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한나] - 하얀 백지 위에 새로운 액션을 그려넣다.

쭈니-1 2011. 4. 15. 12:48

 

 

감독 : 조 라이트

주연 : 시얼샤 로넌, 케이트 블란쳇, 에릭 바나

개봉 : 2011년 4월 14일

관람 : 2011년 4월 14일

등급 : 15세 이상

 

 

백지같은 배우 시얼샤 로넌

 

2008년 2월에 국내에 개봉했던 [어톤먼트]는 관객들의 무관심 속에 조용히 상영을 마감한 흥행 실패작입니다. 하지만 [어톤먼트]는 제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 첫번째는 조 라이트 감독의 고품격 연출력에 의한 감동이었고, 두번째는 키이라 나이틀리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배우라는 점을 깨달았으며, 세번째는 할리우드의 신성 제임스 맥어보이의 발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시얼샤 로넌이라는 배우의 놀라운 재능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환희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분명 [어톤먼트]의 가장 큰 발견은 조 라이트 감독도, 키이라 나이틀리도, 제임스 맥어보이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나이 열다섯에 불과했던 어린 배우 시얼샤 로넌이었습니다.

[어톤먼트]에서 시얼샤 로넌은 굉장히 특이한 매력을 보여줬습니다. 첫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의 순수함과 질투에 눈이 멀어 상대를 파멸시켰던 섬뜩한 광기, 그리고 용서를 받기 위한 희생과 뜨거운 눈물까지... 성인 배우가 해내기에도 무리가 있는 이 복잡한 내면 연기를 이 어린 배우가 거뜬히 해낸 것입니다.

 

시얼샤 로넌이 진정 기대가 되는 것은 아직 이 배우가 백지 상태의 배우라는 것입니다. 백지 위에 그 무엇이라도 그릴 수 있다는 그런 기대감을 안겨주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어톤먼트]가 그랬습니다.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 브라이오니라는 캐릭터 위에는 어느 순간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순수함을 그렸졌다가, 그 순수함을 싹 지워내고 질투에 사로잡힌 광기 어린 소녀의 그림이 그려지더니, 다시 모든 것을 지워내고 언니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 고행을 선택한 소녀의 그림이 자유자재로 그려졌습니다.

피터 잭슨은 그러한 시얼샤 로넌의 백지 같은 순수함을 한 눈에 알아봤습니다. 그는 [러블리 본즈]에 시얼샤 로넌을 14살에 살해 당한 수지라는 캐릭터에 캐스팅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당했기에 백지 상태의 영혼이었던 수지는 사후 세계의 경험을 통해 슬픔과 분노 그리고 용서의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냅니다. 시얼샤 로넌이라는 순수한 백지 상태의 배우 위에 피터 잭슨 감독은 그만의 독특한 사후 세계의 이야기를 맘껏 그려낸 것입니다.

[한나]는 장담컨대 시얼샤 로넌의 매력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입니다. 아버지인 에릭(에릭 바나)과 단둘이 핀란드의 설원에 숨어 살던 한나(시얼샤 로넌)는 뛰어난 살인 병기이지만 세상에 대해서 그 무엇도 경험하지 못한 백지 상태의 순수함을 지닌 캐릭터입니다. 시얼샤 로넌은 어머니의 복수를 해야하는 살인병기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춘 사춘기 소녀의 내면을 처음부터 차곡차곡 그려냅니다.

 

 

한나... 그녀에게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가?

 

[한나]는 새하얀 설원 위에 사냥을 하는 한나를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하얀 눈이 덮힌 설원은 마치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 같았고, 음악조차 자제한 정적은 영화의 시작부터 긴장감을 감돌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얀 설원 위에 그려진 첫 그림은 사슴의 죽음입니다. 조 라이트 감독이 [한나]라는 하얀 백지 위에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처음부터 관객에게 선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사슴의 내장을 꺼내고, 뒤에서 습격하는 아버지 에릭과 살벌한 결투를 벌이는 한나의 눈에는 아직 순수함이 어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얀 설원 위의 오두막에서 에릭에게 음악에 대해서 묻는 한나의 그 표정은 마치 [정글북]의 모글리 같았습니다. 너무 어려서부터 인간 사회에 동떨어져 살았기에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할 뿐, 때 묻지 않는 순수함을 지닌 모글리처럼 한나 역시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의 그 모든 것인 아버지에 살인 기술을 배웠을 뿐,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도, 에릭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한나라는 하얀 백지 위에 희미한 밑그림만을 그렸던 에릭은 한나를 인간 세상에 내보내며 그녀 스스로 자신의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이제 백지 위에 무엇을 그릴지는 한나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처음 한나는 에릭이 그려준 밑그림을 바탕으로 어머니를 죽인 원수인 마리사(케이트 블란쳇)를 죽이기 위한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하지만 그녀는 모로코의 사막에서 여행중인 소피 가족을 만나고 소피와 친구가 되며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새롭게 그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녀 역시 가족과 단란한 행복을 즐기고 싶었던 가려린 소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한나라는 백지 위의 그림은 두 가지 그림이 혼합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살인 병기로써의 섬뜩한 본능과 사춘기 소녀로써의 순수한 열망. [어톤먼트]에서도 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 경험이 있는 시얼샤 로넌이지만 [한나]에서는 [어톤먼트]를 한 단계 넘어섭니다.

