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평양성] - 해피엔딩 만드느라 욕봤다.

쭈니-1 2011. 1. 30. 00:30

 

 

감독 : 이준익

주연 : 이문식, 정진영, 류승룡, 윤제문, 선우선

개봉 : 2011년 1월 27일

관람 : 2011년 1월 28일

등급 : 12세 이상

 

 

난 [황산벌]이 별로였다.

 

1월 27일... 기대작이 대거 개봉하는 이 날을 위해 제 시간이 허락하는 최대한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개봉 당일인 27일은 [조선명탐정 : 각시꽃투구의 비밀]을 봤고, 둘째날 역시 극장 앞에 섰습니다.

오늘도 야근한다는 구피를 위해 여전히 [그린 호넷]은 비워 뒀고, [상하이], [평양성], [걸리버 여행기] 중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마음은 자꾸 [상하이]로 기울고 있었는데, 정작 표를 끊은 것은 [평양성]이었습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무 생각없이 2시간 동안 웃고 즐길 수 있었던 [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비슷한 사극 코미디인 [평양성]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튼 그렇게 얼떨결에 선택한 [평양성]이 제게 [상하이]보다 낮은 기대도를 기록한 이유는 이 영화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황산벌]때문입니다. 백제의 멸망을 다룬 [황산벌]은 이준익 감독이 사극에 처음으로 그 능력을 발휘한 영화로 개봉 당시 흥행에도 꽤 성공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전 [황산벌]이 재미없었습니다. 백제의 계백장군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맞붙은 '황산벌 전투'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전투로 기록되어야 마땅한 전투입니다.

백제의 멸망을 막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임한 계백(박중훈)과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계백을 꼭 쓰러 뜨려야 했던 김유신(정진영). 이들의 전투는 수 많은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처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계백 장군의 이야기와 승운을 신라로 기울게 했던 화랑 관창의 희생 등...

하지만 막상 영화는 그들의 활약을 비웃기만 했습니다. 어쩌면 코미디 영화라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알고 있는 영웅들이 코미디의 틀 안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저는 [황산벌]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산벌]은 의미가 있는 영화임에 분명합니다. 정통 사극이 아닌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계백과 김유신의 전투 사이에 이름 없는 백제 병사인 거시기의 시선을 담아냈다는 점은 분명 평가 받아야 마땅합니다. [황산벌]이후 7년만에 제작된 [평양성]은 바로 그러한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이번엔 거시기가 주인공이다.

 

사실 [황산벌]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이는 계백 장군을 연기한 박중훈도, 김유신 장군을 연기한 정진영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감초 역할로 생각되었던 백제 병사 거시기를 연기한   이문식이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바로 그러한 점을 포착해냈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평양성]에서 아예 거시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그러한 선택은 [평양성]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일단 이 영화의 주제가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황산벌]에서도 지배계층의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민초의 삶을 비추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주가 아니었습니다. 애초부터 영화의 시선은 계백과 김유신의 비극적인 전투가 어떻게 코믹화 되었는지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고, 거시기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조연의 에피소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평양성]은 아닙니다. 거시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고구려의 남건(류승룡)과 한반도를 통째로 먹어 버리려는 당나라 군대, 그리고 신라의 김유신(정진영)의 전투는 오히려 거시기 이야기를 빛낼 보조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획기적으로 주인공이 된 거시기는 [평양성]의 이야기를 단순한 사극 코미디가 아닌 전쟁에 의한 민초들의 고통을 [황산벌]에 비해 좀 더 확장해 보여줍니다.

백제의 국민으로도 살아봤고, 신라의 국민으로도 살아봤다는 그는 우리처럼 힘 없는 백성들이 평화롭게 잘 살 수만 있다면 누가 왕이 되었건 상관이 없다고 역설합니다.

