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가이 리치
주연 : 찰리 허냄, 주드 로, 에릭 바나, 아스트리드 베흐제 프리스베
개봉 : 2017년 5월 17일
관람 : 2017년 5월 27일
등급 : 12세 관람가
온 가족이 일심동체
지난 주 토요일, 저희 가족은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저는 두 건의 결혼식에 참가해야 했고, 구피는 웅이의 학교 행사에 강제 징집(?)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후 2시에 대방동에서 첫번째 결혼식에 참가하고, 5시에 청담동에서 두번째 결혼식에 참가한 후에 회사 동료의 차를 얻어타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 집에 도착해보니 구피도 지쳐 쓰러져있더군요. 하지만 저희 가족의 토요일 일정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밤 9시 40분에 [킹 아서 : 제왕의 검]을 보기위해 예매를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킹 아서 : 제왕의 검]은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서는 저희 가족의 기대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주말에는 파주에 새보금자리를 잡은 누나의 집들이를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와야해서 [킹 아서 : 제왕의 검]을 보러 갈 수 없습니다. 집들이가 끝난 후 집에 도착하고나서는 체력이 완전 방전되어서 영화보러 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거든요. 그래서 다음주로 관람을 미뤘는데, 문제는 [킹 아서 : 제왕의 검]이 국내 흥행에 실패하며 상영하는 극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나중에 다운로드로 편하게 집에서 봐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킹 아서 : 제왕의 검]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웅이와 구피는 꼭 극장에서 보고 싶다며 애달픈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극장까지 샅샅이 확인한 후에야 토요일 밤 9시 40분에 상영하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예매를 했으니 아무리 피곤해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섰습니다. [킹 아서 : 제왕의 검]을 보기 위해...
구피와 웅이가 이 영화에 실망한 이유
이렇게 개봉 2주만에 어렵게 본 [킹 아서 : 제왕의 검]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재미있었지만, 구피와 웅이는 실망스러웠다고 평가를 했습니다. 구피가 이 영화에 실망했던 이유는 어이없게도 뱀이 나오기 때문이라고합니다. 사실 구피의 뱀공포증은 심각한 편입니다. TV에서도 뱀이 나오면 비명을 지르며 TV 채널을 돌려버리고, 뱀과 비슷하게 생겼다며 장어구이를 먹지 못할 정도이기에 [킹 아서 : 제왕의 검]에서 꽤 빈번하게 등장했던 뱀이 구피에겐 곤욕이었던 것입니다. 구피는 뱀이 나오는 장면마다 눈을 질끈 감아버려서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구피가 조금은 어이없는 이유로 [킹 아서 : 제왕의 검]에 실망했다면 웅이가 실망한 이유는 좀 더 구채적입니다. 웅이는 가이 리치 감독의 편집 기법이 너무 정신없었고, 또 너무 빈번하게 등장해서 싫었다고 하네요. 웅이가 지적한 가이 리치 감독의 편집 기법은 아버지(에릭 바나)가 죽은 후 거리에서 성장한 아서(찰리 허냄)의 이야기를 짧게 보여주는 장면과 아서가 행패를 부린 바이킹족을 혼낸 것을 관료에게 설명하는 장면, 그리고 아서가 어둠의 땅에 홀로 가는 장면 등등에서 사용된 것으로 강렬한 음악과 빠른 편집으로 해당 장면을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가이 리치 감독의 주특기입니다. 영국 출신인 가이 리치 감독은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로 혜성과 같이 등장해 세계 영화계에 주목을 받았고, 브래드 피트, 베니치오 델 토로, 제이슨 스타뎀 등을 캐스팅한 [스내치]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스타 감독으로 발돋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돈나와의 결혼과 더불어 마돈나 주연의 [스웹트 어웨이]를 연출하며 한순간에 추락하고맙니다. 다행히 [셜록 홈즈]를 통해 어느정도 명성을 회복했지만... 암튼 [킹 아서 : 제왕의 검]에서 보여줬던 웅이의 말대로한다면 정신없는 편집기법은 그의 초창기 영화에서 주로 사용했던 것들입니다.
