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미카엘 하프스트롬
주연 : 존 쿠삭, 공리, 주윤발, 와타나베 켄
개봉 : 2011년 1월 27일
관람 : 2011년 2월 6일
등급 : 15세 이상
설 연휴, 극장에서 본 유일한 영화
5일 간의 기나긴 설 연휴가 시작하며 저는 극장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술과 함께 시작해서 술과 함께 끝난 연휴였기에 제겐 극장으로 달려갈 시간적, 체력적인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술과 함께 공허한 연휴를 보내던 지난 토요일, 저는 잠자리에 들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20대 이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말았습니다. 원인은 한가지, 밤 늦게까지 술 마시고, TV보고, 그 다음날은 오전 내내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며 잤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5일 간의 설 연휴 동안 제 생활 리듬은 완전히 깨져 버린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서 설 특선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를 충혈된 눈으로 봐야했던 저는 이대로 연휴가 끝나면 연휴 후유증으로 월요일엔 업무에 지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새벽까지 TV 영화를 보느라 잠이 부족한 몸을 이끌고 일요일 아침엔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늦잠을 자지 않아야 일요일 저녁엔 푹 잘 것이고, 월요일엔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을테니까요.
제가 굳이 다른 영화들을 제껴두고 [상하이]를 선택한 이유는 그 날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더 이상은 극장에서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꾸준한 흥행세를 유지하고 있는 [글로브], 한국 영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의외로 흥행 강세를 보이고 있는 [걸리버 여행기]와는 달리 [상하이]는 이미 목동 CGV에서는 (상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교차 상영에 들어간 상태였고, 목동 메가박스는 (좌석은 편하지만) 스크린이 작은 ZAM관에서 상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때 홍콩 느와르의 불멸의 스타로 불리었던 주윤발이 조연을 맡은 이 글로벌 프로젝트가 왜 이토록 국내 극장주들에겐 외면을 받는 것인지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주연 배우들이 내한을 하며 공을 들였고, 상하이라는 도시를 무대로 펼쳐지는 2차 세계 대전의 첩보전이라는 스토리 라인도 흥미로워 보이는데 말입니다.
1941년 상하이에서 펼쳐지는 일본, 미국의 첩보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 꽤 만족하며 영화를 봤습니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에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제외하고는 만족스러운 첩보, 멜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첩보 장르로 보자면 이 영화는 정교하게 미국의 첩보원 폴 솜즈(존 쿠삭)가 자신의 친구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을 그려냈습니다.
[상하이]의 첩보전을 재미있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배경부터 이해를 해야 합니다. 독일이 유럽 전역을 공격하고, 일본은 아시아를 점령할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던 그 시절, 미국은 이 모든 사태의 관망자였습니다. 이 거대한 전쟁에 섣부르게 뛰어들수 없었던 미국은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습니다.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을 넘어야지만 아시아 점령이라는 야심을 완성할 수 있었고, 결국 비밀리에 진주만 폭격을 진행시켜나갑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폴 솜즈는 일본의 음모가 진행되던 상하이에 도착한 것입니다.
동료 스파이인 커너의 죽음 뒤에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폴은 차근 차근 그 비밀을 벗겨냅니다. 하지만 상부에선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일본을 자극해 전쟁에 발을 들여놓는 꼴이 될 터이니 말입니다.
미국은 몰랐던 것입니다. 감히 아시아의 작은 섬 나라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줄은... 그저 일본이 아시아에서 너무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만 하면 될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하이]의 초, 중반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폴이 상부의 지원 없이 혼자 친구의 죽음과 그에 맞물려 있는 일본의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려냈습니다. 그렇게 사건을 파헤치며 상하이의 삼합회 보스인 앤소니(주윤발)와 그의 아내 애나(공리) 그리고 일본 정보부 수장 다나카(와타나베 켄)와 친분을 쌓게 되고 , 그들의 꼬여 있는 관계와 친구의 죽음이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며 폴이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 정교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첩보 영화하면 흔히들 '007 제임스 본드'의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하이]는 비록 그런 화려한 액션은 없지만 사건의 정교한 진행 과정만으로도 잘 만든 첩보 영화의 지휘를 획득합니다.
