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권철인
주연 : 장진영, 엄정화, 이범수 김주혁
개봉 : 2003년 7월 11일
즐거운 토요일... 언제부터인지 토요일은 저희 부부에게 영화보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워낙 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회사일에 지치고 지친 일주일간의 피로를 영화보는 것으로 풀었고, 제 아내 역시 풍성한 블럭버스터가 난무하는 썸머 시즌의 영화들을 보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임신한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답답하고 꽉막힌 어두컴컴한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아닌, 맑고 탁트인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눈치없는 저는 그것도 모른채 주말엔 언제나 영화보러 극장에가려 애썼고, 마음씨 착한 나의 아내는 시외로 나가 자연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숨긴채 철없는 나의 응석을 받아 극장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에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토요일이 다가오자 저는 11일에 개봉되는 4편의 영화를 놓고 저울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주엔 무슨 영화를 볼까?' 저는 결국 상큼한 로맨틱 코미디인 [싱글즈]를 보기로 결심했고 아내에게 이번주엔 [싱글즈]를 본다고 막무가내로 통보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저와는 다른 토요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사촌 언니와 조카들과 함께 서울랜드에 갈 약속을 이미 잡은 상태였던 겁니다. 제게 태연하게 '이번주 토요일엔 너에게 자유를 주겠어'라고 말하는 아내... 하지만 아내가 없는 하루는 제겐 자유가 아닌 지옥인 것을...
저는 영화를 포기해서라도 아내를 쫓아 서울랜드에 가겠다고 선언을 하고 영화를 못 보게 된 것에 대한 심통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금요일에 영화보라가자는 아내의 승낙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작장에 다녀 피곤에 지친 그녀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저는 영화를 보면서도 힘이 들어서 제대로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내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열심히 장진영과 엄정화의 섹시함에 웃고 즐기며 그렇게 [싱글즈]를 보았습니다.
'경희야!!! 미안해!!! 영화를 보고나서 너에게 눈길을 돌려 피곤함으로 지친 너의 그 표정을 보았을때서야 난 깨달았어. 나의 이기심이 널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나에게 영화가 아무리 소중하다고 하더라도 너와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 너도 알고 있지??? 널 위해서라면 그따위 영화 평생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너도 알고 있지??? 우리 다음주말엔 멋진 곳에 가서 자연과 함께 보내자. 응??? 약속!!!'
[싱글즈]를 보기전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인상은 새콤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였습니다. [오버 더 레인보우]에 출연하여 강한 인상을 제게 남겼던 장진영의 이미지가 그러했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대담한 담론을 보여줬지만 아직은 섹시한 댄스 가수가 어울리는 엄정화의 이미지가 그러했습니다. 김주혁의 그 깔끔한 외모가 그러했고, 코믹 연기의 대가 이범수의 출연이 그러했습니다. 예고편만 보더라도 이 영화는 섹시한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이 굳이 감추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싱글즈]에 대한 로맨틱 코미디의 이미지는 영화의 상당 부분동안 계속 이어집니다. 29살 동갑내기 나난(장진영)과 동미(엄정화)의 일상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영화로 보였습니다. 느끼한 모닝콜에 맞춰 일어나 속옷 바람으로 푼수끼가 철철 넘치는 춤을 추는 나난의 첫등장과 동거남이자 오랜 친구인 정준(이범수)과 화장실에서 만나 티격태격 싸움질을 하는 동미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완벽해보이는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을 하는 이 영화는 주인공인 나난과 동미에게 서른을 앞둔 커리어우먼이 당할 수 있는 억울함을 무더기로 안겨주면서도 결코 무겁지않게 로맨틱 코미디다운 경쾌함과 섹시함으로 영화를 이끌어 나갑니다.
나난은 애인에게 채이고 직장 상사의 음모에 걸려들어 외식 사업부 매니저로 좌천당합니다. 동미는 자신이 그토록 매달리던 프로젝트를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직장 상사에게 갈취당하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려는 상사의 옷을 벗겨버림으로써 스스로 회사에서 쫓겨납니다. 나난과 동미의 이러한 시련을 조금은 심각하게 그릴수도 있으련만 이 영화는 이 모든것을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에 맞게 밝고 명랑하게 그려나갑니다.