[어톤먼트]가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존의 그림을 지우는 방식을 택했다면 [한나]는 기존의 그림과 새로운 그림이 하나의 백지 위에 조화를 이룹니다. 시얼샤 로넌에게는 [어톤먼트]보다 더욱 강도 높은 연기력이 요구된 셈입니다.

하지만 시얼샤 로넌은 이번에도 이 어려운 임무를 잘 수행합니다. 섬뜩한 살인 병기와 순수한 사춘기 소녀라는 서로 상반된 그림이 하나의 백지 위에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시얼샤 로넌의 연기가 그만큼 뛰어 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겠죠.

 

 

순수한 사춘기 소녀로 살 수 없었던 살인 병기의 울부짖음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가 미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소피에게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한나. 그녀는 자신의 살인병기의 모습을 소피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피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킬러를 처치하는 현장을 소피에게 들킨 한나의 눈빛은 슬픔으로 흔들리고 맙니다.

어쩌면 그 순간 한나는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백지 위에 아무리 순수한 사춘기 소녀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세상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후 한나의 그림은 다소 변화가 생깁니다. 영화의 초반, 한나의 액션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두려움과 동정심을 제거한 살인 병기답게 그녀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가짜 마리사의 목을 꺾어 버립니다.

하지만 후반부의 한나의 액션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에릭에게 반항하고, 자신 앞에 선 마리사에게 날 그냥 내버려 두라며 외칩니다. 그러한 변화는 백지 위에 순수한 사춘기 소녀의 그림을 더이상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한나의 자괴감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듯 [한나]는 시얼샤 로넌의 연기 만으로 이 모든 장엄한 그림을 차츰 완성해냅니다.

 

[한나]는 분명 시얼샤 로넌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엔 액션 영화에 잔뼈가 굵은 에릭 바나가 나오고, 연기력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케이트 블란쳇이 나오지만 시얼샤 로넌은 이 두 베테랑 배우를 압도합니다.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한나가 너무 강력하다보니 한나와 맞서는 마리사가 상대적으로 너무 약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분명 한나와 마리사의 마지막 대결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전해 줘야 하는데 한나의 강력함 때문에 그러한 긴장감 보다는 다시 초반의 냉정한 살인 병기로 돌아간 한나의 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결국 한나와 마리사의 대결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 김 빠지는 대결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그녀의 연기는 얄미울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단지 이 영화의 백지는 한나만을 위해 마련된 것이기에 마리사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뿐입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시얼샤 로넌이라는 백지 위에 새로운 액션을 그려넣었다.

 

[한나]에서 시얼샤 로넌의 연기는 어린 배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시얼샤 로넌에게 맘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준 이는 감독인 조 라이트라는 점입니다. 이미 조 라이트 감독은 [어톤먼트]를 통해 시얼샤 로넌의 재능이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완벽한 연출력을 펼쳐 보였고, [한나]에서도 그의 연출력은 역시 시얼샤 로넌의 연기를 뒷받침해줍니다.

사실 조 라이트 감독이 [한나]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전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는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 [솔로이스트]를 통해 고품격 드라마에 그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살인병기로 키워진 어린 여전사의 액션과 조 라이트의 조합은 그의 전작을 본 이라면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해냈습니다. 분명 할리우드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액션과는 틀렸지만 그의 감각적 연출력은 [한나]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특히 로케이션 장소와 그러한 장소를 이용한 액션씬이 백미였는데, 핀란드의 설원에서의 오프닝과 모로코의 사막에서의 추격 장면은 한나의 심적 상황과 맞물리며 시너지 효과를 줍니다.

이 영화에서 펼쳐진 액션씬 중에서 저는 콘테이너 박스가 쌓여 있는 곳에서의 액션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로와 같은 콘테이너 박스 사이를 오고가며 3명의 킬러와 혈투를 벌이는 한나의 모습은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반부는 살인병기로 키워진 한나가 어릴 때부터 아끼는 그림 동화 풍의 폐허가 된 공원에서의 액션으로 펼쳐지는데, 동화 속 세계를 동경하지만 그 꿈을 이룰 수가 없는 한나의 상황과 잘 매치가 되었습니다. 

한나와 마리사의 마지막 대결 장소는 숲 속의 모노레일 터널인데, 마치 거대한 괴물의 입 속과도 같은 터널에서 한나의 살인본능이 깨어나는 장면은 섬뜩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로케이션 장소를 완벽하게 잡았는지 조 라이트 감독의 능력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한나]는 기본적인 설정만 놓고 본다면 [니키타]를 비롯한 여타 다른 여전사 액션 영화와 차별점을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조 라이트 감독의 완벽한 연출력과 시얼샤 로넌의 연기는 이 영화를 특별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얀 백지 위에 제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액션 영화를 그려 넣은 것입니다.

 

 

시얼샤 로넌의 백지에는 이미 많은 그림들이 그려지고 있다.

조만간 우리는 백지 상태의 배우 시얼샤 로넌이 아닌

완벽한 그림이 그려진 진정한 배우 시얼샤 로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명화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그녀가 그려낼 연기의 그림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