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이 한국영화, 아니 세계영화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1987년 한국영화의 세계 3대 영화제 첫 번째 수상이라는 기쁨을 안겨준 <씨받이>의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시작으로, 2002년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2005년엔 베를린영화제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베를린, 베니스, 칸영화제를 일컫는 세계 3대 영화제 수상 외에도 크고 작은 국제영화제와 국내영화제 수상경력까지 나열한다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이다.
최근 박찬욱, 봉준호와 같은 젊고 유능한 감독들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지만 임권택 감독이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최근 <천년학>을 찍음으로써 100번째 영화를 완성한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천년학>은 이렇게 막 내릴 영화가 아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인 <천년학>은 흥행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이다. 1993년 단관 개봉하여 100만 관객을 기록했던 <서편제>와 비교해서 <천년학>은 13만이라는 초라한 흥행 기록을 남겼으며, 무려 6개월 동안 장기상영 했던 <서편제>와는 달리 <천년학>은 극장 평균 10일밖에 상영하지 못했다.
이러한 실망스러운 결과에 임권택 감독도 많이 아쉬웠나보다. 그는 “<서편제>도 개봉 2주차에도 관객이 없었다가 입소문이 타서 6개월이라는 장기 상영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개봉 첫 주 흥행 결과만으로 성급하게 간판을 내려버린 극장에 아쉬움을 표현했다.
사실 <천년학>은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의 100번째 영화라는 화려한 타이틀과는 달리 어렵게 빛을 본 영화이다. 원 제작사인 태흥영화사가 제작을 포기함으로써 영화 자체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아무리 임권택 감독의 영화라도 흥행성이 없고, 스타 배우가 존재하지 않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요즘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사건이다. 하지만 영화사 키노(주)의 도움으로 <천년학>은 완성될 수 있었고, 거장의 100번째 영화는 어렵게 관객에게 공개되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봉된 <천년학>이 관객들과의 만남을 채 갖기도 전에 성급하게 막이 내려버리자 임권택 감독은 그에 대한 섭섭함보다는 미안함을 먼저 느꼈다고 한다. <천년학>의 제작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권택 감독을 직접 찾아와 흔쾌히 제작을 맡아 주었던 젊은 영화인들에게 금전적 손실을 안겨준 것에 대해서 미안함을 느낀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인간적인 측면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너무 서둘러 공개한 것이 문제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피해 서둘러 개봉을 하다 보니 홍보가 부족했다.”
임권택 감독이 진단한 <천년학>의 흥행 실패 이유이다. 결국 올 여름을 휩쓸고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파상공격을 <천년학>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년학>은 이렇게 막 내릴 영화가 아니다.”라고 임권택 감독은 말한다. 그는 관객이 다시 <천년학>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며 <천년학>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100번째 영화, 왜 <천년학>인가?
그렇다면 왜 <천년학>일까? 100번째 영화라는 상징적인 영화로 <천년학>을 굳이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에게 100번째 영화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임권택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권택 감독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통해 감독에 데뷔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작품 세계는 1979년 [깃발 없는 기수]부터라는 것이 영화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렇다면 1962년부터 1979년까지 17년간의 영화는 과연 무엇인가?
“초기 50여 편의 영화는 흥행 목적으로 남작한 영화이다. 당시엔 1년에 5편의 영화를 만들 정도로 졸속 제작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거장도 당시엔 흥행을 목적으로 마구잡이로 영화를 만들었던 시절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임권택이 존재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졸속 제작한 영화까지 포함해서 100번째 영화이니 임권택 감독 스스로는 그 상징성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가벼운 이야기로 100번째 영화를 넘어가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영화계 안팎으로 그의 100번째 영화에 의미를 두고 관심을 가지는 바람에 그렇게 넘어가서는 안될것 같아 <천년학>을 만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서편제>를 찍은 후 14년 만에 속편인 <천년학>을 만들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임권택 감독은 이렇게 대답한다. <서편제>에 대한 연속성은 거의 없고 단지 가족관계만 끌어다가 왔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천년학>이 <서편제>의 속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편제>를 찍을 당시 기술력이 부족하여 원작 중 ‘선학동 나그네’를 포함시키지 못했다가 CG등 영화 기술의 발달로 이제야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천년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에게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으로써의 의미보다는 <서편제>, <춘향뎐>으로 이어지는 판소리에 대한 임권택 감독의 연작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판소리는 우리에게 먼 것이 아니고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소리이다. <서편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흥행에 성공하며 젊은 층으로부터 판소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천년학>도 지금 세대에게 판소리의 아름다움을 알리자는 취지로 만든 영화이다.”
판소리, 더 넓게 나가 잊혀져가는 우리의 것을 사랑하는 노장의 안타까운 소망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파상 공격과 수익에만 급급하는 극장의 운영 방침 때문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 관객들은 그러한 임권택 감독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한국영화의 위기... 반드시 돌파해 나갈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현재 불어 닥치고 있는 한국영화의 위기로 옮겨졌다. 과연 현재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해 임권택 감독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은 대안을 찾는 시점이다.”
임권택 감독은 한국영화의 현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동안 너무 한국영화가 잘되니 모두들 너무 쉽게 생각했다. 신중하게 제작될 영화들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많이 제작됨으로써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러한 부진에 투자사가 발을 빼고,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우리 영화인들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그는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해서 ‘스크린쿼터일수 축소’등 외부적인 요소보다는 영화 내부적인 요소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영화계의 젊고 유능한 인재가 많기 때문에 해결 방안을 찾아내고 다시 활력을 되찾는 방안으로 소생할 것이다.”라고 낙관했다.
