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샘 멘더스
주연 : 톰 행크스, 폴 뉴먼, 주드 로
개봉 : 2002년 9월 13일
겉으로 보기엔 평온하고 완벽하게만 보이던 미국 중산층의 위기를 번뜩이는 블랙 코미디로 그려낸 영화 <아메리칸 뷰티>. 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1999년 당시 34세의 신인 감독이었던 샘 멘더스는 이 데뷰작으로 아카데미를 석권하는 등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았었죠.
전 아름다운 소녀의 나체에서 장미꽃잎이 떨어지는 예고편의 한 장면에 매혹되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었습니다. 이러한 단순한 호기심에서 이 영화를 보았기에 제가 기대했던 <아메리칸 뷰티>는 딸의 친구를 사랑한 엉뚱한 중년인 레스터 번햄(케빈 스페이시)의 좌충우돌 유쾌한 소동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메리칸 뷰티>는 이러한 제 기대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본 <아메리칸 뷰티>는 능력있는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과 사랑스러운 딸 제인(도라 버치)과 함께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안정되게 살고 있던 중년의 가장 레스터가 딸의 친구인 안젤라(미나 수바리)에게 그동안 잊어왔던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가정이라는 굴레속에서 포기해야 했었던 자신의 진정한 삶의 재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아주 덤덤하게 그려나간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제가 느낀 것은 '얼마나 많은 우리의 아버지들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였었죠.
그리고 이제 샘 멘더스는 자신의 두번째 영화인 <로드 투 퍼디션>으로 다시 관객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로드 투 퍼디션>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갱스터 무비로써 <아메리칸 뷰티>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로드 투 퍼디션>의 화두도 역시 '아버지'입니다.
<아메리칸 뷰티>가 평범한 일상에서 자아 찾기를 시도한 아버지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그린 블랙 코미디였다면, <로드 투 퍼디션>은 아들을 지키기위해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야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갱스터 무비 형식으로 그려낸 영화인 겁니다.
이 영화엔 두명의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 한명은 냉혹한 킬러인 마이클 설리반(톰 행크스)이고, 다른 한명은 갱 조직의 보스인 존 루리(폴 뉴먼)입니다. 그리고 마이클 설리반과 존 루리 역시 피가 섞인 부자관계는 아니지만 신의로 뭉친 부자관계이기도 합니다.
처음 이 영화는 매우 화목한 가족 관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마이클의 첫째 아들인 마이클 주니어에겐 아버지인 마이클은 무뚝뚝하지만 책임감있는 왠지 다가가기 어려운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할아버지인 존은 너무나도 자상하고 따뜻한 우리들의 할아버지, 바로 그 모습입니다.
하지만 마이클 주니어가 봐서는 안되는 장면을 보게되고, 존의 친아들인 코너가 비밀을 지키기위해 마이클의 가족을 죽임으로써 이 화목해보이는 가족 관계는 깨집니다. 그리고 서로 파멸로 이르는 길임을 알면서도 마이클과 존은 서로 총을 겨누게 됩니다. 각자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먼저 마이클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족의 원수인 코너와의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입니다. 코너의 뒤엔 보스인 존이 버티고 있고 그는 결코 자신의 친 아들인 코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이 승산없는 게임을 해야합니다. 죽은 가족들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남아있는 아들을 위해...
만약 마이클이 존의 충고대로 돈을 가지고 멀리 떠난다면 먼 훗날 조직의 보스가 된 코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의 은신처를 찾아내 마이클 주니어를 죽이려 들것이 분명했기에 마이클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코너를 죽임으로써 마이클 주니어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었던 겁니다.
존의 입장에서도 이 싸움은 그리 득이 될것이 없는 싸움입니다. 마이클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조직의 가장 유능한 킬러를 잃게 되는 것이며, 그 스스로 자신이 키웠던 킬러의 표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존도 결코 이 싸움에서 뒤로 밀릴수는 없습니다. 비록 자신의 친 아들인 코너가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존은 코너의 아버지이기때문에 코너의 허물을 감싸주고 그를 지켜줘야 했던 겁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지어야 할 십자가이다.' 존의 영화속 대사처럼 존과 마이클은 아들이라는 십자가를 메고 파멸로 이르는 길에 들어섭니다.
이제 영화는 아버지 대 아버지의 대결로 압축됩니다.
마이클은 코너를 죽이기위해 자신에겐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던 존을 먼저 죽여야 하고, 존은 코너를 지키기위해 맥과이어(주드 로)라는 킬러를 고용하여 자신에겐 아들과도 같았던 마이클을 죽여야 합니다.
결국 이 영화가 그려낸 마이클의 복수담은 아버지(존)의 아들에서, 아들(마이클 주니어)의 아버지로 성장하는 마이클의 성장담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존의 보호아래 냉혹한 킬러로 명성을 떨쳤던 마이클은 처음으로 아버지인 존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스스로 홀로서기를 해야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혼자 남게 될지도 모르는 마이클 주니어에게도 아버지로써 험한 세상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할것들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들을 지키기위해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마이클의 상황.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갱스터 무비로 잡아낸 샘 멘더스 감독의 재치.
결국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로써의 삶을 산다는 것은 갱의 세계처럼 어둡고 위태하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후반부의 장면에서 마이클은 결국 아버지인 존의 벽을 넘음으로써 아들인 마이클 주니어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으며, 마이클의 총에 쓰러지는 존은 마지막엔 편안하게 미소짓습니다. 마치 아직 어린 줄 알았던 아들이 이젠 완전한 성인으로 성장한 것을 보고 흐뭇해하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어두운 화면으로 일관하던 이 영화는 마이클이 복수를 한 후 처제의 집에 도착하는 해변가 장면에선 마치 다른 영화처럼 밝은 빛을 발합니다. 마치 아버지로써의 의무를 다한 마이클이 파멸로 이르는 그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리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비록 영화는 거친 갱스터 무비로 이들의 모습을 포착했지만 저의 눈에 비치는 장면은 진한 부성애로 똘똘 뭉친 우리들의 아버지,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갱스터 무비 형식으로 부성애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배우들의 명연기로도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연속 2회 수상에 빛나는 톰 행크스는 무뚝뚝하고 왠지 다가서기 어렵지만 책임감있고 아들에 대한 사랑이 깊은 그런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과 복수심에 불타는 냉혹한 킬러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연기했으며, 폴 뉴먼은 자상하고 편안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친 아들과도 같았던 톰 행크스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그런 이중적인 캐릭터를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포근한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이클을 노리는 냉혹한 킬러 맥과이어 역의 주드 로. 단지 잘생긴 배우로만 제게 기억되었던 그는 이 영화에서 살인을 즐기고 자신이 죽인 사람을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는 변태적인 살인마 연기를 무표정한 얼굴로 섬뜩하게 해내었습니다.
이렇듯 명배우들의 연기속에서 갱스터 무비 형식으로 그려진 이 부성애에 대한 영화는 어쩌면 제게 <아메리칸 뷰티>보다는 쉽고 감동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의 아버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하는 기회를 던져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