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3년 영화이야기

[살인의 추억] - 나도 그를 미치도록 잡고 싶다.

쭈니-1 2009. 12. 8. 16:13

 



감독 : 봉준호
주연 :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개봉 : 2003년 4월 25일

몇년전, 후배와 함께 무슨 일 때문에 은행에 들렸다가 그 곳에서 아주 오래된 잡지책하나를 읽게되었습니다. 그 잡지책에는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는데 그 기사를 처음 읽은 저는 과연 이런 끔찍한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연쇄강간살인사건, 헐리우드의 스릴러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사건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평화로워 보이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버젓이 벌어진 겁니다.
그 당시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막연히 영화 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저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저의 두번째 영화로 제멋대로 정했었습니다. (첫번째 영화는 십대 소년과 소녀가 주인공인 최루성 멜로였으며, 세번째 영화는 OB 베어스의 투수였던 박철순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 저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헐리우드의 스릴러 영화를 뛰어넘는 멋진 스릴러 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고 단지 모티브만 '화성연쇄살인사건'에서 가져오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숨막히는 생존게임과 형사와 범인간의 논리정연한 추리게임을 멋지게 펼쳐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이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잊어버린 지금 저는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통해 어린 시절 영화 감독을 꿈꾸었던 그 시절을 추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의 아이디어를 훔친(?) 봉준호 감독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으며, 과연 봉준호 감독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그려나갔는지 미칠 정도로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인의 추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먼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영화로 만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단지 지능적 스릴러 영화의 소재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그려낸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지능적인 스릴러 영화를 뛰어넘어 암울했던 그 시절의 회상과 무기력했던 우리들의 초상을 함께 잡아냄으로써 스릴러 영화라는 장르에선 거의 불가능했던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실적인 스릴러 영화로 완성을 했습니다. '과연 영화 감독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정도로 저는 봉준호 감독의 그 뛰어난 통찰력에 할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살인의 추억]엔 두명의 형사가 등장합니다. 시골 형사인 박두만(송강호)과 서울 형사인 서태윤(김상경)... 이 두사람은 서로 다른 수사 스타일로 인하여 처음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벌입니다. 육감적인 수사를 중시하는 박두만은 증거와 과학적인 사실은 무시하고 용의자를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려하고, 서태윤은 증거와 범행 상황을 토대로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수사를 진행 시킵니다. 처음 영화가 시작하고 곧바로 이어지는 이런 캐릭터 구조는 송강호의 코믹 연기와 함께 이 영화를 영락없이 [투캅스]로 보이게끔 만들며, 박두만과 서태윤의 대립 구조는 또다른 헐리우드식 버디 무비의 도용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바뀝니다. 송강호의 연기에서 비롯된 웃음은 점차 경악으로 바뀌고, 한없는 가벼움은 관객의 가슴을 조용히 내리치는 묵직한 무거움으로 바뀝니다. 송강호의 투박한 코믹 연기는 어느순간 무기력한 한 남자의 절규로 바뀌고, 박두만과 서태윤의 팽팽히 맞선 캐릭터 구조는 어느순간 범인과 형사간의 팽팽한 심리전으로 바뀝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입니다. 연쇄강간살인사건이라는 영화의 소재... 그것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했기에 [살인의 추억]은 자칫하면 너무 진지한 무거움으로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경우 이 영화는 조금더 진지한 스릴러 영화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관객에게 열혈한 사랑을 받을 영화는 되지 못했을 겁니다.(저는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하지 못한 영화는 평론가의 평이 어떠할지라도 실패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관객을 위한 대중 예술이니까요.) 그렇다고해서 송강호의 코믹 연기에 기대어 [투캅스]의 조금 진지한 버전으로 영화를 만들어 버린다면 이 영화는 [투캅스]와 비등한 흥행 성적을 올릴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결코 뛰어난 스릴러 영화는 될 수 없었을 겁니다.(지금 우리 영화계에 필요한 것은 그 흔해빠진 코미디가 아닌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 혹은 만들지 못한 그 수많은 장르의 영화들입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적절한 배합... 