그러한 임권택 감독의 낙관론은 미국을 제외한 세계영화의 부진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유럽, 일본영화의 침체를 두고 “유럽의 경우 전쟁에서 벗어나 경제가 커지며, 일본의 경우 64년도 동경올림픽을 계기로 영화를 재미있게 볼 소재가 없어지며 하향세를 걸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정치, 경제가 안정되면 오히려 영화는 힘을 잃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국영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임권택 감독의 설명이다.
“군사정권당시 만들 수 없었던 영화들이 제작이 가능하게 되며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했고, 그러한 다양한 소재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최근 막혔던 소재가 고갈되며 유럽, 일본처럼 침체기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예술적 재능과 힘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그러한 위기에 쉽게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임권택 감독의 낙관론은 이렇게 후배 영화인들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한국 국민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매체의 한국영화에 대한 진단과 해결방안보다도 임권택 감독의 믿음에 의한 낙관론이 훨씬 가슴에 와 닿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한국에 대한 사랑, 임권택 감독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단 한편의 영화도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찍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는 한국이라는 공간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감독 임권택을 세계 영화계가 가만 놔뒀던 것일까?
“독일에서 몇 십년동안 합작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난 합작 영화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문화, 삶을 모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본, 중국에서도 투자 제의가 들어 왔지만 내가 그들을 모르기에 그들이 원하는 영화를 확실하게 소화할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임권택 감독의 대답에서 그가 왜 가장 한국적인 감독인지 알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의 문화와 삶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에 한국영화를 꾸준히 만들 수 있었던 것이며, 그러한 임권택 감독의 진심이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나게 했던 것이다.
그런 임권택 감독의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삶에 대한 영화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처음 60년대 50여 편의 영화를 찍을 당시엔 내 영화가 할리우드 수준에 오를 수 있다는 야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야망이었다. 엄청난 제작비와 유능한 인재, 기술이 받침이 된 미국 영화와는 달리 당시 한국영화의 열악한 조건은 도저히 미국영화의 수준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한국만이 만들 수 있는 한국영화로 미국영화와 맞서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삶에 대해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인한 깨달음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임권택 감독의 노력은 서서히 세계 영화인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한 예로 텔룰라이드 영화제에서의 <춘향뎐>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2000년 <춘향뎐>이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던 해, 미국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세계적 리조트 도시인 텔룰라이드(Telluride)에서 개최되는 텔룰라이드 영화제에 한국영화 최초로 <춘향뎐>이 초청되었다. 그곳에서 ‘영화의 역사’로 유명한 영화학자 브루스 카인과 스탠 브래키지를 만났는데 그들은 ‘세계에는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고전 명작이 있는데, 춘향전도 그런 명작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며 ‘판소리가 처음엔 생경했는데 점차 그 생경한 것이 나를 감동시켰다.’ 고 말했다. 이처럼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좋아했고 살아왔던 아름다운 정서를 영화에 담아 세계적인 보편성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내 영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임권택 감독의 이야기는 같은 한국인으로써 감동스럽고 뿌듯하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역량 덕분이라기보다는 판소리 같은 훌륭한 것이 있기에 가능했다며 한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지구촌을 커다란 꽃밭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지금은 황폐한 꽃밭이지만 앞으로 우리가 더불어 살며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할 일은 작은 나라이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문화적 개성과 아름다운 전통을 영화에 담아 지구라는 꽃밭을 가꾸는 것이다. 힘 있는 나라 일변의 꽃보다 작은 나라의 꽃도 같이 어우러지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꽃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98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을 당시의 수상 소감은 임권택 감독의 소신이 드러난다. 이미 많은 언론매체에서도 소개되어 유명해진 이 수상 소감에 대해서 임권택 감독은 바로 이것이 내 꿈이고 내가 해야 할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있기에 우린 지구촌이라는 꽃밭에서 당당할 수 있다.
죽는 그날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다.
가장 한국적이기에 가장 세계적인 감독, 임권택. 그의 정신과 혼이 임권택 감독을 끝으로 사라질까 두려워 후배 양성에 대해 물었다.
“동국대 겸용 교수로 6년째 강의를 하는데 체계적으로 강의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내가 나서서 강의를 하는 것보다 후배 감독들이 내 영화를 보고 배우고 느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임권택 감독은 영화를 통해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후배들에게 강의를 할 시간이 있으면 영화를 한편 더 만들겠다.”며 “난 영화를 만들기에도 지금 벅차다.”라는 말로 영화를 향한 꺼지지 않은 도전과 집념을 이야기했다.
도대체 100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면서 영화에 대한 욕심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난 자랑할 만한, 남에게 내세울 만한 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만하며 완성도면에서 자랑할 만한 영화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찍을 것 같다.”
영화를 찍고 나면 아쉬움이 남아 절대 그 영화를 안 본다는 임권택 감독 과연 그의 101번째 영화는 무엇일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현대물을 찍는다면 신세대와 구세대간의 생각의 차이, 이질성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죽는 그날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임권택 감독. 앞으로 101번째 영화를 넘어 200번째 영화를 만들 때까지 오랫동안 우리의 곁에서 한국영화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P.S.정식 인터뷰 기사는 아니고 인터뷰 기사 초안입니다. 제가 쓴 이 글을 신문사에서 수정을 하고 임권택 감독님께 허락받은 후 신문에 실릴 계획입니다. 아마도 신문에 실릴 인터뷰 기사는 제가 쓴 초안과 많이 다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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