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7년 영화이야기

[악녀] -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잃은 후에야 그녀는 진정한 '악녀'가 된다.

쭈니-1 2017. 6. 12. 16:56

 

 

감독 : 정병길

주연 : 김옥빈, 신하균, 성준, 김서형

개봉 : 2017년 6월 8일

관람 : 2017년 6월 9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새로운 스타일의 한국 액션영화

 

한 여성의 거친 숨소리가 들립니다. 그녀는 어두침침한 허름한 건물에 홀홀단신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건장한 수십명의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거침없이 총을 쏴서 상대방을 죽이고, 총알이 떨어지자 칼을 꺼내 사정없이 휘두릅니다. 칼을 잃고 난 후에는 맨 몸으로 수십명의 남자들과 대결을 펼칩니다. 그리고 결국 건물내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뒤늦게 출동한 경찰에 붙잡힙니다. 그녀의 이름은 숙희(김옥빈)입니다.

[악녀]가 제70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월드 프리미어에 초청되어 5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인터넷 기사를 읽었을 땐 칸 국제영화제의 의례적인 환영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칸 국제영화제 뉴스가 나오기 전까지만해도 [악녀]라는 영화의 제목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고, 김옥빈, 신하균 등 주연배우들 역시 제 개인적으로 그다지 기대할만한 조합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여성 킬러 액션영화라니... 뤽 베송 감독의 초기작 [니키타], [니키타]를 리메이크한 [니나], 그리고 [킬 빌], [콜롬비아], [한나]까지 엇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이 너무 많아 이제 식상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악녀]의 오프닝 액션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우와!'라는 탄성을 마음 속으로 질렀습니다. 1인칭 시점으로 촬영된 오프닝 액션은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되어 수십명의 적과 싸우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프닝 액션의 후반부인 헬스장 액션에서는 카메라가 1인칭 시점에서 벗어나지만, 왜 정병길 감독을 액션 마스터라고 부르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짜릿한 액션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렇게 오프닝 액션을 보고나니 저는 자세를 고쳐잡고 [악녀]에 더욱 몰두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영화의 특징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이 살인병기로 등장하는 영화는 꽤 많습니다. 이렇게 수 많은 액션영화들이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감성적인 면을 부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 킬러 영화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뤽 베송 감독의 [니키타]만해도 그렇습니다. 뒷골목 불량 소녀였지만 정체불명의 정보기관에 납치되어 전문 킬러로 양성된 '니키타'(안느 빠릴로드)는 혹독한 훈련 후 인간병기가 되어 돌아오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죄의식에 흔들리게 됩니다. 뤽 베송 감독은 킬러와 사랑이라는 서로 배치되는 소재를 '니키타'라는 여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융합해놓습니다.

[니키타]가 감정에 의해 흔들리는 여성 킬러의 모습을 담았다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킬 빌]에서 감정을 통해 더욱 강인해지는 여성 킬러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행복한 결혼식을 앞둔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는 의문의 조직에 의해 신랑과 하객들이 모두 처참하게 살해됩니다. 더 브라이드 역시 그날의 습격으로 코마 상태에 빠졌지만 5년만에 깨어나 처절한 복수를 완성해나갑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가장 행복해야할 결혼식이 피로 물드는 광경을 통해 더 브라이드의 분노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복수에 동참하도록 유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성 킬러가 나오는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조 라이트 감독, 시얼샤 로넌 주연의 [한나]였습니다. 전직 CIA출신의 아버지 에릭(에릭 바나)에 의해 살인 병기로 키워진 한나(시얼샤 로넌)가 극비리에 진행된 위험한 임무를 위해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백지처럼 순수했던 '한나'가 세상으로 나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여러 감정들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 과정이 굉장히 인상깊었던 영화입니다.

 

 

 

숙희는 여성 킬러 영화의 집대성

 

제가 [악녀]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정병길 감독의 명성 그대로 어마무시했던 매력적인 액션의 향연 덕분입니다. 하지만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 전체를 액션으로만 채워넣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결국 관객이 [악녀]를 재미있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여성 킬러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선을 잘 살려내야합니다. 그런 면에서 [악녀]는 숙희의 감정 변화를 통해 영화의 풍부한 내러티브를 완성하는 능수능란함을 보여줍니다.

