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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 비상식의 세상에서 상식으로 맞선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

쭈니-1 2017. 10. 10. 17:59

 

 

감독 : 김현석

주연 : 나문희, 이제훈

개봉 : 2017년 9월 21일

관람 : 2017년 10월 2일

등급 : 12세 관람가

 

 

꿈만 같았던 열흘간의 황금연휴

 

9월 30일 토요일부터 10월 9일 월요일까지는 개천절, 추석, 한글날이 낀 무려 열흘간의 황금 연휴였습니다. 길어봤자 4~5일의 연휴가 고작이었는데, 이번 연휴는 평소보다 두배는 길었던 셈입니다. 저희 가족은 이 긴 연휴를 그냥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선 저는 연휴의 시작인 9월 30일을 회사 낚시 동호회 동료들과 주꾸미 낚시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낚시 인생 최고로 많은 주꾸미를 잡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연휴 둘째날인 10월 1일은 어머니 집에서 전날 잡은 주꾸미로 가족 파티를 했습니다. 꽤 넉넉하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워낙에 저희 가족들이 먹성이 좋아서 주꾸미는 금방 동이 났고, 그 대신 어머니가 해주신 갈비와 여동생이 사온 매운 족발로 저녁까지 술 파티가 펼쳐졌습니다. 연휴 셋째날은 웅이와 함께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봤고, 추석을 쇤 후, 10월 4일에는 구피, 웅이와 함께 [남한산성]을 관람했습니다.

10월 5일은 집에서 푹 쉬고, 10월 6일부터 8일까지는 경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30여년전 갔던 수학여행의 기분을 내기 위해 기차(KTX)타고 경주에 도착, 무작정 걷기와 버스를 타며 2박 3일간 경주의 풍경을 만끽했습니다. 그리고 연휴의 마지막날은 밀린 집안 청소도 하고, 여독을 풀기 위해 집에서 뒹굴거리며 꿈만 같았던 열흘간의 연휴를 마무리했습니다. 정말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네요. 그래도 나름 행복했던 연휴였습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연휴 기간동안 본 영화의 이야기를 쓰는 것과 경주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것 뿐이네요. 영화 이야기를 쓰고, 사진을 정리하며 행복했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죠.

 

 

 

원칙주의 9급 공무원과 민원 대마왕 도깨비 할매가 만나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원리원칙대로만 살 수 없음을 느낍니다. 조금은 원리원칙에서 벗어나도 융통성있게 상황을 대처하지 못하면 왕따가 되기 십상입니다. [아이 캔 스피크]의 주인공인 박민재(이제훈)과 나옥분(나문희)이 그러합니다. 박민재는 철저한 원칙주의를 고집하는 9급 공무원입니다. 영화에서 민재가 명진구청으로 발령이 났을때 이전 구청 사람들이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만으로도 민재의 원칙주의가 이전 구청 사람들을 얼마나 답답하게 했는지 상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원칙주의자 민재가 새로 발령받은 명진구청에서 예상하지 못한 강적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만난 강적은 온 동네를 휘저으며 무려 8천건의 민원을 넣어 도깨비 할매가 불리는 옥분입니다. 옥분이 제기하는 민원은 융통성을 발휘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옥분은 그러한 사소한 것들을 참고 넘기지 못하고 구청 직원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마저 질리게 만듭니다. 옥분과 같은 시장의 족발집 처녀가 옥분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도 옥분의 융통성 없는 행동에 질렸기 때문입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와 민원 대마왕 도깨비 할매 옥분의 만남으로 웃음을 만들어냅니다. 옥분의 민원에 민재는 원리원칙대로 처리하고, 원리원칙대로만 하는 민재의 민원처리에 옥분 역시 원리원칙에 맞서 민원 서류 뭉텅이를 안깁니다.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민재와 옥분.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들의 행동이 오히려 정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융통성이라는 변명으로 일을 대충 처리하고, 작은 위법은 정당화시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민재와 옥분처럼 행동한다면 조금 인간미가 부족할지는 몰라도 사건 사고 없이 안전하고 깨끗한 사회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옥분의 사연

 

하지만 [아이 캔 스피크]는 원리원칙주의자인 민재와 옥분을 내세운 코미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가 진정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옥분의 사연입니다. 옥분은 어린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수치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 집에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그녀를 창피해합니다. 그녀에게 평생 일본군 위안부의 일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그러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은 피해자인 옥분이 창피해하며 숨어야 하고, 가해자인 일본은 오히려 큰소리 떵떵치며 막말을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만들어버립니다. 

