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미셸 공드리
주연 : 세스 로겐, 주걸륜, 카메론 디아즈, 크리스토프 왈츠
개봉 : 2011년 1월 27일
관람 : 2011년 1월 30일
등급 : 15세 이상
수 많은 영화들 중 나의 최고 기대작은 [그린호넷]이다.
한동안 영화를 보지 못했던 저는 1월 27일을 기점으로 보고 싶은 기대작들이 대거 개봉하자 마구잡이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목요일 [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과 금요일 [평양성]을 연달아 봤고, 제 최고 기대작이었던 [그린 호넷]은 일요일에 보기 위해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린 호넷]을 보기 몇 시간전 배탈이 나버렸습니다. 점심 식사로 슈퍼슈프림 피자 두 조각을 먹고, 약간 모자라 밥 한 공기를 마저 비운 것이 탈이나 버린 것이었습니다.
아픈 배를 움켜잡고 끙끙 앓는 제게 구피는 '영화는 나중에 볼까?'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1월 27일에 개봉한 그 수 많은 기대작들 중에서 단연 최고의 기대작은 [그린 호넷]이었고, 아무리 많은 영화를 마구잡이로 본다고 해도 [그린 호넷]을 보지 않는다면 허전한 마음이 들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픈 배를 참아가며 기여코 [그린 호넷]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그린 호넷]을 그토록 기대한 이유는 슈퍼히어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배트맨]과 [대부]였기 때문인지 몰라도 저는 슈퍼히어로 영화와 갱스터 장르의 영화를 유난히 좋아합니다.
게다가 감독은 미셸 공드리입니다.(전 그가 여성 감독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성이네요.) 미셸 공드리 감독은 [이터널 선샤인]으로 제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감독입니다.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 [엑스맨], [수퍼맨 리턴즈]의 브라이언 싱어, [다크 나이트]의 크리스토퍼 놀란, [헐크]의 이 안 감독 등 각각의 강한 개성을 가진 감독들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메가폰을 잡고 있는 현 상황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제겐 상당히 기쁜 소식입니다. 이제 미셸 공드리 감독까지 그 대열에 합류한 셈입니다.
그저 오락 영화를 만들기 위해 슈퍼히어로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개성과 주제를 나타내기 위해 슈퍼히어로 영화를 선택하는 것이니만큼 그들이 연출한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단순한 오락적 요소 외에도 볼거리가 풍부합니다. [그린 호넷]이 바로 그러합니다.
얘네들 정말 슈퍼히어로 맞아?
그렇다면 미셸 공드리 감독의 슈퍼히어로 영화는 어떨까요? 예상했던대로 기존의 슈퍼히어로 영화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요즘 슈퍼히어로 영화의 대세는 고뇌하는 영웅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슈퍼히어로들도 완벽함보다는 하나씩 약점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약점으로 인하여 고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그린 호넷]의 브릿(세스 로겐)과 케이토(주걸륜)는 그러한 고뇌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머니 없이 엄격한 아버지 곁에서 자란 브릿의 정신적 미숙이 보이긴 하지만 브릿은 그런 것 따위에 아파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뇌따위는 집어던진 브릿과 케이토는 알량한 영웅심리와 아버지에 대한(혹은 사장님에 대한) 반항심으로 영웅 짓거리를 시작합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 쟤네들이 슈퍼히어로가 맞긴 한걸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라옵니다. 정의감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영웅이 된 브릿과 케이토는 분명 기존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다른 영웅들이었습니다.
영웅 짓거리를 하는 것도 다른 슈퍼히어로와 다릅니다. 가끔 히어로와 안티히어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슈퍼히어로는 존재했지만 브릿과 케이토처럼 아예 대놓고 안티 히어로임을 내세우는 녀석들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신의 소유가 된 신문사를 통해 '그린 호넷'을 최고의 악당으로 이슈화시킨 이들은 그렇게 스스로 악당이 되어 도시를 장악한 기존의 악당 처드노프스키(크리스토프 왈츠)와 정면 대결을 벌입니다.
지금까지의 슈퍼히어로의 문제점은 자기네들이 착한 편이라고 대놓고 떠드는 것이라며 역설하는 브릿은 그로인해 악당들이 시민을 인질로 삼고, 슈퍼히어로들은 그 약점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엉뚱한 브릿의 말은 국내에 개봉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모두 챙겨보는 제게는 은근히 설득력있게 들립니다. 사실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보며 가장 답답했던 것이 시민들을 인질로 잡은 악당 때문에 고생하는 슈퍼히어로의 모습이거든요. 스스로 악당임을 선언한 '그린 호넷'에겐 최소한 그런 약점 따위는 없는 셈이죠.
정말 그들은 조수로, 연인으로 만족했을까?