자! 그렇다면 숙희가 킬러가 되어야만 했던 사연들을 하나씩 들춰보겠습니다. 연변에서 아버지(박철민)와 나름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숙희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장천(정해균)에 의해 아버지를 잃습니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중상(신하균)의 조직에 들어갑니다. 결국 숙희가 킬러가 되기로 결심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킬 빌]식의 복수입니다. 영화의 인상깊었던 오프닝 액션에서 숙희가 이성을 잃고 혼자 하나의 조직을 박살내는 장면 역시 사랑하는 남편 중상의 복수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숙희의 감정은 복수에 의한 증오에만 있지 않습니다. 중상의 조직에 의해, 그리고 국가 비밀조직에 의해 킬러로 키워진 숙희는 두번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첫번째 사랑은 자신을 킬러로 키워낸 조직의 보스 중상인데, 숙희는 중상과 결혼한다면 복수를 멈추고 평범하게 살 수도 있다는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두번째 사랑은 숙희의 감시를 위해 국가 비밀조직에서 파견한 현수(성준)입니다. 숙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현수. 하지만 현수는 숙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숙희 또한 현수와의 평범한 행복을 꿈꿉니다. 이렇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킬러의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는 숙희의 모습은 [니키타]와 비슷합니다.

 

 

 

숙희의 진짜 모습은 순수함

 

하지만 저는 [악녀]를 보며 [킬 빌]도 아니고, [니키타]도 아닌, [한나]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숙희의 모습에서 백지처럼 순수했던 '한나'의 모습이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숙희는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가녀린 여성에 불과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처음에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중상에게 의지합니다. 하지만 중상마저 죽자 그녀는 더이상 살기를 포기합니다. 영화 오프닝 액션에서 숙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가차없이 상대편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숙희가 자신의 임신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뱃속의 아이를 지켜야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아마 숙희가 현수와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도 어린 딸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딸에겐 아빠가 필요했고, 현수는 자상한 아빠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요. 영화속 숙희의 모든 선택은 순수한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랑,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 그리고 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그러한 순수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사랑을 빼앗긴 후에 숙희는 총을 들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었기에...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나서야 진정한 '악녀'가 되어 처절한 복수를 합니다. 그렇기에 영화 후반의 액션은 이전 액션과 차원이 다릅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사랑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 자들과의 처절한 승부에서 숙희는 더이상 감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저 지키고 싶었던 숙희의 새하얀 순수함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은 후에 시뻘건 피로 물들어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섬뜩했던 숙희의 모습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결함은 중상의 감정에 있다. (스포 포함)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숙희를 킬러로 훈련시키고, 숙희의 첫사랑이 되어 첫번째 남편이 된 중상의 캐릭터가 마지막에 가서 모호했습니다. 중상은 장천의 사주를 받고 숙희의 아버지를 죽인 진범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뒤늦게 안 중상은 숙희를 이용해서 상대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거짓으로 죽음을 꾸밉니다. 사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숙희와 함께 한다는 것은 중상에게도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숙희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숙희의 총구는 중상에게 향할 수도 있기에 중상으로써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서는 숙희를 이용한 후 제거하는 편을 선택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중상의 선택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 숙희가 살아있음을 알게된 중상은 숙희를 제거하는 대신  현수와 숙희의 어린 딸을 죽임으로써 오히려 숙희의 분노에 부채질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중상이 숙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자신과 숙희 사이에 태어난 딸에 관심이 없었다면 숙희를 먼저 제거하고 현수와 딸을 죽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행동함으로써 숙희의 분노의 의한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마치 숙희에게 죽임을 당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중상의 뜬금없는 감정이 [악녀]에서 가장 헐거웠던 부분입니다.

비록 중상으로 인하여 영화 후반부 숙희와 중상의 대결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녀]는 김옥빈의 재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영화입니다. 물론 그녀는 이미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통해 예전에 제가 알고 있던 김옥빈이 아니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었지만 [박쥐]는 2009년 영화입니다. [박쥐]이후 김옥빈은 눈에 띄는 연기변신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박쥐]에서의 파격도 점점 잊혀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악녀]를 통해 8년만에 그녀가 또다시 한건해냈네요. 

 

여성이 킬러인 영화의 장점은

여성의 순수함, 아름다움과 킬러라는 배치되는 이미지의 융합이다.

그런 면에서 김옥빈은 그녀의 다른 그 어떤 영화보다 아름다웠고, 위험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