픈데, 침을 삼키는 것도 뱉는 것도 불편했고, 가끔 침에서 피도 섞여서 나오더군요. 감기에 걸려 편도선이 부은 것과는 조금 다른 통증이라고나 할까요.

병원에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수 없이 외근 나왔다가 이비인후과에 들렀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제 목을 들여다 보시더니 깜짝 놀라시더군요. 목젖이 찢어지고, 목구멍이 전부 헐어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며 며칠 동안 병원에 꾸준히 다니라는 진단을 해주었습니다. 엉덩이 주사 한대 맞고, 하루치 약을 조제받았습니다.

병원을 나오니 점심 식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애초에 간단히 김밥집에 가서 라면에 김밥을 먹을 계획이었지만 몸도 아픈데 맛있는 것을 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감자탕집에 들어가 제가 좋아하는 뼈다귀 해장국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제 생애 그렇게 맛 없는 뼈다귀 해장국을 저는 먹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주사를 맞아서인지 머리가 아프고 눈까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 없는 뼈다귀 해장국으로 인하여 속도 미식거렸고, 컨디션이 안 좋으니 막 짜증까지 났습니다.

 

외근이 일찍 끝나 집에 들어가 푹 쉴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짜증이 난 상태로 집에 가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영화로 짜증을 풀고 집에 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극장 앞에 섰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상한 고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의 리뷰에서 코미디인지, 드라마인지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글을 봤기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그날 저는 웃고 싶었거든요.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영화가 [적과의 동침]이었습니다. 한국 전쟁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무작정 웃기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웰컴 투 동막골]과 비슷한 영화라면 어느 정도 짜증은 풀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실수였습니다. [적과의 동침]을 보며 내 마음 속의 짜증은 점점 쌓여만 가고 있었습니다. [웰컴 투 동막골]을 기대했지만 [적과의 동침]은 억지 눈물을 흘리라며 제게 강요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그날 저는 속이 안 좋아 저녁밥도 굶었고, 프로야구를 보며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까 기대했다가 제가 응원하는 두산이 어이없는 플레이로 삼성에게 지는 것만 목격하며 혼자 짜증을 내다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날은 뭘해도 안되는 그런 날이었나봅니다.  

 

 

차라리 동막골을 꿈꾸지 말았어야 했다.

 

[적과의 동침]은 영화 홍보 단계에서부터 대놓고 제 2의 [웰컴 투 동막골]을 꿈꾸었습니다. 하긴 그럴만도 한 것이 영화의 소재도 그렇고, 스토리 라인도 [웰컴 투 동막골]과 비슷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5년에 개봉하여 무려 5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최종 흥행 스코어가 8백만명을 넘어선 빅히트작 [웰컴 투 동막골]과 닮고 싶어 하는 것은 [적과의 동침]으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죠.

[적과의 동침]의 스토리 라인은 이렇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석정리에 북한 인민군 부대가 들어오고, 석정리 사람들과 인민군은 아슬아슬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함께 생활을 하며 석정리 사람들과 인민군은 인간적인 정이 들며 잔혹한 전쟁과 사상, 이념을 떠나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인민군 군복을 입은 김주혁에게 정려원이 '전쟁 안해유?'라며 묻고 있고, 티저 포스터에는 아예 '같이 살래유?'라고 쓰여 있습니다. 급기야 어느 티저 포스터에는 '1950년 전쟁을 몰랐던 마을, 순박하고 유쾌한 로비 작전'이라며 [적과의 동침]이 휴먼 코미디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과의 동침]은 결코 [웰컴 투 동막골]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외부와의 왕래가 거의 없는 외딴 산골 마을에서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함께 발이 묶이게 되고, 결국 순박한 동막골 사람들과 함께 국가도, 이념도 초월하는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담은 [웰컴 투 동막골]은 전쟁 영화의 탈을 쓰긴 했지만 관객을 웃기고 울렸던 휴먼 코미디에 충실했던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적과의 동침]은 정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이 영화는 휴먼 코미디의 탈을 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쟁 영화였습니다. 이념을 초월한 진정성이 느껴졌던 [웰컴 투 동막골]과는 달리 석정리 마을 사람들을 살기 위해서 거짓으로 인민군에 동조하고, 인민군 역시 설희(정려원)와 10년 전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정웅(김주혁)을 제외하고는 석정리 마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진정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민군과 석정리 마을 사람들의 관계에서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사랑과 우정을 느낀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과의 동침]의 코미디 장면은 억지로 웃기려 하며 '우린 휴먼 코미디라니까...'라고 우겨대는 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휴먼 코미디인척 하느라 애쓴다.

 

뭐 처음부터 이 영화가 전혀 웃기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 중 유해진과 김상호가 분위기를 휘어 잡으며 코믹한 분위기의 물꼬를 틀었던 영화의 초반부는 확실히 휴먼 코미디로서 기대하게 만듭니다.

