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데오도르 멜피
주연 : 타라지 P. 헨슨, 옥타비아 스펜서, 자넬 모네, 케빈 코스트너, 커스틴 던스트
개봉 : 2017년 3월 23일
관람 : 2017년 3월 25일
등급 : 12세 관람가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것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진 문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가정에는 그 가정만의 문화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문화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수됩니다. 이렇게 가정 문화를 보고 몸에 익힌 아이들은 학교에서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며 성장하고, 학교 문화를 통해 지식을 쌓은 청소년들은 사회에 나와서 기업이 가지고 있는 기업 문화를 접하며 어른이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업 문화도 결국은 대한민국 문화에 귀속되어 있고, 대한민국 문화는 인류 문화의 범주 안에 속해있습니다. 이렇게 점점 거대한 집단으로 나아갈수록 집단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더욱 단단해지고, 그 문화를 깨는 것은 금기시되곤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되고 거대한 문화라고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바뀌어야할 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문화가 바뀌기 위해서는 누군가 최초가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문화를 바꾸고 최초가 된 사람들은 오래되고 단단한 문화를 깨는 과정에서 힘든 역경을 겪기도 하지만, 성공한다음에는 최초로 문화를 바꾸고 무엇인가를 이룬 것에 대한 명예를 얻게됩니다. [히든 피겨스]는 최초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히든 피겨스]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입니다. 당시만하더라도 흑인은 백인에 의해 차별을 받아야했고, 그 중에서도 흑인 여성의 인권은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습니다. 하지만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미국의 문화를 뒤집고 스스로 최초가 됩니다.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헨슨)은 흑인 여성 최초로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고, 미국 최초 우주 궤도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수학공식을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습니다.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은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책임자가 되었고, 메리 잭슨(자넬 모네)는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되었습니다.
최초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히든 피겨스]는 어렸을 적부터 수학에 천재적인 능력을 선보였던 캐서린의 어린시절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NASA의 직원이된 캐서린의 모습은 임시직 계산원으로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겪어야만했습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의 치열한 우주개발경쟁이 없었다면 캐서린의 천재성은 그렇게 NASA의 외진 지하 사무실에서 썩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련과의 우주개발경쟁에서 뒤쳐진 미국의 다급함 덕분에 캐서린의 천재성은 주목을 받게됩니다.
계산원이 필요했던 NASA 우주프로젝트 그룹 수장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의 요청으로 팀에 합류한 캐서린은 온갖 차별을 견뎌내야했습니다. 백인 여성 화장실과 유색인종 여성 화장실이 따라 있기에 화장실에 가려면 몇백미터를 걸어야했고, 캐서린과 커피 포트를 같이 쓰기 꺼려하는 동료들 때문에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눈치를 봐야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묵묵히 차별을 견뎌냈고,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알에게 능력을 인정받습니다.
흑인 최초의 여성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메리는 백인들만 입학 가능한 고등학교 수업 이수를 위해 법원에 입학을 허가해달라고 청원을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으며, NASA의 IBM 컴퓨터 도입으로 일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도로시는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움으로써 여성 책임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녀들은 모두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자신이 당해야했던 차별에 당당하게 맞섰고, 결국 차별을 이겨내고 최초가 됨으로써 NASA의 문화를 바꾸어냈습니다.
변화의 시기를 맞이한 그녀들의 대처
사실 그녀들이 NASA의 문화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의 시대적 상황 또한 주효했습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치열하게 우주개발경쟁을 하지 않았다면 캐서린이 아무리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녀를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원래 변화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고, 당시 상황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흑인여성 자체가 변화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련과의 우주개발경쟁에서 이겨야한다는 절박함이 자연스럽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위해 캐서린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변화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NASA 최초의 흑인 엔지니어가 된 메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법정에서 판사에게 최초가 된다는 것의 중요함을 역설하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깊었는데, 우리는 모두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이끈 인물로 기억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기도합니다. 특히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한 욕망이 강합니다. 매리는 그러한 판사의 욕망을 적절하게 건드림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아냅니다.
