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윤철
주연 : 이정재, 여진구, 김무열
개봉 : 2017년 5월 31일
관람 : 2017년 6월 6일
등급 : 15세 관람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도 아들은 아빠를 닮아간다.
가끔 저는 영화를 고르는데 있어서 영화에 대한 기대도보다는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확률을 바탕으로 선택하기도합니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영화와 B라는 영화가 있는데, 개인적인 기대도는 A가 휠씬 높지만, A가 흥행에 성공중이고, 그에비해 B의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아 조만간 극장에서 내려질 것 같으면, A의 관람을 뒤로 미루고 B를 먼저 관람하는 것입니다. 흥행에 성공중인 A는 나중에라도 볼 수 있지만 흥행에 실패한 B는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극장에서 놓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6월 6일 현충일을 앞두고 [대립군]과 [미이라] 중 한 편을 예매해야하는 상황에 있어서도 그러한 선택이 적용되었습니다.
[미이라]는 개봉 전부터 압도적인 예매점유율로 1위에 오르는 등 흥행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반면 [대립군]은 [원더우먼], [미이라]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 틈에서 고전 중에 있습니다. 아마도 [악녀]가 개봉하는 이번 주말쯤이면 스크린을 상당 부분 빼앗기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미이라]보다는 [대립군]을 먼저 극장에서 챙겨봐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현충일의 극장 나들이는 저 혼자가 아닌 웅이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웅이 입장에서도 [대립군]보다 [미이라]가 기대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웅이가 당연히 [미이라]를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웅이는 제게 [대립군]의 흥행이 어떠냐고 묻더니 [대립군]의 흥행이 좋지 않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미이라]가 아닌 [대립군]을 선택했습니다. 웅이가 [대립군]을 선택한 이유는 [미이라]는 주말에 볼 수 있지만 [대립군]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가 제 아들 아니랄까봐 어쩜 이렇게도 영화를 고르는 기준까지도 저와 닮았는지... [대립군]을 보기 위해 웅이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향하며 괜시리 뿌듯했습니다.
남들을 대신하여 군역을 대신 해야하는 사람들
영화의 제목인 '대립군'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의 군역을 대신 해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깟 돈 몇 푼때문에 목숨을 걸고 외적과 싸워야하는 군역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인 만큼 당연히 '대립군'은 최하 빈곤층인 천민들로 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라 할 수 있는 '대립군'이 세자인 광해군(여진구)을 호위해야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대립군'과 광해군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간격이 크지만, 함께 고난을 겪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동질감이 생겨납니다.
사실 광해군은 세자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돈을 받고 군역을 대신하는 '대립군'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처지입니다. 임진왜란을 발발하자 선조는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치기에 바빴고, 그러한 와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대신 왜군과 싸우게끔 했습니다. 다시말해 광해군은 선조가 왕으로써 해야할 의무를 대신 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비록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의 의무를 대신해야하는 것은 '대립군'도, 광해군도 같았던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했던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방위로 군복무를 했는데, 아무리 방위라고해도 군부대에 가서 1년에 한번 유격 훈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신병이던 시절 고참이 자신이 받아야할 유격 훈련에 저를 대신 보낸 것입니다. 남들은 유격훈련을 1년에 한번 받았지만, 저는 제가 받아야할 유격훈련과 고참이 받아야할 유격훈련까지 두번을 연달아 받았습니다. 당연히 너무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고참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었습니다. [대립군]을 보는 내내 그때의 억울했던 심정이 생각났습니다. '대립군'은, 그리고 광해군은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하지만 억울하다고 푸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는 말입니다.
리더의 조건
[대립군]은 나약하기만 했던 광해군이 진정한 리더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화 초반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으라는 선조의 명령에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의병을 모으기 위해 강계로 떠날 때도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정체불명의 자객 습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자신의 목숨보다 책이 더 중요하다며 자신을 구해준 토우(이정재)의 뺨을 때리며 영화를 보던 저를 울컥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객을 피해 험한 산길을 선택한 후에도 광해군은 가마에 올라타 행군을 더디게 만드는 만행까지 저지릅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대립군'의 리더 토우의 도움을 받으며 점점 진정한 조선의 리더가 되어갑니다. 전쟁의 두려움과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자괴감,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기력함을 극복해냅니다. 처음엔 자결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임진왜란으로 어려움에 처한 조선의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임을 광해군은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광해군이 진정한 리더로 성장하는 과정이 [대립군]의 가장 큰 영화적 재미입니다.
