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연우
주연 : 박보영, 이종석, 이세영, 김영광
개봉 : 2014년 1월 22일
관람 : 2014년 1월 22일
등급 : 15세 관람가
나의 사춘기 시절은?
사춘기 :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이며, 성호르몬의 분비가 증가하여 이차 성징이 나타나고, 생식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춘정을 느끼에 된다고 합니다. 청년 초기로 보통 15~20세를 이른다고 하네요.
가끔 저는 요즘 아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저 나이때에 저랬나?'라는... 그리고 나의 사춘기 시절은 어땠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씁니다. 사실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소심한 성격 덕분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만한 대단한 일탈을 하지는 않았거든요.
대신 사춘기의 모든 에너지를 같은 학원에 다니던 여자아이를 짝사랑하는데 모두 소비했고, 그녀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대신 상상 속으로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슬픈 사랑을 수도 없이 했으며, 수업시간에는 공부 대신 상상속의 사랑을 소설로 쓰는 작업에 매진하였었습니다. 이렇게 제 사춘기 시절을 다시금 기억해보니 찌질이도 이런 찌질이가 없었네요. ^^;
[피끓는 청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82년 충청도를 뒤흔든 대박 사건이 영화의 소재라고 합니다. 1982년이면 제가 초등학교 3학년때였고, 제 기억 속의 1982년은 프로야구 개막뿐이었지만, [피끓는 청춘]의 주인공인 영숙(박보영), 중길(이종석)의 이야기는 왠지 제게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는 80년대 사춘기를 보낸 이들을 위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끓는 청춘]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중길(이종석)과 영숙(박보영).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홍성농고에 진학하며 각자 다른 방식으로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을 맞이합니다.
중길은 홍성농고 전설의 카사노바로 여학생 꼬시기에 여념이 없고, 영숙은 충청도를 접수한 여자 일진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어릴적부터 자신을 챙겨진 중길을 영숙은 좋아하지만, 싸움이라고는 할줄 모르는 중길은 영숙을 피하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소희(이세영)가 전학을 오면서 중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아 버리고, 영숙을 좋아하는 홍성공고의 싸움짱 광식(김영광)은 중길을 향한 영숙의 마음을 알게 된 이후 중길에게 복수를 시도합니다. 결국 중길과 영숙, 그리고 소희와 광식의 사각관계는 크나큰 파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피끓는 청춘]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류승범, 공효진, 임은경이 주연을 맡은 2002년 개봉작 [품행제로]였습니다. [품행제로] 역시 1980년대를 배경으로 싸움짱 중필(류승범)과 중필을 짝사랑하는 오공주파의 여자 일진 나영(공효진), 그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든 이웃 여학교의 퀸카 민희(임은경)의 이야기입니다. 어찌보면 캐릭터 설정, 관계등이 [피끓는 청춘]과 매우 흡사합니다.
[품행제로]를 볼 당시 제 영화 이야기의 제목은 '추억만으로 영화를 만들수는 없다.'였습니다. 저는 [품행제로]의 80년대 추억 여행은 좋았지만 스토리 라인이 부실했다고 투덜거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끓는 청춘}은 어땠을까요?
반항은 사춘기의 힘.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피끓는 청춘]이 꽤 재미있었습니다. 솔직히 [피끓는 청춘]의 배경인 1982년은 제게 아련한 추억 여행을 안겨주기엔 조금 동떨어진 세계였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프로야구 마스코트 스티커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던 코흘리개 꼬마였으니까요.
사실 추억만으로 이야기하자면 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한 [품행제로]의 배경이 제 사춘기 시절과 정확히 맞아 떨어져 영화를 보며 충분히 추억에 잠길 수 있었습니다. 교련 수업, 룰러 스케이트장, 디스코, 포르노 테잎, 국기 게양식 등 [품행제로]의 추억 코드는 제 사춘기 시절을 함께 했던 소품들이거든요. 게다가 영화 속 민희가 쓰고 나온 얼굴을 거의 뒤덮을 정도의 커다란 안경은 당시의 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피끓는 청춘]의 추억 코드는 그 이전 세대의 풍경입니다. [품행제로]와 [피끓는 청춘]을 비교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영화 속에 삽입된 노래들입니다. [품행제로]에서는 김승진의 '스잔'과 박혜성의 '경아'가 등장합니다. 저 역시 '스잔'과 '경아'를 즐겨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피끓는 청춘]에 삽입된 곡들을 보면 김창완의 '개구쟁이',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들고양이의 '마음 약해서' 등입니다. 낯익은 음악들이지만 그 노래들을 즐겨 부른 기억은 없습니다.
이렇게 영화 속의 추억 코드만 놓고 따진다면 [피끓는 청춘]보다 [품행제로]가 개인적으로 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품행제로]는 80년대의 추억이 영화의 거의 전부였지만 [피끓는 청춘]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길의 반항, 패기입니다.
생각해보면 저 역시 사춘기 시절, 은근한 반항아였습니다. 용돈이 생기면 좋아하는 가수의 LP판을 모으는데 모두 소비했었습니다. 그러한 제게 어머니께서 돈을 아껴쓰라고 한마디 하셨는데, 저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 싫었습니다. 바로 가난말입니다.