거대한 전쟁 뒤에 숨은 사나이들의 사랑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상하이]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 대신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사랑에 집착을 하기 시작합니다.
죽은 커너와 묘령의 여인 스미코를 찾아 헤매는 다나카의 삼각관계, 독립투사였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일본에 맞서 싸우는 애나와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애나에 대한 사랑으로 그녀를 지켜주는 앤소니, 그리고 음모를 파헤치며 점점 애나에게 빠져드는 폴의 삼각관계까지...
이 영화의 후반부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거대한 전쟁 뒤의 음모와 미국, 일본이 펼치는 정교한 첩보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중에서도 사랑을 위해 자기의 몸을 바치는 사나이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결국 후반부에 앤소니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비장한 최후를 안겨주기도 합니다.(사실 저는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도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입니다. 너무 비장미만 내세운 꼴 사나운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정교한 첩보 드라마로 스토리 전개를 잘 이끌어 가던 [상하이]가 후반부에 갑자기 사나이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끝맺음을 하는 것은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영화의 사랑이 애틋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을 거머쥔 다나카와 앤소니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 없이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나카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것도 미국인 커너이고, 앤소니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것 역시 미국인 폴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 영화를 보다보면 등장 인물들이 모두 미국에 가기를 희망합니다. 유렵과 아시아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는 그 순간에 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았던 미국은 그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지상 낙원이었던 것입니다. [상하이]는 그러한 역사적 상황을 캐릭터들의 삼각관계로 풀어냅니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더이상 미국도 전쟁의 안전 지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어느 나라도 2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 대한 묘한 비유입니다. 그렇게 거대한 전쟁 속에 숨어 있었던 사나이들의 사랑은 전쟁과 맞물려 거대한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쟁이 아닌 사랑이 아니었을까?(스포 포함)
전쟁이라는 큰 틀에서 본다는 개인은 하나의 작은 나사에 불과합니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 희생시켜도 되는 작은 존재이죠. 하지만 작은 틀에서 보세요.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는 이 전쟁에 희생되어도 되는 작은 존재일까요?
며칠 전에 봤던 [평양성]도 그러한 질문을 관객에게 했습니다. 역사는 전쟁에 임했던 장군들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은 이름 없는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누가 이기던 상관없다고, 단지 전쟁 없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상하이]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획을 그었던 2차 세계대전. 하지만 그 속에서는 그 누가 이기던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다나카가 그러했고, 앤소니가 그러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애나를 위해 다나카에 총을 쏘던 앤소니로써는 상하이를 중국이 지배하건, 일본이 지배하건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애나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상하이를 벗어나려고 하는 폴과 애나를 놓아준 다나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애나를 향한 앤소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다나카는 그의 애절한 사랑에 동질감을 느끼고 그들을 잡지 못했습니다. 분명 애나는 부메랑이 되어 일본의 아시아 정복 야심에 방해 인물이 될터이지만 그는 그들이 상하이를 벗어나도록 눈 감아 줍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결과 독일과 일본은 패망했고, 눈치를 보며 뒤늦게 전쟁에 참여한 미국만이 유일한 승리자가 되어 최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다집니다. 그러나 그 속엔 이 허망한 전쟁에서 누가 이기던 상관 없었던 사나이들의 진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랑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만이 기억할 사랑이...
그렇기에 저는 [상하이]가 거대한 전쟁을 포기하고 작은 사랑에 집중한다고 해서 불만이 없었습니다. 세상이 기억하는 전쟁보다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도 그 시대의 소중한 기록이니까요.
모두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전쟁에 대해서 말한다.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들에겐
전쟁 보다는 자기 자신의 사랑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상하이]는 전쟁이라는 큰 틀이 아닌,
개인의 시선에서 작은 틀로 봐야할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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