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정국
주연 : 신현준, 신은경, 김영호
개봉 : 2003년 2월 7일
겨울 방학기간중에 저희 집에 놀러 온 사촌 동생은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제 방에 앉아 인터넷 오락을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TV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녀석의 나이는 22살. 제가 그 나이 때에는 맨날 친구들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고, 여자 꽁무니도 졸졸 쫓아다녔는데, 이렇게 집에만 뒹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어찌나 처량하던지... 결국 저는 녀석을 끌고 극장 나들이를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녀석도 제 핏줄인지라 영화라면 환장을 하기에 영화를 보러가자는 저의 제안에 좋아하더군요. 그렇게해서 사촌 동생과 [이중간첩]에 이어서 랜드 시네마의 특별 할인가 가격을 이용하여 또다시 단돈 4,800원에 영화를 보기위해 용산 전자상가로 향했습니다.
최근 개봉 영화중에서 제가 보지 못한 영화는 [블루]와 [아이 스파이]뿐. 에디 머피와 오웬 월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는 [아이 스파이]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블루]만큼은 보고 싶었습니다. 작년에 계속된 한국형 블럭버스터의 흥행 재난이 과연 올해에도 이어질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겁니다. 불행하게도 [블루]는 같은 날에 개봉된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밀려서 별다른 흥행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지만, 네티즌의 평가는 다른 실패한 블럭버스터와는 달리 '이대로 이 영화가 망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깝다'는 식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작년에 블럭버스터 3대 재앙 영화인 [아 유 레디], [예스터 데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중에서 고작 [예스터 데이]만 극장에서 확인한 저는 [블루]가 한국형 블럭버스터의 실패작으로 등록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꼭 극장에서 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요즘 가벼운 코미디 영화에 푹 빠져서 조금이라도 무거워보이는 영화는 보기를 거부하는 나의 그녀의 [블루]에 대한 냉담한 반응때문에 결국은 '사촌 동생을 위해서...'라는 명목을 내세워 극장에 가기는 했지만, 암튼 저는 제 사촌 동생을 이용하여 소망을 이룬 셈입니다. ^^;
[블루]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제대로 만들어진 한국형 블럭버스터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개봉된 블럭버스터 영화중에서 절 만족시켰던 영화가 2002년 2월 1일에 개봉되었었던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이었으니, 정확히 1년하고도 6일만에 제대로 만들어진 한국형 블럭버스터를 만난 겁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 대해서 상당한 실망감을 드러내셨지만 전 꽤 재미있게 보았었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저의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흥행 실패의 길을 걷는 것을 보면 역시 제가 느끼는 만족감과 다른 분들이 느끼는 만족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듯... ^^;
[블루]의 무대는 대한민국 해군 특수 잠수부대인 'SSU'입니다. 지금까지 개봉된 한국형 블럭버스터들이 대체로 미래의 세계나 환상의 세계를 무대로 삼는 것과 비교한다면 [블루]의 무대는 조금은 왜소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왜소함은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됩니다.
블럭버스터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는 마치 강박관념에 휩싸인듯이 블럭버스터에는 허무맹랑한 스토리가 어울린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듯이 보였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선생님이 무시무시한 무협 액션을 펼치고([화산고]), 타임머신이 등장하여 미래가 뒤바뀌거나([2009 로스트 메모리즈]), 놀이공원에서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환상체험을 하고([아 유 레디]), 2020년에는 유전자 조작으로 희대의 살인마가 나타나기도 하고([예스터 데이]), 중국 요리 배달원은 갑자기 게임의 세계로 뛰어들어가 성냥팔이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쉴새없이 총알을 퍼붓기도 했습니다.([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러듯 우리나라의 블럭버스터 영화는 SF와 환타지 장르에만 국한되어 관객들에게 현실과는 동떨어진채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효과 기술이라는 것이 헐리우드의 그 현란한 특수효과에 눈높이가 맞춰져 있는 관객에겐 아직도 어린애 걸음마 수준이니, 우리나라의 특수효과 기술로 만들어진 블럭버스터 영화들이 관객의 수준에 맞춰지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루]는 SF와 환타지에 매달리던 다른 블럭버스터와는 달리 현실의 세계로 관객들을 안내합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미래나 환상의 세계을 만들어내기 위한 유치한 특수효과(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가 필요 없으며, 이러한 특수효과의 최소화는 역설적으로 한국형 블럭버스터의 최대 약점 보완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SSU'라는 일반 관객들에겐 생소한 잠수함부대를 영화의 무대로 내세움으로써 SF와 환타지만큼이나 새로운 세계를 관객앞에 펼쳐보여 줍니다. 특수효과를 최소화로 줄인 새로운 세계의 개척. 이것은 [블루]가 다른 한국형 블럭버스터 영화들과 차별되어야하는 이유이며,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SSU'라는 조금은 생소한 무대 배경을 선택한 이 영화는, 그러나 스토리에서는 삼각관계라는 익숙한 소재를 꺼내듭니다. TV 드라마의 오랜 소재이며, 멜로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 식상할대로 식상한 듯이 보이는 삼각관계라는 소재는, 그러나 [블루]라는 거액이 들어간 블럭버스터 영화를 만남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 냅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낸 삼각관계의 주인공은 'SSU'의 동기이며, 오랜 친구 사이인 김준(신현준)과 이태현(김영호)입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김준과 이태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SSU'에 지원한 태현과는 달리 단지 친구인 태현이 지원했기 때문에 'SSU'에 지원한 준. 그러나 그들의 실력은 언제나 준이 한수위였으며, 태현은 준에게 밀려 언제나 2인자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이 두사람 앞에 강수진(신은경)이 끼어들게 되고, 준과 수진은 연인사이로 발전합니다. 하지만 태현도 수진을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으니...