내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이유
웅이가 가이 리치 감독의 스타일 때문에 [킹 아서 : 제왕의 검]이 실망스러웠다면 그와는 반대로 저는 가이 리치 감독의 스타일 덕분에 [킹 아서 : 제왕의 검]이 재미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킹 아서 : 제왕의 검]을 보는데 앞서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아서왕의 전설은 누구나 잘 아는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어렸을 적에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원탁의 기사>를 즐겨 봤고, [카멜롯의 전설], [엑스칼리버], [킹 아더] 등 아서왕의 전설을 다룬 영화가 이미 수편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킹 아서 : 제왕의 검]은 익숙한 이야기를 다룬 밋밋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이 리치 감독은 아서왕의 전설을 판타지로 각색하며 누구나 아는 이야기에 변형을 시도했습니다. 사실 아서왕 전설의 기본적인 골격은 바위에 꽂혀 있는 성검 엑스칼리버를 뽑아 젊은 브리검의 왕으로 추대되어 침입해오는 색슨족을 쳐부수었다는 켈트족의 영웅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사만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원탁과 그러한 원탁을 차지한 '원탁의 기사' 이야기가 삽입되었고 중세 유렵을 대표하는 왕의 일대서사시로 발전했다고합니다. 가이 리치 감독은 이러한 아서왕의 전설을 판타지의 세계관으로 변형시킨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판타지로 세계관을 변형시켜도 기본적인 내용을 바꿀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아서왕은 바위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뽑아 영웅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이러한 부분에 가이 리치 감독 특유의 빠른 편집이 끼어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로 범죄영화에서 발휘되었던 가이 리치 감독의 편집 기법과 전통적인 전설이 만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한 독특한 분위기를 웅이는 싫어했지만 가이 리치 감독의 초창기 영화들을 좋아했던 제 입장에서는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재미있는 부분은 시작도 안되었다.
만약 [킹 아서 : 제왕의 검]에 가이 리치 감독의 빠른 편집이 없었다면 오히려 저는 이 영화가 너무 평범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전체작인 스토리 라인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삼촌인 보티건(주드 로)의 배신으로 거리에서 살아야 했던 아서가 엑스칼리버를 뽑음으로써 폭군 보티건을 몰아낼 영웅이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서는 마법사 기네비어(아스트리드 베흐제 프리스베)의 도움을 받아 엑스칼리버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각성합니다. 이러한 스토리 라인은 전설적인 영웅을 소재로한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킹 아서 : 제왕의 검]은 가이 리치 감독의 스타일만 돋보이는 너무 뻔한 판타지 영화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 한편만 놓고 본다면 말이죠. 하지만 [킹 아서 : 제왕의 검]은 시리즈로 기획되었습니다. 영화 말미에 아서왕의 전설에서 엑스칼리버와 함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원탁이 등장하며 속편을 예고하기도합니다.
게다가 '원탁의 기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랜슬롯도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카멜롯의 전설]에서 리차드 기어가 연기했던 랜슬롯은 아서 왕이 총애하던 기사였지만 왕비인 기네비어([킹 아서 : 제왕의 검]에서는 마법사로 등장)와 사랑에 빠지며 왕국을 파멸로 이끄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아서 왕의 아들인 모드레드도 아직 언급전입니다. 모드레드는 아버지인 아서 왕을 배반하고 악당이 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젠 마법사의 대명사가 된 멀린은 이 영화에서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킹 아서 : 제왕의 검]의 마지막에 원탁이 등장함으로써 앞으로 더 재미있는 부분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과시합니다.
문제는 속편이 제작될 수 있느냐이다.
하지만 [킹 아서 : 제왕의 검]의 속편이 수월하게 제작될런지는 의문입니다. 흥행성이 남아 있다면 완결된 이야기도 어떻게든 되살리는 것이 할리우드의 속성이지만, 흥행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영화도 별다른 설명없이 끝내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킹 아서 : 제왕의 검]은 지난 5월 12일 북미에서 개봉했지만 개봉 첫주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는 물론 저예산 코미디 [스내치드]에까지 밀리는 수모를 당하며 3위에 랭크되었습니다. 이후 반등없이 현재까지 3천3백만 달러가 북미흥행 성적입니다. 순수제작비가 1억7천5백만 달러임을 감안한다면 최악의 성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킹 아서 : 제왕의 검]이 속편을 제작하려면 해외 박스오피스에서 선전을 펼쳐야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해외 박스오피스에서 8천5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북미 흥행성적보다는 나은 성적을 기록 중이지만 이 정도로는 안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 첫주 [겟 아웃],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에 밀려 3위를 기록했고, 현재까지 40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치며 북미와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흥행 실패작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아쉽지만 가이 리치 감독 스타일로 재탄생된 테크노 판타지 스타일의 아서왕의 전설은 이 영화가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해보였습니다. 아서왕의 영웅탄생을 담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는 뒤로 미뤘지만 결국 재미있는 이야기는 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셈입니다. 아! 가이 리치 감독의 스타일로 재탄생한 랜슬롯과 멀린, 그리고 보티건을 뛰어넘는 악당이 될 것이 분명한 모드레드를 보고 싶었는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네요. 이것이 영화산업의 냉혹한 단면이니 말입니다.
시리즈로 제작된다면 분명 더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겠지만
시리즈 제작이 무산된다고해도 가이 리치 스타일의 아서왕 전설은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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