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첸 카이거
주연 : 장국영, 공리
제인 캠피온과 함께 93년 깐느 최고의 영예를 안앗던 [패왕별희]이후 첸 카이거 감독은 왕가위 감독의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을 기용하여 [풍월]을 완성했다.
솔직히 말해 [풍월]은 [패왕별희]의 또다른 자기 복제에 불과하다. [패왕별희]의 히어로인 장국영과 공리가 또다시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을 제껴두고라도 기대적 배경, 주제의식 그리고 주인공들의 인생 역정이 그러하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도일에 의해 화려해지고 아름다워진 [풍월]은 [패왕별희]가 가지고 있었던 영화의 진솔함을 내포하지 못한채 너무 커다란 국제적 성공을 거둔 거장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다.
이 영화의 주요 무대는 1920년대의 타락한 도시 상해와 몰락해가는 방씨 가문의 저택이다. 상해가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타락해가는 근대의 중국 모습이라면 방씨 가문의 저택은 몰락한 청나라 왕조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첸 카이거 감독은 두 장소를 확연한 차이로 그리고 있다.
상해의 모습은 호화롭고 활기차지만 창년촌과 도박 그리고 돈많은 유부녀를 유혹한후 협박해 돈을 버는 지골로들의 도시로 그려져 있다. 그이반에 방씨 가문의 저택은 넓지만 암울하고 조용하며 아편 향기가 가득 베인 곳으로 그려져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네 남녀이다. 어린 시절 누나를 따라 방씨 가문에 들어온 충량(장국영)은 방씨 가문의 장손이며 매형인 정달의 아편 시중을 든다. 그러던중 충량은 정달의 강요에 못이겨 누나와 근친상간적 관계를 갖게되고 정달의 아편에 독약을 넣은후 상해로가 유명한 지골로가 된다.
그러나 방씨 노인이 죽고 정달의 동생 류이(공리)가 가문을 이어받자 류이를 유혹해 재산을 빼앗아오라는 조직의 명령을 받고 방씨 가문의 저택에 돌아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류이의 시중을 드는 단오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저택을 떠나고 싶어한다. 어린 시절 악몽이 깃든 충량은 저택에 돌아가는 것을 꺼리고 충량의 누나와 류이는 충량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속 저택은 주인공들의 강박관념적 공간이며 폐쇄적 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엇갈린 사랑을 그리고 있다. 충량은 류이를 사랑하지만 어렸을적 충격으로인해 류이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지막에 가서 류이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지만 그땐 류이가 충량을 거절한다.
단오는 류이를 남몰래 사랑하지만 충량으로 인해 상처받고 성격의 변화를 맞이한다. 사랑을 거절당한 충량은 류이의 아편에 독약을 넣고 자신은 방씨 가문의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방씨 가문은 단오가 물려받는다.
이 영화는 2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한 세남녀(충량의 누나를 제외시키면)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로는 흠잡을데 없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수려한 카메라 워크는 왕가위 감독의 도시 감각적 사랑 이야기에서의 설득력을 상당부분 상실했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20년대 상해와 몰락한 가문의 저택등 이 영화의 세트는 세련되었고 장국영은 카리스마로 관객을 휘어잡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패왕별희]의 감독이 만들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함을 상실했다. 상해와 저택이라는 서로 상반된 공간을 구축해놓고 무언가 중국의 근대사에 대한 비유를 하고 싶었던 첸 카이거 감독은 결과적으로 충량과 류이의 엇갈린 사랑만을 말할 뿐이다.
[패왕별희]에서 경극 배우들의 성적 혼란성과 사랑 그리고 인생 역정을 근대 중국사에 잘 융해시켜 관객에게 공감대를 형성시키게 했던 첸 카이거 감독은 똑같은 시대 배경과 주연 배우들 그리고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 감독이라는 전보다 휠씬 나아진 제작조건을 가지고도 수박겉핡기식 접근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근대 중국사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감동을 잃어버린채 [풍월]은 퇴폐미가 돋보이는 20년대 사랑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첸 카이거 감독의 의도가 그러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1998년 2월 9일
*** 2007년 오늘의 이야기 ***
첸 카이거 감독의 최근 작은 [무극]입니다.
만약 98년 당시 제가 [무극]을 봤다면 어떻게 [패왕별희]의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냐며 방방 뛰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만큼 [패왕별희]는 제게도 엄청난 감동을 안겨준 영화였죠.
암튼 전작이 너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일일겁니다.
그나저나 이 영화, 글을 쓰다보니 다시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장국영과 공리라... 포스터만으로도 엄청난 아름다움과 카리스마가 동시에 느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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