쉬워보이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그것을 이제 겨우 두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한 신출내기 감독이 해낸 겁니다. 송강호의 코믹 연기에 한참을 웃고있다가 어느순간 나도 모르게 한발자욱 다가선 위험앞에서 오싹함을 느끼는 반복된 영화 관람의 시간동안 저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그 한가운데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으며, 박두만, 서태윤 형사와 함께 동거동락하며 웃고 농담하다가 섬찟한 살인사건 앞에 그들과 함께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강약의 조절을 통해서 관객을 영화속에 뛰어들게끔 만드는 그 뛰어난 흡입력... 과연 언제쯤 다시 영화속 캐릭터들과 함께 웃고 즐기며, 그리고 분노하며 범인을 잡으러 뛰어다닐 수 있을런지 알 수 없기에 [살인의 추억]에서의 경험은 제게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살인의 추억]의 그 놀라운 관객 흡입력에는 봉준호 감독이라는 걸출한 감독도 있었지만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이라는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도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특히 송강호는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관객들을 효과적으로 영화속으로 끌어들입니다. 박두만이라는 무식하지만 소박한 시골 형사의 이미지를 과연 송강호처럼 완벽하게 연기해낼 배우가 몇이나 될까요? 송강호의 연기는 한참을 웃고 즐기다가 어느순간 박두만이 살인범에게 느꼈을 그 무기력함에 한없이 빠져들게끔 만듭니다. 증거를 통한 범인 검거보다는 막무가내로 용의자를 고문하여 억지 자백을 받아내는 박두만의 모습에서 그가 밉지 않았던 것은 범인을 잡고 싶은 그의 열망이 느껴졌기 때문이며 80년대 후반 수사의 낙후성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고문을 통한 억지 자백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송강호는 그러한 박두만의 모습을 단 한치의 미화도 없이 그려냅니다.  
송강호가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함으로써 관객들을 효과적으로 영화속에 흡입시켰다면 서태윤을 연기한 김상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연기를 통해 영화의 스릴러적인 요소를 부각시켰습니다. 박두만의 그 우스꽝스러운 수사와는 달리 과학적이며 이성적인 수사를 펼치는 서태윤 형사는 자칫 코미디로 흐를 이 영화를 잡아주며 박두만과 함께 영화의 강약을 조절합니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미 배우로써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줬던 김상경은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의 연기에 전혀 주눅들지 않은 당당한 연기로 이 영화를 완벽하게 받쳐냅니다. 특히 이성적인 자세를 보이며 묵묵하게 범인의 실체에 접근하던 그가 사건이 진행 될수록 점차 이성을 잃고 급기야 자신이 그토록 믿고 있던 증거가 물거품이 되자 박현규(박해일)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스릴러 영화는 이성적인 자세로 경찰과 범인 혹은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감독과 관객의 대결이었지만 [살인의 추억]은 서태윤의 심경변화와 함께 관객들의 이성적인 자세도 점차 무너뜨림으로써 헐리우드 스릴러 영화와는 전혀 다른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스릴러 영화로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엔 생각지도 못했던 김상경이라는 배우가 우뚝 서있었던 겁니다.    
[국화꽃 향기], [질투는 나의 힘]에 이어 연속으로 [살인의 추억]에 출연함으로써 2003년 최고의 발견을 이루어낸 박해일이라는 배우의 존재도 색다른 재미였습니다. 비록 아직은 연기적인 연륜이 높지못해서 송강호와 김상경이라는 선배 배우들 앞에서 전혀 빛을 발하지는 못했고, 마지막 반전도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암튼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배우를 만난 기쁨을 느끼게 했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이러한 감독과 배우들의 힘에 의해서 한국 스릴러의 잇딴 실망스러움을 단번에 덮어 버렸으며, 이 한편의 영화로 저는 한국 영화에 많은 기대을 하게 되었습니다. [살인의 추억]을 잇는 한국식 스릴러 영화에 대한 기대를... 봉준호 감독의 세번째 영화에 대한 기대를...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의 다음 영화에 대한 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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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
저도 어제 이영화 봤어요.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인지 기대했던것만큼의'재미'는 없었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놀라웠고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은 들었어요.
 2003/05/09   
쭈니 기대가 크셨군요.
저도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기대가 너무 큰 영화는 재미있기 어렵더군요. ^^
 2003/05/09   
남자
기대에 부흥한 영화인데^^
다시한번 객관성을 가지고 볼려고 합니다.
너무 몰입해서 분함때문에....억울함 때문에..
전체적인것을 캐치못한 것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리뷰 항상 멋지게 쓰는 쭈니님이 굉장하다는^^
 2003/05/09   
쭈니 영화를 두번 볼 수 있는 여유... 부럽습니다.
전 한번 보기도 시간이 모자란데...
저도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엑스맨 2]와 [살인의 추억]을 다시 보고 싶네요.
그리고 남자님의 영화평도 멋지답니다. ^^
 2003/05/10   
지금도 숨이 탁탁 막힌다는..  2008/08/24   
쭈니 [살인의 추억]은 분명 숨이 탁탁 막히는 매력이 있는 영화입니다.
그 녀석... 이제라도 잡히면 좋으련만...
 2009/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