결국 [아이 캔 스피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비상식이 오히려 상식이 되어 버린 세상입니다. 옥분이 제기한 민원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융통성이라는 변명으로 옥분의 민원을 귀찮아하는 비상식의 사회에 익숙해져있는 것입니다. 옥분은 끊임없이 비상식의 사회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홀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며, 그렇기에 원칙주의자인 민재와의 만남은 겉보기엔 대결로 보이지만 어쩌면 동료을 만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옥분과 민재는 점점 서로를 이해하는 가족이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영어가 두 사람의 가교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서 영어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옥분에게 영어는 낯선 언어이지만, 유학까지 다녀온 민재에게 영어는 익숙한 언어입니다. 이렇게 영어는 옥분과 민재의 세대차이를 나타냅니다.

 

 

 

영어의 역할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영어의 역할은 옥분과 민재의 세대차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선 옥분이 영어를 배우려 했던 이유는 어린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남동생과의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나라는 극한의 빈곤과 맞서야 했고, 그러한 가운데 수 많은 어린 아이들이 마치 팔려나가듯 해외로 입양되었습니다. 결국 옥분이 배우고자 하는 영어는 남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던 빈곤했던 과거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 끝에 옥분은 남동생과 재회하며 승리를 거둡니다. 애초 두 사람 사이엔 언어의 장벽이 가로 막혀 있었지만, 옥분의 노력으로 그러한 유일한 장벽 마저 제거됩니다.

옥분은 영어를 배움으로써 치매에 걸린 문정심(손숙)을 대신해서 미국 의회에서 증언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영어는 더이상 피해자가 숨어야만 하는 비상식에서 벗어나 전 세계인에게 떳떳하게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할 수 있는 당당한 무기가 됩니다. 실제 2007년 7월 미국 하원에서는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등을 요구하는 결의안(HR121)이 통과되었습니다. 아쉽게도 통과된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의회가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공식 인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은 영어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태를 고발합니다. 이는 이 영화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영어라고는 전혀 하지 못하는 옥분이 민재와 함께 영어를 공부하며 서툰 발음으로 영어를 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의 웃음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그러한 웃음은 자연스럽게 영화 후반의 감동이 됩니다. 옥분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말입니다.

 

 

 

웃음의 장점과 단점

 

일단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2016년 2월에 개봉해서 358만 관객을 동원한 [귀향]과 2017년 3월에 개봉한 김향기, 김새론 주연의 영화 [눈길], 그리고 최근 개봉한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등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는 최근들어서 활발하게 영화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 캔 스피크]는 이들 영화와는 조금 다른 전개를 보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코미디 장르를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아이 캔 스피크]는 주제의 무거움을 피합니다. 실제로 너무 슬플 것 같다며 [귀향]을 보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던 구피도 [아이 캔 스피크]만큼은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추석 제사 음식을 만드느라 아쉽게도 [아이 캔 스피크]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적당한 웃음과 감동을 가지고 있기에 [아이 캔 스피크]는 명절 영화로 손색없는 재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비록 추석 연휴 극장가의 흥행 킹은 [남한산성]이지만 [아이 캔 스피크] 역시 현재까지 300만을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하며 조만간 [귀향]의 흥행 기록을 깰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 캔 스피크]의 웃음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면 돌파가 아닌 우회하는 선택으로 조금은 아쉬움을 안겼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아픈 과거이고, 건드리면 아픈 민감한 상처입니다.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미국 하원에 통과된 후에도 진정성 있는 사과는 하지 않고 돈 몇푼으로 과거를 틀어 막으려는 시도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의 실태를 정면으로 고발하며 수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겼습니다. 하지만 [아이 캔 스피크]는 우회를 선택함으로써 안정적인 상업영화를 만든 셈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영화로는 [아이 캔 스피크]보다 [귀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영화적 재미를 따진다면 단연 [아이 캔 스피크]가 앞서겠지만 말입니다.  

 

 옥분이 영어로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은

피해자는 숨어야 하고, 가해자가 오히려 떳떳한 비상식의 세상을 향한

상식의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I am sorry. Is that so hard? (미안하다. 이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