제가 전쟁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전쟁 영화는 관객의 애국심을 교묘하게 건드리며, 있지도 않은 전쟁 영웅의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내들어 관객들을 현혹시킨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평양성]은 그러한 전쟁 영화를 통쾌하게 비꼽니다. 억지로 징집되어 끌려온 거시기와는 달리 스스로 전쟁 영웅이 되어 출세하겠다는 문디(이광수)를 통해 전쟁 영웅의 허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거시기가 갑순(선우선)에게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던 상관하지 말고 우리끼리 그냥 잘 살자고 애원하는 모습을 통해 지배계층의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으로 이름없는 병사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는 주제를 [평양성]은 효과적으로 관객 앞에 펼쳐 놓는 것입니다.

 

 

코미디는 줄어들었고, 전쟁의 잔혹함은 늘어났다.

 

이렇게 [평양성]은 코믹 사극이라는 장르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해지며 영화의 진행도 [황산벌]과 다른 양상을 보이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코믹한 장면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황산벌]은 코미디 영화답게 당시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황산벌 전투를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평양성]은 [황산벌]에 비해 웃기는 장면이 확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쌀 공격, 벌떼 공격 등 우스꽝스러운 공격들로 인한 재미도 선사하긴 하지만 [황산벌]에 비한다면 그런 우스꽝스러운 장면들보다는 전통 사극을 연상시키는 대규모 전투씬에 더욱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러한 의도는 분명 전쟁의 잔혹함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코믹한 장면들을 내세워놓고 전쟁으로 인한 이름없는 민초들의 고통을 이야기한다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니 코믹한 장면을 줄여 놓고 잔혹함 전투씬을 그 빈 자리에 채워 놓은 것이죠.

 

그러한 면에서 [평양성]은 [황산벌]에 비한다면 분명 제게 좋은 점수를 받을 부분이 많은 영화입니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나약하고 비열한 모습, 황정민이 우정 출연해서 더욱 빛났던 신라 문무왕의 능글맞은 깍쟁이같은 모습 등 여전히 우리나라의 국왕을 우스꽝스럽게 비하하는 이준익 감독의 악취미는 여전했지만, 거시기의 주인공 등극은 이 모든 것을 상쇄시킬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한 나라의 존망을 건 비극적인 전쟁과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황산벌]과는 달리 [평양성]은 거시기가 중심을 잡아 줌으로써 비극과 코미디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조절해 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건과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그 시대의 영웅 대신 거시기를 정면으로 내세운 이준익 감독의 선택은 탁월했습니다.  

 

 

고구려는 망했지만 거시기는 행복했다. 

 

문제는 영화의 재미입니다. 분명 [평양성]은 [황산벌]에 비해 덜 웃깁니다. 그 덕분에 비극적인 전쟁의 묘미는 살렸지만 코미디 영화로써의 [평양성]은 지루해 졌습니다.

이문식의 연기도 마찬가지인데, 이문식의 코믹 연기는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등극하며 그 웃음을 많이 잃어버립니다. 특히 후반부, 갑순과의 결혼 이후에는 웃음보다는 갑순을 향한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런 이문식의 연기는 상당히 낯설기만 하더군요.

솔직히 저도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남건의 동생인 남산의 선택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문식의 눈물 연기도 자꾸 반복되니 감동스럽기 보다는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 이 영화에서 웃긴 것은 우정출연한 황정민과 능구렁이 김유신의 정진영이 연기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하지만 [평양성]은 [황산벌]에 비해 영화적 재미는 줄어들었지만 저는 [황산벌]보다 [평양성]이 더 좋습니다. 

결국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던 고구려는 멸망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해 우리나라의 국토가 한반도에 머물 수 박에 없었던 불행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거시기는 행복했습니다. 백제의 백성이었건, 신라의 백성이었건, 고구려의 백성이었건, 그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거대한 비극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으며 이준익 감독은 '백제의 멸망도, 고구려의 멸망도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민초들이 행복했는가? 이다.'라고 말합니다. [황산벌]때에는 그러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평양성]을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래, 역사는 비극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거시기가 행복하다면 이것도 해피엔딩이리라.

 

 

백제, 신라, 고구려, 당나라가 피튀기게 싸우던 말던...

거시기는 그 이후로 행복했다고 한다.

이러한 거시기의 해피엔딩은 사극의 대 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