특히 저는 일제시대, 해방 후,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살아 남기 위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며 몸부림치는 이웃 마을 백씨(김상호) 캐릭터가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우리는 그를 매국노, 박쥐 같은 놈이라고 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야 하는 그로서는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죄다'라는 그의 대사처럼 백씨를 박쥐 같은 놈으로 만든 것은 잔혹한 한국의 근대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적과의 동침]은 그런 백씨를 코믹한 캐릭터로 희화시키며 영화와 어울리는 웃음을 제게 안겨줬습니다.

물론 유해진이 연기한 재춘이라는 캐릭터도 웃기긴 했습니다. 코믹 연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해진의 코믹 연기로 탄생한 재춘은 시정일관 이 영화에 활력소를 불어 넣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재춘이라는 캐릭터가 좀 생뚱맞게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 튀는 느낌이었습니다.

 

백씨와 재춘의 코믹 캐릭터가 제대로 그 힘을 발휘되는 장면은 단연코 반공호 유치 장면입니다.

연합군의 폭격을 대비하여 자신의 마을에 인민군의 반공호를 만드려는 백씨와 재춘의 한바탕 소동극은 잠시 동안이라도 [적과의 동침]을 전쟁을 소재로한 휴먼 코미디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웃음은 길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의 폭격이 이어지고 마을에 본격적인 전운이 감도는 장면으로 분위기가 급변하면서 백씨의 존재감은 급작스럽게 줄어들고, 재춘은 이 영화를 통해 가장 비극적인 캐릭터로 변신하며 이 영화는 서서히 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웰컴 투 동막골] 운운하며 제게 휴먼 코미디라는 헛된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던 [적과의 동침]이 정작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정웅과 설희의 슬픈 사랑이었습니다. 그 둘의 아버지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사이였고, 정웅과 설희 역시 10년 전 어린 나이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던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독립이 되어서도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현실 탓에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정웅과 설희의 슬픈 사랑을 그리기 위해 [적과의 동침]은 2시간 15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준비했고(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러브 스토리는 그다지 절절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선 극단적은 슬로우 모션으로 관객의 눈물을 최대한 쥐어 짜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적과의 동침]의 정체입니다.

 

 

이 영화를 욕하지 않겠다. 단지 촌스러운 감독과 잘못된 홍보를 욕하겠다.

 

[적과의 동침]의 박건용 감독은 2009년 이범수와 조안을 캐스팅하여 비인기 스포츠 종목인 여자 역기 선수들의 실화를 다룬 [킹콩을 들다]로 감독 데뷔를 했습니다.

[킹콩을 들다]는 당시 비인기 스포츠 종목을 소재로하여 흥행에 성공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국가대표]의 뒤를 잇는 영화라며 대대적인 홍보를 했지만 막상 영화는 억지 눈물로 뒤범벅이 된 민망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킹콩을 들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러한 억지 눈물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적과의 동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막골'이 전쟁이라는 현실에서의 도피처와 같은 판타지의 공간이라면 [적과의 동침]의 '석정리'는 실제 존재하는 동네이고, 영화가 끝나면 그 마을 어르신들의 인터뷰를 내보내며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후반부 너무 대놓고 울리려하니 짜증이 났지만, 실제 한국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들의 증언을 듣고 나니 조금 제 짜증이 풀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감동적인 실화를 그렇게 촌스러운 감동 코드로 말아 드신 박건용 감독의 연출력은 다음 영화에선 좀 더 세련되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영화의 반공 코드도 그렇습니다. 한국 전쟁을 겪으며 우리나라의 반공정신은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심했습니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끔찍한 한국 전쟁을 겪으신 분들에게 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우리의 동족이라기 보다는 죽여 마땅할 원수와도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소련이 무너지고, 전 세계를 광기로 물들게 했던 이념 논쟁도 자본적 원리에 의해 폐기처분된지 오래 전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웰컴 투 동막골]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였으면서도 이념이 아닌 사람을 위주로 휴먼 코미디를 완성해 무조건적인 반공정신을 강조했던 우리 관객들의 정신적 성숙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60년이라는 세월 동안 뿌리 깊게 자리잡은 반공 정신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그렇기에 [포화 속으로]와 같은 전쟁 영화가 버젓이 흥행에 성공하기도 하는 것이겠죠.

[적과의 동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이 비록 인민군이라지만 이 영화는 반공 코드로 진행됩니다. 전세가 역전이 되어 바쁘게 퇴각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굳이 마을 사람들을 죽이겠다면 시간을 지체하는 이해하기 힘든 북한군 장교(전노민)의 일그러진 모습에서 그러한 반공 코드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뭐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영화가 잇으면 저런 영화도 있어야 겠죠. 하지만 최소한 관객에겐 '우린 이런 영화다'라고 떳떳하게 밝힐 용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겁하게 [웰컴 투 동막골]의 가면을 쓰고 그와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면 관객을 속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저는 그것이 싫고, 기분 나쁜 것입니다.

 

 

인민군과 순박한 마을 사람들을 화목하게 그려놓고,

헤드카피를 코믹하게 꾸민다고 해도,

석정리는 석정리일뿐, 동막골이 되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