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한동욱
주연 : 황정민, 한혜진, 남일우, 곽도원, 정만식, 김혜은, 강민아
개봉 : 2014년 1월 22일
관람 : 2014년 2월 1일
등급 : 15세 관람가
나희님과의 영화 데이트
일본에 살고 계신 제 오랜 블로그 친구이신 나희님이 설날을 맞이하여 한국에 오셨습니다. 나희님이 한국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나희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바로 영화 보여주기입니다.
나희님에게 입버릇처럼 한국오시면 영화보여주겠다고 했었고, 지난 2012년 3월 7일에는 실제로 [러브픽션]을 함께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나희님과 [러브픽션]을 함께 본 것이 어느새 2년 가까이 되었군요.
[변호인]도 보고 싶고, [수상한 그녀]도 보고 싶다는 나희님.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는 그들 영화를 모두 본 것을... 그래서 저는 [조선미녀삼총사]를 추천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오셨기에 한국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었고, [조선미녀삼총사]가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개봉한 최신 한국영화이기 때문이죠.(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볼 계획이 있는 영화중에서 아직 안본 영화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나희님은 "재미없을 것 같아요."라며 단번에 거부하셨습니다.(하지원 지못미) 그래서 고르고 고르다보니 결국 1월 22일에 개봉한 한국영화 삼총사(수상한 그녀, 피끓는 청춘, 남자가 사랑할 때)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못본 영화인 [남자가 사랑할 때]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미 [신세계]를 재미있게 봤다는 나희님은 "황정민 주연의 영화라면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무한 신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설날 다음날인 지난 2월 1일, 나희님과 [남자가 사랑할 때]를 봤답니다. 그리고 과연 황정민에 대한 나희님의 무한 신뢰가 옳았음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사실 저는 [남자가 사랑할 때]의 스토리 라인이 너무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건달같은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첫눈에 사랑을 느끼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다가 슬픈 결말을 맞이하는... 이런 식의 건달 순정 영화는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영화의 전개가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그렇기에 저는 [남자가 사랑할 때]의 기대도를 낮추었고, 그저 나희님이 기대하신대로 '연기의 신' 황정민의 연기를 감상하는데 만족하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할 때]는 제가 예상했던 대로 영화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건달인 태일(황정민)이 채무관계에 있는 호정(한혜진)에게 한눈에 반하고, 그녀를 위해 조직을 나오려고 하는 것까지 얼추 제가 예상했던대로였지만, 그 이후에는 전혀 제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화가 흘러갔습니다. 그러한 예상 밖의 스토리 전개가 있었기에 저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만족하며 볼 수 있었습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를 소개하는 포털 사이트에서 영화의 줄거리가 거의 생략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의 관계자들 역시 그러한 영화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렇기에 [남자가 사랑할 때]를 보려고 마음 먹으신 분들이라면 영화의 줄거리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제 글을 피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쁜 남자 태일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라!
앞서 이야기했듯이 [남자가 사랑할 때]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스토리 라인을 가졌습니다. 남자 주인공인 태일은 형의 집에 얹혀사는 대책없는 남자입니다. 직업은 사채 추심업자. 그가 건강원에서 휘발유를 마시며 사장에게 돈을 받아내는 영화 초반의 장면은 '태일은 나쁜 남자이다.'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식시킵니다.
그런 그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상대는 채무자의 딸 호정. 사채를 쓰고 갚지 못한채 의식불명에 빠진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하는 호정. 그런 호정을 태일은 막무가내로 찾아가 돈을 기일 내에 갚지 못할 경우 신체를 포기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각서를 받아냅니다. 하지만 호정을 바라보는 태일의 눈빛이 심상치 않습니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 인정사정없던 나쁜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난생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에 어쩔줄 모르는 사춘기 소년의 순수하지만 어설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태일이 호정의 주변을 어슬렁거린다고해서 호정이 태일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여줄리가 없습니다. 그는 사채 추심업자이고, 돈을 받아내기 위해 호정 아버지의 생명유지 장치를 억지로 빼내려 했던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영화 초반의 재미 여부는 과연 호정이, 그리고 관객이 얼마나 나쁜 남자인 태일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는 어찌되었건 사랑 영화이기 때문에 태일에 대한 호정의 감정 변화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는 바로 그러한 첫번째 포커스를 제대로 잡아냅니다. 태일은 호정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가 진 빚을 탕감해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웁니다. 그것은 태일이 호정에게 내세울 수 있는 최대의 무기이고, 호정의 최대 약점이기도 합니다.
사실 태일이 그러한 무기를 내민 것은 호정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그는 또다른 젊은 여성 채무자에게 이자 대신 섹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호정은 다릅니다. 그녀는 태일의 제안을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태일의 제안에 호정은 같이 밥먹고, 같이 걷고, 대화하는 것으로 태일과의 관계를 제한합니다.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것은 태일을 대하는 호정의 태도 변화입니다. 처음에 호정은 태일을 마치 벌레보듯이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마주 앉았지만, 그녀는 밥 한숟가락 뜨지 못하고 역겨운 표정으로 태일을 외면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랬던 그녀가 점차 태일의 본 모습을 알게 되면서 그와 식사를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되고, 결국 그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게됩니다.