지난 겨울 우리는 대한민국의 리더인 대통령의 무능력을 목격했고, 모두 함께 분노했었습니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던 제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가 분노를 표출했을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대립군]이 담아낸 진정한 리더란 무엇일까요? 자신보다는 국민을 더 사랑하는 애민정신은 기본이며,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과 함께 극복하며 결코 도망치지 않는 용기, 그리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 리더쉽이 있어야 합니다. 영화 후반에 광해군을 돕기 위해 전국의 의병들이 강계산성에 모이는 장면은 진정한 리더에 목말라 있던 제게 속시원한 쾌감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은 왜 폐위되었을까?
[대립군]을 보고나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폐위된 왕이 두 명이 있었는데 한명은 광해군이고, 또 한명은 연산군입니다. 연산군은 워낙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광적인 행보를 선보임으로써 폭군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광해군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폐위가 된 것일까요? 광해군은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친 선조를 대신하여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라도, 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을 돌보는 등 국가 안위을 위해 노력하였다고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자신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합니다. 참 너무했죠? 결국 광해군은 갈등 끝에 왕위에 오르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삼았고,(영창대군은 며칠 후 살해당합니다.)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유폐시켰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망해가는 명나라와 신흥 강국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자,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했다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었습니다. [대립군]에서도 선조는 광해군을 사지로 내몰고, 그것도 모자라 자객을 보내 광해군을 죽이려합니다. 선조의 실제 행적을 본다면 이러한 영화적 설정이 과장된 것은 아닌 셈입니다.
만약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아 중국에 대한 사대 외교를 근절하고, 후금과의 중립 외교를 유지했다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금을 배척하고 명과 친하게 지내는 '배금친명' 정책을 취했고,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은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켜 임진왜란으로 고초를 겪은 백성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의 귤욕을 당하며 항복하고 맙니다. 이래서 한 나라의 리더는 정말 중요합니다.
교룡기의 용이 두 마리인 이유
광해군이 분조 일행을 이끌고 강계로 향하는 동안 호위 무사인 양사(배수빈)는 교룡기를 목숨보다 귀하게 가슴에 품고 보관합니다. 그러다 결국 죽음을 당하며 토우에게 교룡기를 전해줍니다. 교룡기는 왕의 깃발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교룡기에는 왕을 뜻하는 용이 두 마리가 그려져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저는 분조를 통해 선조와 광해군, 이렇게 조선의 두 명의 왕이 있으니 그것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대립군'인 조승(박원상)과 왕춘(한재영)은 두 마리의 용이 암컷과 숫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내기도합니다. 하지만 정답은 하나는 왕이요, 다른 한마리의 용은 백성을 뜻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백성이 없이는 왕 또한 없습니다. 현대의 국제법에서 국가는 영토, 국민, 확립된 통치조직을 갖추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넓은 영토와 강한 리더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이 없다면 그것은 국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 없이는 조선 또한 없습니다. 그렇기에 왕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합니다. 나 살자고 백성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왕은 애초부터 왕의 자격이 없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립군]은 참 의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비록 토우가 바랬던 것과는 달리 광해군은 성군이 되지 못하고 폐위되지만, 광해군이 진정한 군주로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리더의 조건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미이라]를 잠시 뒤로 미루고 [대립군]을 선택한 웅이도 이 영화를 통해 제가 느낀 것들을 함께 느꼈기를 바랄 뿐입니다.
비록 광해군은 폐위되었지만, 역사는 그를 재평가하고 있다.
비록 인조는 반정에 성공했지만
삼전도에서의 항복은 조선 시대 최대 굴욕으로 기록되고 있다.
진정한 리더는 이렇게 역사가 기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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