도로시의 경우는 더욱 극적입니다. IBM 컴퓨터 도입은 NASA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계산원들은 자신의 일을 커다란 기계가 하게될 것이라는 점을 불안해했지만, 도로시는 오히려 이것이 기회임을 깨닫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익힘과 동시에 다른 흑인 여성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될 것을 장려합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변화로 인하여 자신의 처지가 바뀌게될 것임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화는 기회이기도합니다. 도로시처럼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고 준비한다면 변화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잔잔하지만 유쾌하게 그려낸 그녀들의 반란
흑인차별을 소재로한 영화들은 분위기가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흑인들이 당하는 차별이 처절할수록 흑인차별이라는 영화의 주제가 관객에게 잘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11년에 개봉한 [헬프]에서 그러한 편견은 깨졌습니다. 1960년대 미국 남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흑인 가정부와 백인 주인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헬프]는 비록 백인여성인 스키터(엠마 스톤)가 주인공이지만, 그녀가 흑인 가정부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을 발칵 뒤집을 유쾌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히든 피겨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영화를 좀 더 극적으로 꾸미려면 캐서린, 도로시, 메리가 당하는 차별이 좀 더 자극적으로 그려져야했습니다. 하지만 [히든 피겨스]는 그러한 방법 대신 흑인 여성들의 유쾌한 반란을 내세웠습니다. 캐서린의 우주프로젝트그룹 동료들과 여성 감독관인 비비안 미첼(커스틴 던스트)이 조금 얄밉지만 그 뿐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동안의 문화에 맞게 행동한 것 뿐입니다. 당시로서는 흑인차별이 미국 사회의 문화였고, 그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캐서린, 도로시, 메리는 결코 깨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문화를 깨뜨려버립니다. "믿지 못하겠지만 당신에게 악감정은 없어요."라고 털어놓는 비비안에게 도로시는 "잘 알아요. 당신네들은 그렇다고 생각하겠죠."라고 대답합니다. 그러한 도로시의 한마디는 당시 흑인차별을 당연시했던 미국 문화에 대한 당찬 한방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속이 정말 많이 후련했답니다.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을까?
[히든 피겨스]는 제89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여우조연상(옥타비아 스펜서), 각색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작품상은 [문라이트]가, 여우조연상은 [펜스]의 비올라 데이비스가, 각색상은 [문라이트]가 수상함으로써 단 한개의 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조금 아쉬운 결과이지만 저는 그래도 이 영화가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카데미는 백인들의 잔치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오명이 아닌 사실입니다. 언제나 보수 논란에 휩싸였던 아카데미는 유독 유색인종에게 인색했고, 2016년에는 더욱 심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아카데미는 그러한 오명을 딛고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에서는 흑인 영화와 흑인 영화인들이 많이 노미네이트되었고, 흑인 소년의 성정체성을 담은 영화 [문라이트]가 작품상이 유력했던 [라라랜드]를 제치고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히든 피겨스]의 NASA처럼 아카데미도 지금까지의 문화를 바꾸는 변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 덕분에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인류를 달에 보냈듯이, 아카데미도 보수 논란을 벗고 전세계 영화인들의 축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히든 피겨스]를 보고나니 과연 나는 변화를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당당하게 변화를 받아들였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이 찾는 책이 없어 백인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야했던 도로시에게 "그냥 그러려니했어야지."라고 꾸짖던 백인 여성처럼, 저는 변화를 필요로 했던 케케묵은 문화에 그냥 그러려니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변화를 당당하게 받아들일 용기가 있을까?
오랜 문화라는 방패속에 숨어 변화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을까?
시시각각 변해가는 세상속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녀들의 용기가 존경스러웠다.
'영화이야기 > 2017년 영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 - 고스트는 단순화시키고, 껍데기는 화려해졌다. (0) | 2017.03.31 |
---|---|
[프리즌] - 우리가 사는 곳은 교도소보다 나은 곳이기를... (0) | 2017.03.30 |
[미녀와 야수] - 애니메이션보다 더 아름다운 실사영화의 마술 (0) | 2017.03.21 |
[스페이스 비트윈 어스] - 과다행복증으로 안내하는 화성소년의 순수함 (0) | 2017.03.20 |
[콩 : 스컬 아일랜드] - 영화를 보며 재미를, 쿠키영상을 보며 환희를 느끼다. (0) | 2017.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