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폴 웨이츠, 크리스 웨이츠
주연 : 휴 그랜트, 니콜라스 호울트, 토니 콜레트, 레이첼 와이즈
개봉 : 2002년 8월 23일
토요일... 브로드웨이 극장과 <패밀리> 때문에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채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결국 스트레스는 풀지 못하고 오히려 잔뜩 얻어만 왔던 저는 친구와 헤어져 집에와서도 괜히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인터넷을 하고 새벽에 목청껏 노래를 불러보았지만 나의 온 몸을 감싸고 있던 짜증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러다가 지쳐서 우울하게 잠을 잤던 저는 그 다음날 아침 후배의 전화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후배는 다짜고짜 '오빠! 오늘 나랑 놀자!'라며 당돌하게 데이트(?) 신청을 하더군요. 그렇게해서 다시한번 극장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재밌는 영화를 골라야지.'라고 다짐을 했지만 도대체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후배와 함께 극장앞에서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고른 영화는 <어바웃 어 보이>.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이미 포복절도할 웃음을 기대했던 <패밀리>에게 처절한 배신감을 맛본 저로써는 다른 영화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쓰리>를 선택하자니 공포 영화를 볼 기분이 아니었고, <언페이스풀>을 선택하자니 너무 야할 것 같아서 여자 후배와 같이 보기엔 부적절해 보였으니... 요즘 도대체 왜이리 볼 영화가 없는지...
그러나 후배와의 뜻하지 않은 데이트는 절 괴롭혔던 스트레스를 풀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날 후배와 함께 간 극장이 대한극장이었는데 알고보니 대한극장 옆에 '한옥마을'이라는 대단위 공원이 있더라고요. 제가 원래 그런곳을 좋아하거든요. 탁트인 잔디밭과 고전적인 풍취가 물씬 풍기는 옛날 한옥들, 그리고 타임캡슐까지... 더운 날씨였지만 공원을 거닐며 신선한 공기를 섭취하고나니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라가더군요.
게다가 영화도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흐뭇하게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무난했습니다.
<어바웃 어 보이>는 '결혼은 미친짓이다'라고 믿고있던 한 바람둥이가 한 소년을 만나며 결국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너무나도 고전적인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슷한 내용의 영화들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중에서도 <피너츠 송>이 그 표현방식은 많이 틀리지만 기본적인 줄거리는 거의 흡사한 영화였습니다. (물론 아이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러한 영화의 키포인트는 '얼마나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를 살려내면서 관객의 공감을 얻어 낼수 있을 것인가' 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어바웃 어 보이>는 일단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1998년에 출판된 닉 혼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탄탄한 스토리 라인은 이미 확보한 셈이며, <아메리칸 파이>로 사춘기 남학생들의 심리를 사실적이면서도 코믹하게 그려냈던 웨이츠 형제가 감독을 맡음으로써 철없는 사춘기 시절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주인공 윌 프리먼(휴 그랜트)의 캐릭터를 좀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좀더 코믹하게 그릴 수 있었으며,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나인 먼쓰>,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로맨틱 코미디 전문 배우인 휴 그랜트를 주연으로 출연시킴으로써 그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시킬 수 있었으니... 일단 <어바웃 어 보이>는 로맨틱 코미디로써의 기본적인 재미는 확보한 셈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휴 그랜트와 짝을 이뤄 영화의 재미를 이끌어갈 당돌한 아역 배우를 캐스팅 하는 겁니다. 하지만 <어 바웃 어보이>는 그것마저 성공을 거둽니다. 마커스역에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던 12세의 젊은 배우 니콜라그 호울트를 캐스팅함으로써 휴 그랜트와 훌륭한 짝을 이뤄냈으니 말입니다.
자! 이제 이 영화는 모든 것을 갖췄습니다. 이제 얼마나 재밌고 아기자기하고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며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하는가만 남은 셈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윌과 마커스의 나레이션을 따로 배치하며 이 두 캐릭터를 동등한 위치로 관객에게 소개한 후 영화를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작곡한 노래의 인세만으로 백수 생활을 즐기며 어떻게하면 부담없이 여자들과 놀며 즐길까만 고민하는 윌과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 피오나(토니 콜레트)와 단둘이 살며 학교에선 친구들한테 왕따당하기 일쑤인 어린 소년 마커스. 처음에 이 두 캐릭터는 너무나 그 성격이 틀려 서로 잘 어울릴 수 있을지 의문이 갈 정도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윌과 마커스의 생활을 따로 지켜보며, 관객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 두 캐릭터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입니다.
가족 형성을 거부하며 그 스스로 '나는 외로운 섬이다'를 자처하는 윌과 우울증에 걸린 피오나와 위태로운 가족 관계를 유지하며 본의 아니게 외로운 섬이 되어 버린 마커스. 이 두 캐릭터는 서로 다른 외로움의 위치에 서있지만 분명 가족이라는 완벽한 테두리를 형성하지 못한채 외로움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아주 영리하게 관객들을 영화의 캐릭터에 몰입하도록 유도합니다. 솔직히 주인공이 두 명이며 이 두 주인공의 각기 다른 나래이션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영화가 중심을 잃을 수도 있으며, 관객들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가 윌의 시선으로만 진행되었다면 윌과 마커스가 티격태격하며 친해지는 영화 중반의 진행이 어색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영화를 마커스의 시선으로만 진행되었다면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결국 이 영화는 윌과 마커스의 시선을 동등하게 처리함으로써 이 두 캐릭터들을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이해시킴과 동시에 서로 다르게만 보이는 윌과 마커스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효과적으로 표현합니다.
