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준익
주연 : 박중훈, 정진영, 이문식
개봉 : 2003년 10월 17일
관람 : 2003년 10월 20일
드디어... 드디어... 구피와 함께 극장에 갔습니다. 8월 15일에 본 [젠틀맨리그] 이후 2개월만에 구피와의 극장 나들이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솔직히 그날의 극장 나들이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일요일엔 장모님께 웅이를 떠맡겨 버리고, 월요일엔 요즘 한창 바쁜 회사에 눈치를 보며 월차를 써버리며, 그렇게 어렵게 잡은 오랜만의 연휴에 구피와 전 맘껏 자유를 만끽했답니다. 일요일 저녁엔 부천 루미나리에 축제에 가서 환상적인 불빛과 금난새 아저씨의 지휘로 이루어진 유러시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환상적인 클래식과 김현철의 감미로운 음악속에 열광했답니다. 하지만 오랜만의 과도한 자유를 만끽했기 때문인지, 가을의 바람이 의외로 너무 차가웠기 때문인지, 구피는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었고 그로인하여 월요일에 극장에서 [황산벌]과 [스캔들]을 보기로 했던 야심찬 계획은 위태로워졌습니다. 결국 우린 타협에 타협을 거둡한 결과 [스캔들]은 포기하고 [황산벌]만 보기로 결정했으며 그렇게 위태롭게 제 소원은 이루어진 겁니다.
극장에서 피곤에 못이겨 꾸벅꾸벅 조는 구피를 옆에두고 오랜만의 극장 나들이의 기쁨을 만끽한 철없는 남편 쭈니... 그렇게 어렵게 본 [황산벌]은 그러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답니다. [스캔들]을 넘어선 개봉 첫주 흥행 성적에서 말해주듯이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은 폭발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입니다. 그런 폭발적인 기대가 어쩌면 오히려 실망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기대를 채우는 것은 불가능해 질테니까요.
1. 역사 재해석.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인 진실이 어떠했던 살아남은 승자가 역사를 기록하기에 어쩔수없이 역사는 승자를 위주로 기록될 수 밖에 없으며, 패자는 억울하지만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속에서 악역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황산벌]은 바로 이러한 점을 포착했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삼국 통일 시기를 주목하여 승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기록된 역사가 과연 진실인지에 대해서 진지하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재해석에 들어갑니다. 과연 신라의 김춘추는 삼국을 통일한 위대한 왕이며 백제의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거느린 희대의 난봉꾼이었을까? 삼국을 통일한 위대한 신라 장군 김유신과 그에 맞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비극의 백제 장군 계백은 역사의 기록처럼 비장한 전투를 벌였을까?
일단 이 영화의 이러한 역사 재해석은 우리 영화의 장르의 다양화 측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옵니다. 반만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속된 우리의 역사는 그 긴시간만큼이나 영화적인 역사적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최근 사극이 TV 드라마 시청률을 장악하듯이 그러한 역사적인 소재는 충분히 관객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화속에서의 사극은 [변강쇠]로 대표되는 토속 에로 영화나 국제 영화제용 예술 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년사이에는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우리보다 역사가 휠씬 짧은 서양에서 역사극이 흥행에 성공하는 사례를 보며 전 왜 우리 영화는 긴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영화화는 시도조차도 되지 않는 것일까? 의아했었습니다. TV 드라마로는 성공하는 역사극이 왜 영화에서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그럴까요? 제 생각엔 그것은 아마도 우리 관객들은 역사극을 긴 호흡속에서 보는 것을 즐기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사가 길다보니 그러한 역사를 짧막한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에 압축하는데에 우리는 서툴렀던 겁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스캔들]과 [황산벌]의 흥행 성공은 대단한 의미를 가집니다.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역사적인 배경만을 가지고도 영화적인 재미를 획득한 [스캔들]과 역사적인 사실을 코미디라는 주류 장르로 재해석한 [황산벌]은 비록 정통 역사극은 아니지만 우리의 역사극도 충분히 영화적인 재미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황산벌]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영화이며 이 영화의 역사적인 재해석과 그로인한 역사 코미디는 앞으로 많은 역사극에서 차용할만한 새로운 영화 장르인 셈입니다.
2. 사투리를 통한 웃음.
그러나 [황산벌]의 역사 재해석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사실적인 사건이기에 약간의 재해석은 할 수 있어도 완전히 뒤집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황산벌에서의 계백(박중훈)과 김유신(정진영)의 비극적인 전투를 모티브로 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전투는 계백의 장렬한 죽음과 백제의 멸망으로 끝이 난다는 뻔한 스토리를 지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이렇게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스토리 라인만으로는 [황산벌]은 색다른 영화적 재미를 획득할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전혀 뜻밖의 아이디어로 새로운 영화적인 재미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투리입니다. [친구]에서부터 시작된 영화속 사투리 열풍은 [선생 김봉두]를 거쳐 [똥개]와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에 이르기까지 그 열풍을 이어갔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신라와 백제의 본거지가 경상도와 전라도인 점을 포착하여 김유신과 계백에게 근엄한 대사보다는 사투리에 의한 우스꽝스러운 대사를 안겨준 겁니다.