이 영화는 준과 태현 그리고 수진의 삼각관계를 통해 영화를 이끌어 나갑니다. 이러한 삼각관계는 어느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번쯤 보았을법한 설정인데도 불구하고 [블루]에서는 오히려 빛을 발합니다. 그러한 이유는 케케묵은 삼각관계속에서 캐릭터들의 성격과 갈등을 잘 표현한 이정국 감독의 능력 때문일 겁니다.
이정국 감독... 그는 최진실과 박신양 주연의 멜로 영화 [편지]로 엄청나게 흥행에 성공한 감독입니다. 이러한 이정국 감독의 멜로 영화에 대한 재능은 [블루]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됩니다.
모든지 대충대충이며, 껄렁껄렁한 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1인자이며, 준을 이기기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태현은 항상 준에게 밀려서 2인자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은 태현의 준에 대한 미묘한 경쟁의식과 질투심은 결국 준과 수진의 사랑을 방해하게되며, 삼각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영화의 후반 '나도 널 이기고 싶다'며 마지막 선택을 하는 태현의 모습이 억지스럽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이토록 태현의 내면 세계를 세세하게 잡아낸 덕분이며, 이러한 그의 내면 세계는 삼각관계라는 케케묵은 소재위에 뿌려져 영화의 갈등구조와 스토리 라인을 더욱 풍족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SSU'라는 새로운 무대위에 삼각관계라는 케케묵은 소재를 꺼내들어 풍족한 스토리를 구축하는 것으로 영화를 끝맺음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형 블럭버스터라는 장르가 광고 선전에 등장한 이상, 이 영화는 블럭버스터의 최대 덕목인 스펙타클도 관객 앞에 선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러한 스펙타클의 표현에 있어서 영특함을 발휘합니다.
이 영화는 해군 특수 잠수부대인 'SSU'를 영화의 무대로 삼은 만큼 바다라는 천혜의 요소를 스펙타클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바다... 그 중에서의 심연의 바다를 심도있게 잡아낸 이 영화는 중간중간에 손에 땀을 쥐게하는 잠수 부대의 임무를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 다른 영화들이 하지 못한 자연스러운 스펙타클을 잡아냅니다. 굳이 어색한 특수효과를 발휘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주위를 잘만 활용하면 이런 천혜의 스펙타클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심연이라는 스펙타클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해군이 적극 지원했다는 군병기에 의한 스펙타클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해군의 적극지원은 특수효과에 의한 스펙타클과 비교해서 엄청난 리얼리티를 얻어내었습니다.
바다라는 천혜의 스펙타클과 해군 지원에 의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스펙타클은 아마도 우리나라의 블럭버스터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블럭버스터 영화들이여! 기술도 되지않으면서 미래로만 나아가려 하지말고 우리의 주위를 한번 바라보라. 특수효과가 필요없는 스펙타클도 얼마나 널리고 널려있는데...)
이렇듯 한국형 블럭버스터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도 블럭버스터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이 영화는 한가지 요소를 빠뜨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건 바로 스타의 부재입니다. 블럭버스터 영화와 스타의 불가결한 관계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잘 아실겁니다. 결국 관객들은 스타의 이름을 보고 극장에 들어서는 것이기에 돈이 많이 들어간 영화일수록 스타에 대한 의존도는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블럭버스터 영화들은 특수효과로 들어간 제작비를 아낀다는 이유로 출연료가 비싼 스타급 배우를 배제하는 실수를 종종 벌입니다.
작년에 실패한 블럭버스터 영화들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아 유 레디]에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킬 스타급 배우가 한명이라도 존재했다면 어쩌면 그렇게 처참하게 흥행에서 실패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역시 연기 경력이 전혀 없는 TTL 소녀 임은경에게 그 무거운 짐을 떠맡기기엔 너무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스터 데이]는 그래도 김승우, 최민수, 김윤진이라는 스타급 배우들을 캐스팅 했지만 그들 역시 블럭버스터를 책임질 만큼의 선호도가 있는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그에비해서 신세대 스타인 장혁을 내세운 [화산고]와 장동건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내세운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어느정도의 흥행 성공을 거둔 사실은 바로 블럭버스터에서 스타가 가지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예일겁니다.
물론 신현준과 신은경이 스타급 배우가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비천무]라는 블럭버스터를 경험한 신현준과 [조폭 마누라]라는 흥행 영화에 경험이 있는 신은경의 조합은 분명 만만하게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선택할 정도의 스타 파워가 아직은 이들 배우에게는 없습니다. 게다가 태현이라는 중요한 배역을 맡은 배우는 김영호라는 영화계에서는 거의 신예급 배우입니다.
이것은 신현준과 신은경, 김영호가 연기를 못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신현준이라는 배우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의 신현준은 지금까지 그가 출연했던 영화중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으며, 신은경은 별로였지만, 김영호는 새로운 연기파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름만으로 관객들을 동원할 수 있는 스타 파워가 아직은 그들에게 부족했습니다. 단지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석규, 장동건같은 스타급 배우가 이 영화에 출연했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흥행에 실패한채 사라지지는 않을텐데...
재미게 본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자 괜히 죄없는 배우들을 탓해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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