윌과 마커스의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이해시킨 이 영화는 이제 본격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본연의 임무인 짝짓기에 들어섭니다.
피오나와의 위태로운 가족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윌이 필요했던 마커스는 윌과 피오나가 친해지더록 필사의 노력을 하고, 언제나처럼 새로운 섹스 상대를 찾아헤매던 윌은 레이첼(레이첼 와이즈)이라는 미모의 이혼녀를 만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캐릭터들의 짝짓기 작업이 진행되는 순간 제가 안도의 한숨을 쉬어던 것은 이 영화가 윌과 피오나를 서로 짝지어주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이 영화에서 가장 한심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캐릭터가 바로 피오나입니다. 영화가 윌과 마커스에게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관객들은 피오나를 이해할 시간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결국 피오나는 우울증에 걸린 마커스의 어머니라는 아주 단순한 캐릭터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왜 우울증에 걸렸는지, 왜 자살을 시도하는지, 관객들은 그것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이 무책임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러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마커스를 동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영화가 윌과 피오나를 짝지어 주려 시도했다면 피오나때문에 불쌍한 캐릭터가 한 명 더 늘어나는 불상사를 맞이하게 되었을 겁니다.
암튼 영화는 슬기롭게도 관객에게 피오나를 이해시키지 않는 대신 피오나를 그냥 마커스의 어머니라는 위치에서 만족시키고 윌의 짝으로 레이첼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제시합니다.
난데없이 등장한 레이첼이라는 캐릭터...
여기에서 감독인 웨이츠 형제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을 잘 이용합니다. 솔직히 영화 후반에 등장한 레이첼이라는 캐릭터는 정말로 난데없게만 느껴집니다. 섹스만을 탐닉하던 윌이 레이첼의 등장으로 갑자기 사랑운운하는 것도 초반까지 짜임새있게 풀어가던 영화의 분위기상 맞지도 않고... 하지만 레이첼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레이첼 와이즈라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면 이러한 의문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사실 제는 이 영화를 보기전 마커스의 어머니인 피오나역은 레이첼 와이즈가 맡을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윌과 피오나를 짝지어주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 겁니다. 이렇듯 로맨틱 코미디는 아름다운 여인한테 관대합니다. 물론 일부 안그런 영화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는 선남선녀들을 짝지어주는 영화입니다. 윌의 짝으로 피오나가 부적합했던 것은 물론 그녀의 캐릭터를 관객이 이해하지 못했던 점도 있지만 피오나를 연기한 토니 콜레트가 너무 독특한 외모탓에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크게 한 몫한 셈입니다.
하지만 레이첼 와이즈는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너무나도 완벽합니다. 이미 <체인 리액션>과 <미이라>로 관객들에게 어느정도의 인지도도 확보해 놓은 그녀는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기엔 너무 우중충한 배우들만이 등장하던 <어바웃 어 보이>에 한가닥 환한 빛줄기같은 캐릭터입니다.
결국 관객들은 레이첼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그녀가 아름다운 이혼녀라는 사실만으로 주인공인 윌과의 짝짓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면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참 단순합니다. 단지 선남선녀를 등장시키는 것만으로도 영화적인 재미를 완성시킴은 물론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아주 간단히 관객에게 받아내니 말입니다. 하지만 뭐... 그런 것이 로맨틱 코미디의 장점이겠죠. ^^
이제 <어바웃 어 보이>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였습니다. 마지막에 윌과 레이첼의 짝짓기를 감동적으로 이끌어내는 것만 남은 셈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이 영화는 탄탄한 원작과 웨이츠 형제의 능력을 맘껏 발휘합니다. 단지 노래 한곡만으로 마커스와 피오나의 위태로워 보이던 가족 관계를 완벽하게 회복시키고 레이첼과 밀고 당기는 사랑 줄다리기를 하던 윌에게도 사랑의 승리자라는 월계관을 씌워줬으니 말입니다.
사실 조금 밋밋한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게다가 헐리우드의 철저하게 계산된 로맨틱 코미디에 비해 영국 배우들이 주로 등장한 이 영화는 조금 안 예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꽤 괜찮았던 로맨틱 코미디였던 것은 분명한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통해 외로운 섬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으니 말입니다. ^^;
P.S. 이 영화를 다보고 후배와 <피너츠 송>을 봤습니다. 전 이미 컴으로 <피너츠 송>을 봤었지만 워낙 볼 영화도 없었고 후배가 <피너츠 송>이 보고 싶다고 하기에... 그런데 놀라운 것은 컴으로 본 <피너츠 송>과 극장에서 본 <피너츠 송>이 너무나도 틀리다는 점입니다. 극장에서 본 <피너츠 송>은 영화의 상영시간 조절을 위해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약간 가위질을 했더군요. 정말로 아주 약~간~ 게다가 직접적인 성적 표현이 가득한 영화 중반의 '피너츠 송'의 가사도 상당부분 완화되었습니다. 물론 관객을 위해서 너무 직접적인 표현을 완화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번역가에 의해 이렇게 영화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은 제겐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게다가 영화는 왜자꾸 가위질을 하는 건지... 제가 보기엔 1분 정도 자른 것 같던데... 그 장면이 러닝타임을 잡아먹으면 얼마나 잡아먹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