그렇다면 관객은? 태일이 여전히 관객 입장에서 나쁜 남자라면 호정의 그러한 태도 변화가 마음에 와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호정이 태일에게 마음의 문을 열듯이 관객 역시 태일이라는 캐릭터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은 태일의 가족들입니다.
동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형, 영일(곽도원). 그리고 형수 미영(김혜은)과 태일의 조카 송지(강민아)까지... 얼핏보면 콩가루 집안처럼 보이는 태일과 가족들의 끈끈한 관계는 관객이 태일이라는 캐릭터에 마음의 문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2년동안 대체 무슨 일이?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남자가 사랑할 때]의 스토리 전개를 예상했던 부분은... 저는 호정과의 사랑을 위해 태일이 사채일을 그만 두려고 할 것이고, 사장인 두철(정만식)이 조직의 일에 손을 떼려고 하는 태일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며, 결국 그로 인하여 태일은 슬픈 운명을 맞이하는... 그런 너무 뻔한 스토리 전개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할 때]는 그런 제 예상을 비웃듯이 갑자기 2년후로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가 버립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스토리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대개 시간을 건너 뛸때는 하나의 스토리 전개가 막을 내리고 제 2막을 전개될 때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태일과 호정에게는 그 어떤 이야기도 끝이 나지 않았기에 새로운 2막을 전개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년 후라니... 마치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2년 후의 태일은 감옥에서 막 출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태일에게 알리지 않고 이사를 가버렸고, 태일의 아버지(남일우)는 치매에 걸려 있었으며, 호정은 태일을 차갑게 외면합니다. 다짜고짜 시간은 2년을 거슬러 올라갔고, 태일 주변의 상황이 너무 급변해있어서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스토리를 전개해나갈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가 제게 만족감을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예상하지 못한 스토리 전개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가 사랑할 때]의 두번째 포커스가 됩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는 사실 시간의 순서대로 영화를 진행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동욱 감독은 이 영화가 그리 특별한 스토리 전개를 가진 영화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관객의 호기심을 환기시킬 수 있는 어떤 영화적 장치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필요성에 따라 느닷없이 2년 후로 시간을 건너뛰는 충격요법이 펼쳐졌고, 그것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며 한동욱 감독의 의도를 충족시킨 것입니다.
한번의 충격요법 이후 [남자가 사랑할 때]는 다시 2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한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태일의 사연을 보여줍니다. 분명 시간의 순서대로 태일의 사연을 주루륵 나열하는 것보다, 2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뛰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시킨 이후, 다시 2년 뒤로 되돌아가 태일의 사연을 보여주니 그만큼 집중력이 높아지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2년을 건너 뛴 것은 꽤 영리한 영화적 정치였습니다.
호기심으로 인하여 관객의 집중력이 높아진만큼 태일의 사연에 대한 관객석의 훌쩍거림도 커졌습니다. 이제부터 한동욱 감독은 분격적으로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진정 하고 싶었던 태일의 이야기를 펼쳐내며 관객의 손수건을 적시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슬픈 것은 기억 때문이다.
태일과 호정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쁜 남자 태일이 호정과의 사랑을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비극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었기 때문입니다.
2년간 감옥에 있었던 태일은 출소하자마자 매일 싸웠지만 또 그만큼 사랑했던 가족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두철을 찾아가고, 자신 때문에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은 호정의 주위를 맴돕니다. 그는 다가오는 비극을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순탄하지는 않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꾸리던 미영은 태일에게 그만 집에서 나가달라고 통보하고, 두철은 태일의 돈을 넘겨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한번 굳게 닫힌 호정의 마음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태일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쁜 남자의 삶을 살았던 과거를 후회할 뿐입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여기 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역시 황정민의 명불허전 명연기는 눈물이 메마른 남성 관객의 눈시울마저 뜨겁게할만큼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슬픔은 바로 영화가 끝난 다음입니다. 마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이문세의 노래 '기억이란 사랑보다'의 노래가사처럼...
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하고 계신거죠. 흐리던 하늘이 비라도 내리는 날 지나간 시간 거슬러 차라리 오세요.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거죠. 함박눈 하얗게 온 세상 덮이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이렇게 그대가 들리지 않을 말들을 그대가 들었으면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엔딩 크레딧에서 이문세가 부르는 '기억이란 사랑보다'가 흘러나옵니다. 관객들은 모두들 일어서 극장 밖을 나섭니다. 하지만 저는 자꾸만 발걸음이 멈춰졌습니다.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라며 읊조리던 이문세의 노래가 제 발길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옛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 사랑했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 태일의 사랑 역시 호정에게, 그리고 태일의 가족들에게 영원한 기억으로 남아 그들을 눈물짓게 만들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영화를 볼 때는 몰랐던 태일에 대한 기억이, 영화가 끝나고 제 기억속으로 밀려 들어옵니다. 그리고 뒤늦게 제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를 보며 태일에게 대한 기억이 제 가슴 깊숙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남자가 사랑할 때]는 영화를 볼때보다, 영화를 보고나서 태일의 눈물겨운 사랑을 기억 할때 더 슬펐던 영화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그 사람에게 웃음을, 그리고 그리움에 의한 눈물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기억을 남겨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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