슈퍼히어로의 인간적 고뇌따위는 처음부터 집어 치워 버렸고, 얄랑한 영웅심리로 시작한 브릿과 케이토의 영웅 놀이. 게다가 브릿은 스스로 '그린 호넷'을 악당으로 포장하는 영특함마저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브릿의 조력자인 케이토가 이번엔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린 호넷'의 활약을 위해 슈퍼카 블랙 뷰티를 만들어 내고, '그린 호넷'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길거리에서 배운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악당을 처부셨던 케이토. 하지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그린 호넷'에게 쏟아집니다. 이러한 부당한 처사 속에서 케이토는 적극적으로 항변합니다.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보면 그들을 묵묵하게 도와주는 조력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배트맨'인데, 백만장자 슈퍼히어로답게 그는 조수인 로빈과 집사인 알프레드, 그리고 무기를 제조해주는 루스우스 폭스 등을 조력자로 둡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조력자로 만족했을까요? 초딩적 영웅심리로 시작한 브릿과 케이토의 영웅놀이이기에 케이토의 항변이 더욱 와닿았습니다.
카메론 디아즈의 캐스팅으로 더욱 기대를 모았던 르노어라는 캐릭터 역시 특출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긴 처음부터 카메론 디아즈를 캐스팅했다고 했을 때부터 르노어가 보통의 슈퍼히어로의 여자로 머물지 않을 것임은 짐작했습니다.
카메론 디아즈라면 [미녀 삼총사]로 여성 히어로의 대표적 아이콘이며, 톰 크루즈가 초인적인 스파이로 출연했던 [나잇 & 데이]에서조차 마지막 반전을 통해 톰 크루즈를 뛰어 넘는 초인적 스파이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카메론 디아즈가 연기를 해서인지 르노어는 슈퍼히어로의 여자라는 타이틀을 거부하고 오히려 어른이 덜 된 브릿을 위해 슈퍼히어로의 브레인 역할을 해냅니다. 물론 처음엔 그 모든 것이 그녀가 알고 한 것은 아닐지라도 만약 르노어가 없었다면 '그린 호넷'의 활약도 없을 것입니다.
키스를 하려는 브릿에게 시원하게 한방 먹이는 르노어의 모습을 보며 '난 영웅의 여자 따위로 만족하지 않아!'라고 외치는 르노어의 자주적인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그 중 제일은 악당이더라.
하지만 덜 자란 초딩적 영웅 브릿과 조수임을 거부하는 케이토, 영웅의 여자 따위는 한방에 날려버리는 르노어보다 더욱 놀라운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이 영화의 악당인 처드노프스키입니다.
영화의 초반 신흥 세력을 제압하는(신흥 세력의 간지 보스는 [스파이더맨]의 제임스 프랑코가 우정 출연했다고 합니다.) 처드노프스키의 장면부터가 압권이었는데, '당신이 하나도 안 무섭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바뀌며 카리스마를 제대로 풍겨주십니다. 어쩔땐 사람 좋은 할아버지로 보였다가도 갑자기 잔인한 악흑가 보스로 변신하는 처드노프스키의 모습은 초딩 수준의 정신 연령을 가진 영웅, '그린 호넷'의 적수로 더 없이 완벽했습니다.
특히 그가 간지 악당으로 변신하기 위해 블러드노프스키로 개명하고, 적을 죽일 때 하는 마지막 대사를 연습하는 장면에선 정말 '빵'하고 터졌습니다. 그러한 장면은 기존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악당들이 자주 하는 실수를 우스깡스럽게 패러디한 것인데, 저는 영화를 보며 항상 악당들은 왜 '슈퍼히어로를 바로 죽이지 않고 쓸데없는 수다로 시간을 끌다가 뒷통수를 맞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러한 어이없는 궁금증에 처드노프스키는 유쾌하게 대답을 해줍니다. 악당도 슈퍼히어로처럼 멋있게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린 호넷]의 최고 재미는 이러한 캐릭터입니다. 영웅은 악당 행세를 하고, 조수는 내가 왜 주인공이 되면 안되냐고 항변합니다. 여자는 영웅의 여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악당은 영웅보다 멋있게 보이기 위해 한껏 폼을 잡다가 뒷통수맞습니다.
기존의 슈퍼히어로 영화와 전혀 다르면서 기존의 슈퍼히어로 영화를 교묘하게 패러디하기도 하는 이 영화는 유쾌하고, 귀여우며,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나날이 어두워지고 무거워지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추세 속에서 한 없이 가볍고 밝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린 호넷]만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그러한 톡톡 튀는 캐릭터에 의한 영화적 재미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성 강한 감독들의 슈퍼히어로 영화 연출은 할리우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슈퍼히어로 영화의 끝없는 진화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를 보며 슈퍼히어로 영화가 진화할 때까지 해냈다라고 생각했는데, 미셸 공드리 감독의 [그린 호넷]을 보니 또 다른 방향으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슈퍼히어로 영화가 각양각색으로 진화할지 기대해봐야 겠습니다.
[다크 나이트]와 정반대의 지점에 서있지만
[다크 나이트]와 함께 슈퍼 히어로의 진화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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