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재한
주연 : 탑, 권상우, 차승원, 김승우
난 전쟁영화가 싫다.
제 글을 자주 읽으신 분이라면 제가 공포영화와 함께 전쟁영화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도 공포영화는 한때는 자주 보는 편이었는데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갑자기 심장이 약해진 것을 느껴 일부러 피하는 것이지만 전쟁영화의 경우는 영화를 좋아하던 10대 시절부터 꾸준히 싫어하는 장르였습니다.
제가 전쟁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전쟁영화(특히 할리우드 전쟁영화)가 내세우는 영웅주의가 역겨웠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에는 희생자만 있을 뿐 영웅 따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영웅... 결국은 적군을 가장 많이 죽여야 얻을 수 있는 타이틀입니다. 하지만 적군도 전쟁의 희생자일 뿐인 것을...
내가 [태극기 휘날리며]를 좋아하는 이유
그렇기에 저는 전쟁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고, 또 좋아하는 전쟁영화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예외도 있습니다. 바로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입니다. 장동건과 원빈이 주연을 맡았던 한국전쟁을 소재로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제가 전쟁영화에서 싫어하는 부분들이 싹 걸러져 있는 영화였습니다.
일단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영웅은 없습니다. 이념에 휩싸인 한 형제의 슬픈 비극만 있을 뿐입니다. 같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고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 영화는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은채 다시는 이런 끔찍한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업영화의 재미 속에 녹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전 전쟁영화를 싫어하면서도 [태극기 휘날리며]는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포화속으로는]?
[포화속으로]는 제 2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었으며, 연합군에 의해 총알받이로 선택되어진 학도병의 비극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북한군 지휘관으로 캐스팅된 배우는 차승원입니다. 차승원이라면 '북한군 = 나쁜놈'이라는 공식을 깨고 북한군도 전쟁의 희생자였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포화속으로]가 따라하고 싶었던 것은 [태극기 휘날리며]가 아니었습니다. [포화속으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하고 있는 [화려한 휴가]를 닮고 싶었나봅니다. 학도병 개개인의 캐릭터 묘사에 치중하며 평범한 학생일 수도 있었던 그들의 비극을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 [포화속으로]가 싫다.
[화려한 휴가]와 닮은 [포화속으로]. 하지만 난 그래서 [포화속으로]를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도병 개개인의 캐릭터를 세심하게 잡아내는 동안 이 영화는 북한군을 등한시합니다. 차승원이 맡은 북한군 지휘관은 그저 나쁜 놈에 불과했고, 영화의 후반 학도병들이 북한군에게 총을 난사할 때엔 산더미처럼 쌓이는 북한군의 시체를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쾌감을 느끼라고 말합니다.
학도병들은 영웅으로 그려지는 동안 전쟁의 희생자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멋지게 포장된 화면과 온갖 폼은 다 잡는 캐릭터들로 인하여 전쟁영웅 그리기에 치중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엔 주인공들이 왜 그리도 폼을 잡으며 죽어가던지... 비극적인 전쟁영웅 그리기에 이재한 감독은 모든 역량을 동원하였지만 그것이 바로 제가 전쟁영화를 싫어하는 이유였기에 [포화속으로]가 끝나는 순간... '역시 난 전쟁영화는 싫어.'라는 사실만 확인해주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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