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제인 에어] - 문학소년을 꿈꾸던 30년 전으로 돌아가다.

쭈니-1 2011. 4. 25. 08:37

 

 

감독 : 캐리 후쿠나가

주연 : 미아 와시코브스카, 마이클 패시벤더, 제이미 벨, 주디 덴치

개봉 : 2011년 4월 20일

관람 : 2011년 4월 21일

등급 : 12세 이상

 

 

영화를 보며 문학소년을 꿈꾸던 30년 전의 그때로 돌아가다.

 

책을 좋아하는 웅이는 책장에 책에 가득 넘쳐날 정도로 책을 쌓아 놓고 매일 읽고 또 읽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피는 다른 집과 비교하면 우리가 웅이에게 책을 많이 사준 편은 아니라고 하네요.

생각해보면 제가 어렸을 때에는 집에 책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계 명작 소설 전집'과 '세계 추리 소절 전집' 정도. 하지만 그렇게 몇 권 안되는 소설만으로도 저는 꿈을 키웠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습니다.

당시 읽었던 '세계 추리 소설 전집' 덕분에 지금도 저는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고, 왠만한 스릴러 영화의 반전 정도는 맞출 수 있는 추리력(?)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 '세계 명작 소설 전집'이었습니다. 그 중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춘기 시절 제게 지고지순하고 순진한 사랑관을 확립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브론테 자매의 '제인 에어'와 '푹풍의 언덕'도 상당히 좋아했는데 그 덕분인지 저는 남자로서는 드물게 여성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좀 억지인가요? ^^;)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영화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책과 멀어졌고, 어린 시절 좋아했던 '제인 에어'와 '푹풍의 언덕'의 줄거리도 가물가물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들 소설이 가지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와 열정적인 사랑의 이미지는 여전히 제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개봉한 [제인 에어]를 보며 제 머리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제인 에어'의 이미지와 줄거리가 하나씩 기억속 깊은 곳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그것은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제인 에어]를 보러 가며 구피에게 '어린 시절 샬롯 브론테의 원작 소설을 굉장히 좋아했었어.'라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내용이 뭔대?'라는 질문에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니 까맣게 잊혀졌던 원작 소설의 내용이 새록 새록 기억이 나기도 하고, '제인 에어'를 읽었을 당시 느꼈던 제 감정이 30년이라는 무지막지한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의 제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인 에어]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마치 책을 좋아하던 30년 전 꼬마의 시절로 돌아가 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너무 자주 읽어 손 때가 묻은 책장을 넘기는 그 설레임으로 영화 [제인 에어]를 봤습니다.

 

 

[디 아더스]가 떠오른 것은 나 뿐인가?

 

[제인 에어]는 제인(미아 와시코브스카)이 손필드 저택을 도망쳐 아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을 헤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어디에선가 그녀를 부르는 듯한 음흉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죽음 직전까지 가지만 세인트 존(제이미 벨)에게 구해집니다.

이후 부터는 세인트 존 남매와 함께 생활하며 가난한 농부의 딸들을 가르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제인의 현재와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사건들을 나열한 과거 회상씬으로 나눠어 영화가 진행됩니다.

과거 회상씬은 외숙모의 학대와 규율이 엄격한 자선 학교에 버려진 사연, 그리고 그 곳에서 가장 절친했던 친구를 잃게 되고, 손필드 저택의 가정 교사가 된 사연들이 짧지만 중요 부분만 콕콕 찝은 족집게 과외 수업처럼 제인의 캐릭터를 완성시켜 놓았습니다. 

이미 쉴새없이 빵빵 터지는 [분노의 질주 : 언리미티드]를 막 본 후였고, 시간이 새벽을 향해 가고 있는 늦은 시간대 였기에 조금이라도 지루했다면 제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 졌을텐데, 캐리 후쿠나가 감독은 현재와 과거를 뒤 섞어 놓으면서도 제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짧지만 알차게 구축된 제인의 캐릭터는 이후 본격적인 스토리 전개에 돌입합니다. 손필드 저택에서 저택의 주인인 로체스터(마이클 패스벤더)와 아슬아슬한 사랑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보다는 약간은 무섭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오프닝씬에서 무언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 제인의 모습 때문이었으며, 무언가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손필드 저택의 분위기 때문입니다.

실제 저는 [제인 에어]를 보며 엉뚱하게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았던 공포영화 [디 아더스]가 생각났습니다. 어두운 저택,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하인들, 그리고 저택을 빠져 나가려 해도 빠져 나갈 수 없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길.