일단 영화 초반의 이러한 사투리를 통한 웃음은 상당히 막강한 웃음 파워를 자랑합니다. 백제군의 그 비밀 투성이인 '거시기'와 김유신의 그 능글맞은 경상도 말투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했던 계백 장군과 김유신 장군의 그 근엄한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으며 [황산벌]은 그러한 사투리로 인하여 역사 재해석과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한 흥행 코드를 자연스럽게 완성한 겁니다.
사투리... 이 간단한 영화적인 유행 코드로 이 영화가 이루어 놓은 것은 어마어마합니다. 별다른 영화적 장치나 스토리 라인의 무리한 변경없이도 간단하게 역사 재해석과 역사 코미디라는 장르를 개척했으니... 어쩌면 이준익 감독은 사투리 영화의 시초인 [친구]와 곽경택 감독에게 많은 것을 빚을 진 겁니다.
3. 황산벌의 비극은 어찌하오리까?
사투리를 통한 효과적인 역사 재해석과 코미디는 그러나 황산벌의 비극앞에선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합니다.
황산벌 전투... 솔직히 말하자면 황산벌 전투는 우리 역사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는 사건입니다. 황산벌 전투로 인하여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백제는 멸망해야 했으며, 고구려의 연쇄적인 멸망을 가져옴으로써 우리 민족의 영토는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당나라에게 빼앗기고 한반도라는 비좁은 영토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제한된 발전을 해야 했습니다. 처자식을 손수 죽이고 전쟁터에 나와 자신도 황산벌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계백 장군과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기위해 어린 나이에 희생된 화랑 관창의 이야기는 황산벌 전투의 비극을 잘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엄청난 비극인 황산벌 전투를 하필 역사 코미디의 소재로 삼은 겁니다.
[황산벌]은 초반 사투리의 힘으로 인하여 역사 코미디의 장르를 충실히 따르는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투리만으로는 2시간이라는 영화의 러닝 타임을 채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결국 사투리의 약발이 떨어질때쯤 이 영화는 소재가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비극으로 점차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코미디 배우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진지한 연기를 펼치는 박중훈의 연기가 의미하듯이 결국 신라의 총공격이 시작되는 후반부에는 그동안의 코미디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비극적인 역사극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물론 [색즉시공]같은 비극적인 코미디도 충분히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역사 코미디라고해서 비극적인 코미디가 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투리와 역사 재해석을 통하여 이루어진 초반의 코미디는 쉽게 비극으로 전환이 되지 않으며, 그와 반대로 이 영화의 소재가 가지고 있었던 비극적인 요소는 사투리의 약발이 떨어짐과 동시에 너무나도 강력하게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준익 감독은 이왕 역사 코미디를 만들려면 다른 희극적인 요소가 담긴 소재를 찾았어야 했으며, 황산벌 전투를 영화로 만들 생각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진지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4. 새로운 역사극은 계속 되어야 한다.
[황산벌]은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채워주지는 못한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충분히 새롭고, 영화 초반의 웃음은 신선했으며, 영화 후반의 진지함은 감동스러웠으나 제 기대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분명 전 이 영화에게 새로움을 원했지만 코미디와 비극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영화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코미디를 하려면 확실하게 영화가 끝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웃겼어야 했으며, 역사적인 비극을 그리고 싶었다면 좀더 진지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되짚었어야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들은(저 역시도) 이 영화에게 역사적인 비극보다는 확실한 코미디 영화를 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의 무게에 짓눌린 이 영화는 마지막엔 코미디를 벗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 부분이 안타깝네요.
하지만 저는 [황산벌]을 통해 우리 역사극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겐 이제 역사극을 새롭게 조명할 창의적인 작가들이 있으며, 관객들을 불러들일 파워를 지닌 스타급 배우들이 있습니다. [스캔들]과 [황산벌]은 바로 그러한 희망을 보여줍니다. 비록 [황산벌]이 기대와는 달리 코미디적인 측면을 후반에 가서 급속도로 잃어버리는 아쉬움을 보여줬지만 아직 우리의 기나긴 역사는 무수히 많은 영화 소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코미디이건, 드라마이건, 비극이건,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선택입니다. 관객들은 분명 역사극을 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단지 하나의 장르를 선택하여 진득하게 밀어부칠만한 뚝심이 이제 필요할 따름입니다. 코미디 장르가 뜬다고해서 쉽게 코미디로 기울여서도 안될 것이며, 역사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억눌려 갑작스럽게 감동으로 치달아도 안될 것입니다. 어느 선에선가 이 두가지의 요소를 잘 조합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황산벌]에게 영화적인 점수를 주라면 70점에 불과할테지만, 이 영화가 가져온 역사극에 대한 희망을 점수를 주라면 95점을 주고 싶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역사극이 계속되길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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