나난은 시련을 당하고 외식 사업부로 좌천을 당함으로써 수헌(김주혁)이라는 멋진 남자를 만나게 되고 동미는 오랜 친구인줄만 알았던 정준과 뜻하지 않은 일(?)을 치뤄버리는 바람에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할 계기를 마련합니다. 이제 이 영화는 나난과 동미의 사랑을 이루어 주며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만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싱글즈]는 바로 마지막 순간 이러한 로맨틱 코미디의 모든 공식을 뒤집어 버림으로써 한참을 행복감에 젖어 있던 관객들의 뒤통수를 내리칩니다.
어쩌면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이 영화의 초반부터 계속 이어졌는도 모릅니다. [싱글즈]는 로맨틱 코미디에대한 자기 패러디를 시도함으로써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난 이따위 로맨틱 코미디가 아냐'라고 은근슬쩍 관객에게 선언했던 겁니다.
예를 들어 나난이 시련을 당하고 거리를 걸으며 '이럴때 영화에선 항상 비가 내리지'라고 중얼거리면 진짜로 하늘에서 억수같은 비가 내리고, 나난과 수헌이 공항에서 헤어지는 장면에서 나난이 '이럴때 영화에선 카메라를 빙글빙글 돌리지?'라고 말하면 진짜로 카메라가 나난과 수헌의 주의를 빙글빙글 돕니다.
영화의 대사들도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는 것을 은근슬쩍 내비칩니다. '20대 여자가 목돈을 마련하는 길은 결혼뿐이야'라는 나난의 대사는 로맨틱 코미디가 세상의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존귀하게 받들어야 할 사랑을 돈이라는 휴지 조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위한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한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 영화의 의도는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나난은 미국에서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수헌의 달콤한 사랑을 결국 뿌리치고, 동미는 정준과의 사랑이라는 달콤함 대신 미혼모라는 아픔을 선택함으로써 달콤한 사랑 대신 맨몸으로 세상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나난은 계속 디자이너라는 자신의 꿈을 접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손님들과 힘겨운 실랑이를 벌이는 매니저로 한동안 살아야 할것이며, 동미는 그 당당한 커리어우먼이라는 명함대신 미혼모라는 이름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달콤함을 마지막 순간에 포기함으로써 나난과 동미에게 지금까지 당했던 시련보다 더할지도 모를 시련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웃습니다. 희망에 찬 표정의 나난과 동미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는 그렇기에 진솔합니다. 멋진 남자와 멋진 여자를 등장시켜 온갖 갈등과 오해속에서 결국 진실한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낙관적이며 비현실적인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는 달리 시종일관 로맨틱 코미디의 유쾌함을 유지하면서도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에게 불어닥친 시련을 해결해 나가려는 두 여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꽤 현실적인 서른 즈음의 모습을 반영한 이 영화는 결국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를 갖추었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서른 즈음의 제 모습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29살... 그때... 막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던 10년전의 제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제 모습을 보게 되었을때의 그 상실감... 서른이라는 이제 곧 제게 닥칠 세월의 무게에 짓눌르던 그 부담감... 서른이 넘어 일과 사랑중에서 사랑을 이룬 제게 서른 즈음의 그때의 방황을 뒤돌아보게 만든 이 영화는 그렇기에 제겐 굉장한 영화였습니다.
P.S. 이 영화의 감독인 권철인 감독의 데뷰작이 [사랑하기 좋은 날]이더군요. [사랑하기 좋은 날]은 최민수와 지수원이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로써 흥행에 실패해서 알고 계신 분이 별로 없을테지만 전 무척이나 인상깊게 본 영화였습니다. 한동안 제 핸드폰에 '사랑하기 좋은 날'이라는 문구를 새기고 다니기도 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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