그러한 으시시한 분위기는 제인이 우편을 부치기 위해 시내에 갔다가 로체스터와 마주치는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제인 에어]의 장르가 공포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싹함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읽었던 '제인 에어'의 암울한 분위기가 기억이 나더군요. '그래, 소설에서도 그랬었어. 내가 '제인 에어'를 좋아한 이유가 바로 그런 분위기 덕분이었어.' 영화의 분위기는 오싹했지만 오히려 저는 그러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비극적 사랑으로 인한 제인의 성장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인 에어]의 오싹한 분위기가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이 발전하면서 밝은 분위기로 전환된다는 것입니다.

어둡고 안개가 자욱했던 손필드 저택의 주변도 환한 빛과 아름다운 꽃이 어우러진 멋진 공간이 되고, 무언가 으시시했던 저택도 가난에 찌들었던 제인의 신분 상승을 암시하듯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디 아더스]와 같은 분위기가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오만과 편견]같은 분위기로 단숨에 전환되는 순간이죠. 그러한 분위기의 전환은 주인공인 제인의 심리 상태와 맞물려 있는데... 로체스터의 비밀이 밝혀지며 이 밝은 분위기는 다시 절망적인 어두운 분위기도 전환됩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제인의 캐릭터의 성장입니다. 초반 제인은 반항기가 가득한 당돌한 여자 아이였고, 중반엔 로체스터와 가슴 떨리는 사랑을 나누는 순진한 소녀였으며, 후반에 가서는 사랑의 상처로 인해 부쩍 성숙해버린 숙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의 성장 과정에서도 사랑에 대한 제인의 신념은 바뀌지 않습니다. 제인을 구해준 세인트 존이 제인에게 사랑은 없지만 신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며 청혼을 할 때 제인은 단호하게 그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만큼은 스스로에게도 당당했던 셈이죠.

 

마지막 제인와 로체스터가 재회를 하는 장면을 보며 저는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습니다. 영화를 보며 예전에 읽었던 원작소설에 대한 기억이 전부 떠올라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완전히 기억이 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체스터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제인의 모습을 보며 제 눈가엔 눈물이 고였었습니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은 쇠사슬에 묶여 움짝 달짝 할 수 없는 남자와 새장에 갇혀 안타까운 날개짓만 퍼덕거리던 여자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 로체스터는 쇠사슬에 묶인 자신을 풀어내기 위해 스스로 희생 당했고, 제인은 뜻밖의 행운으로 새장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처지는 분명 뒤바뀌었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제인은 사랑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로체스터를 위한 희생을 감수할 것입니다. 그가 진정한 사랑임을 오랜 방황 끝에 알았기 때문에...

상처 입은 로체스터를 안아주는 제인의 강한 모습에서 끝나는 이 영화를 보며 고전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고전의 힘은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저를 이렇게 울리고 있네요.

 

 

주목해야할 이름 미아 와시코브스키

 

일주일 전에 봤던 [한나]에서 저는 시얼샤 로넌이라는 배우를 극찬했었습니다. 이 어린 배우는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앳띤 얼굴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어떤 캐릭터도 마치 백지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 듯이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인 에어]를 보며 저는 미아 와시코브스키라는 또 한명의 배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팀 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소녀로 성장한 앨리스의 당찬 모습을 보여 줬던 그녀는 [제인 에어]를 통해 다시한번 고전 명작에 어울리는 고풍스러움과 현대의 여성으로 당찬 매력을 동시에 보여주며 제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인 에어]에서 그 어떤 시련이 와도 나는 울지 않겠다는 듯이 꼭 다문 입술은 그렇기에 더욱 제 마음을 아프게 했고, 봉건적이고 보수적인 19세기 귀족 사회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은 그녀의 강인함은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미아 와시코브스키는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의 캐스팅이 유력시된다고 하네요. 그녀 덕분에 [스토커]가 더욱 기대됩니다.

 

결국 [제인 에어]는 제가 이 영화에 기대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준 영화입니다.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으며, '세계 명작 소설 전집'을 읽었던 30년 전의 내 모습을 회상할 수 있게 해주었고, 시얼샤 로넌과 함께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받고 있는 젊은 여배우인 미아 와시코브스키의 완벽한 연기가 주는 영화적 쾌감도 즐길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제인과 로체스터의 만남을 통해 고전적인 슬픈 사랑의 아련함까지 안겨줬으니... 비록 하루에 두 편의 영화를 봐야 했기에 피곤했지만 그 피곤함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제인 에어]를 보고나니 30년 전 읽었던 '세계 명작 소설 전집'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고전 소설들을 읽고 그러한 고전의 세계에 푹 빠져 지냈던 30년 전의 그때처럼... [제인 에어]는 30년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 같은 영화입니다.

 

 

30년 전의 나는 비 오는 날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햇살이 따가운 날 하염없이 걷는 것을 좋아했으며,

바람이 부는 날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때를 회상할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