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1998년 9월 11일
감독 : 박기형
주연 : 이미연, 김규리, 최세연
비가 내리는 여고 교정. 군데군데 패인 물웅덩이, 운동장을 지나 교사 건물에 들어서면 불안한 얼굴로 교무수첩을 뒤적이는 여교사 박기숙이 혼자서 빈 교무실을 지키고 있다. 갑자기 도서실로 향한 박기숙은 93년도와 96년도 졸업앨범을 찾고 제자이자 이제 모교로 부임해온 문학 교사 허은영(이미연)에게 전화를 건다. '진주가 여기 있어.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 그때 박기숙은 교복을 입은 한 아이에게 목이 졸려 죽게 된다.
[여고괴담]의 오프닝 장면은 공포 장르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요고괴담]이 제작될 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98년 들어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공포 장르의 부활을 이어나가는 전통 공포영화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외형적으로 분명 그러했다. 그렇기에 공포 장르의 신호탄이 된 코믹 잔혹극 [조용한 가족]보다, 한국형 SF공포영화를 표방한 [퇴마록]보다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여고괴담]엔 코믹 잔혹극이라는 새로운 시도도,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하는 특수효과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요고괴담]이 개봉되자마자 상황은 달라졌다. 모두들 그저 '전설의 고향'식으로 떠도는 귀신 이야기를 현재의 여고를 배경으로 영화화한 B급 공포영화라고 생각했던 [여고괴담]은 여고생을 주관객으로 하여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 냈고, 전국적으로 흥행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 사회 현상으로까지 받아들여 졌다.
솔직히 [여고괴담]은 공포영화라기 보다는 하이틴영화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70년대 하이틴영화가 [얄개 시리즈]식의 코미디였다면 80년대엔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식의 최루성 멜로였다. 그렇다면 세기말의 하이틴영화는 어떤 형태일까? 정답은 바로 [여고괴담]에 있다. 박기형 감독은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잘못된 교육제도를 웃음으로 얼버무린 70년대와 완벽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울음으로 그 한을 풀려했던 80년대 하이틴영화를 끌어 안으며 90년대 하이틴영화의 틀을 완성해냈다. 그는 잘못된 교욱제도 그 자체에서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공포를 발견한 것이다.
박기형 감독은 분명 순수 공포영화를 바랐던 제작사의 요구도 어느정도 받아들여야 했다. [여고괴담]이 훌륭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외형적으로 [여고괴담]은 완벽한 공포영화이다. 따돌림을 이기지 못하고 학교에서 죽은 진주라는 아이의 영혼이 학교를 떠돌고, 학생을 억압하던 선생들은 갑자기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여고괴담]의 모티브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친구라고 믿었던 한 아이가 바로 귀신이라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제 누가 귀신일까?'라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
여기에 세 명의 주인공이 용의자로 떠오른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이 바로 정숙이다. 만년 2등밖에 하지 못하는 그녀는 섬뜩한 얼굴과 무언가 감추는 듯한 분위기로 가장 귀신에 근접하여 있다. 박기형 감독도 그녀가 귀신이라고 관객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포나 스릴러 장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그녀가 귀신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가장 귀신다운 그녀가 귀신이라면 영화는 마지막의 극적 반전을 잃어버리는 것이 될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관객의 예상에 따라 영화 후반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용의자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다음 용의자는 지오(김규리)이다. 그녀는 예전에 진주가 앉았던 책상에 앉아 있으며 진주가 자신의 친구였던 지금은 선생이 되어버린 은영에게 선물한 조그마한 방울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용의자는 조용한 성격의 재이(최세연)이다. 그녀는 박기형 감족에 의해 철저하게 감춰져 있으므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혐의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장 귀신과 거리가 멀었던 재이가 귀신으로 밝혀지고 영화는 반전하게 된다.
박기형 감독은 이렇듯 철저하게 공포스릴러 장르의 법칙을 이용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일 뿐, 이 영화가 진정 바라는 것은 '귀신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귀신이 되어 학교를 떠돌 수 밖에 없는 진주의 사연이다. 친구들의 따돌림, 그리고 선생의 폭력 등,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공포는 '누가 귀신일까?'하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바로 학교라는 공간 그 자체인 것이다.
박기형 감독은 끝이 안보이는 좁고 긴 복도와 삐걱거리는 책상과 음침한 미술실과 과학실의 모습을 통해 학교라는 공간을 완벽한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게다가 그는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에서 성적에 대한 억압으로 자살을 택한 이미연을 새로 부임한 선생인 은영으로 캐스팅함으로써 이 영화가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의 80년대 하이틴영화를 끌어 안고 있는 90년대식 하이틴영화라고 직접적으로 진술하고 있으며, 진주가 떠난 자리를 다시 메꾸는 정숙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아직은 바뀌지 않을 우리의 교육제도에 대한 한탄을 나타내고 있다. 성적에 대한 억압과 선생들의 폭력이 계속 존재하는 한 우리들이 학교는 영원히 공포의 무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2009년 오늘의 이야기 ***
이 글의 길이에서 알 수 있듯이 제가 정말 많이 좋아하는 몇 안되는 공포영화입니다. [여고괴담] 시리즈는 2편까지 참 많이 좋아했는데 3편인 [여우계단]에서는 너무 공포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실망이 컸었습니다. 암튼 제 글에서 귀신의 존재를 밝히는 등 스포일러 역할에 충실했는데 설마 이 영화의 반전을 제 글을 통해 미리 알아버려서 영화 보기를 망쳐버린 분들은 없으시겠죠??? ^^;
아참... 재이를 연기한 최세연은 바로 최강희랍니다. 10년 전에는 최세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죠. 언제 개명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최세연보다는 최강희가 더 잘 어울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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