부모님께서는 공장에서 일하시느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셨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인데, 저는 그 돈으로 당시 유행이었던 미니 카세트를 사고, LP판을 사며 반항한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돈을 아껴쓰라고 하시면 'LP판을 내 맘대로 사지 못할 정도로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해?'라며 버럭 화를 내곤 했었습니다. 결국 제가 LP판에 집착한 것은 사춘기 시절 저희 집의 가난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반항이었습니다.
중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우디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중길의 아버지 대판(권해효).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집을 나갔습니다. 중길은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바람끼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홍성농고의 최고 카사노바로 등극하며 아버지에게 격렬하게 반항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바람끼에 대한 반항으로 최고의 바람둥이가 된 중길. 어쩌면 중길은 이 여자, 저 여자를 꼬시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며 대판에게 '아버지의 바람끼도 저처럼 한심해요.'라고 항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동네 대포집을 운영하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영숙은 싸움짱이 됩니다. 동네 남자들에게 웃음을 팔아야 하는 술집 여자의 딸. 하지만 영숙은 아무도 자신을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싸움짱이 되어 버립니다. 아버지를 닮음으로써 반항을 했던 중길과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반항을 했던 영숙. 그러한 그들의 반항이 제 사춘기 시절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 것입니다.
부러웠던 중길의 패기
[피끓는 청춘]은 영화의 초반 중길과 영숙의 반항으로 웃음을 유발시킵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중길과 영숙, 소희와 광식의 엇갈린 사각관계는 더이상 반항만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갈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광식에 맞선 중길의 패기입니다.
영숙을 사랑하는 광식은 중길이 영숙을 건드렸다고 생각하고 중길이 좋아하는 소희에게 해꼬지를 하여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소희를 사랑하는 중길은 광식이 소희에게 한 짓을 알고 광식과 한판 대결을 준비합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중길은 광식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중길이 아무리 성룡 영화를 따라하며 취권 연습을 해도 싸움을 못하던 중길이 어느날 갑자기 광식을 쓰러트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누구보다도 중길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먹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할 수 있는 일과,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할 수 없는 일을 구분짓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영화부 기자였습니다. 매일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한 프리뷰를 쓰고, 배우와 감독의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는 일. 하지만 저는 영화부 기자가 되기 위해 그다지 큰 노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부 기자는 제게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할 수 없는 일로 인식되었고, 구피와의 결혼을 앞두며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회계 일로 직장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중길은 아닙니다. 그는 광식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광식에게 덤벼듭니다. 어쩌면 아직은 어린 사춘기이기에 그러한 무모함이 허용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중길의 무모함이 참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광식에게 죽도록 얻어터져도 다시 그에게 덤벼들 수 있는 패기.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 제가 잊고 있었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중길의 진정한 사랑 찾기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영숙에 대한 진심을 느끼는 그 순간, 중길은 결코 광식을 이길 수는 없지만, 광식을 향한 패기의 주먹만큼은 결코 놓지 않았고, 그러한 중식의 패기는 결국 사고를 일으킨 것입니다.
영화의 후반부. 통학 기차 안에서 광식과 중길이 마지막 한판 대결을 벌이는 장면에서 저는 나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팍 들어갔습니다. 물론 잘 압니다. 중길은 광식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중길이 광식에게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는 그 순간 제 마음은 목청껏 중길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중길아! 힘내!!!'
[피끓는 청춘]의 영화적 재미는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처음엔 나의 사춘기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소소한 에피소드로 영화를 이끌어 나가다가, 후반부에 가서는 어른이된 제가 잊고 살았던 젊은 시절의 패기를 부러워하며 영화를 지켜보게 만듭니다. '맞아.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피끓는 청춘]을 보며 나도 모르게 그러한 회상에 젖게 됩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젊은 배우들
[피끓는 청춘]은 영화의 제목처럼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피끓는 젊은 배우들로 가득한 영화입니다. 물론 중길의 아버지인 대판역의 권해효, 홍성농고의 선생인 난영과 종팔을 연기한 라미란과 김희원 등 중견 배우들도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지만, 영화에서 그들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종석, 박보영, 이세영, 김영광으로 이어진 젊은 배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책임집니다. 그 중에서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그들의 연기 변신이 [피끓는 청춘]의 재미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관상], [노브레싱]을 통해 진지한 반항아 연기를 보여줬던 이종석은 어깨에 힘을 쭈욱 빼고 기존의 반항아 이미지와 함께 어리숙한 바람둥이 중길 역을 잘 해냈습니다. [노브레싱]을 보고나서 이종석의 이미지가 너무 정형화되는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했는데, 능글맞은 바람둥이 연기를 하는 그를 보니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박보영의 변신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제게 박보영은 귀여운 이미지의 배우로 머물로 있습니다. [과속 스캔들]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현수(차태현)의 집에 느닷없이 닥친 당돌한 십대 미혼모 황정남으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2012년 흥행에 대성공했던 [늑대소년]에서도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몸이 약한 소녀 순이로 출연했었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살벌한 눈빛과 쌍욕으로 여자 일진의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줍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종석과 박보영이 과연 중길과 영숙역에 어울릴까? 생각도 했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다보니 그들의 연기 변신에 흠뻑 빠져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제 기억 속에는 [아홉살 인생]의 새침한 장우림으로 기억되는 이세영과 아직은 낯설지만 그래도 광식의 카리스마를 잘 보여준 김영광까지... 이들 4인방은 앞으로 우리 영화계를 이끌어나갈 신성임이 분명합니다.
[피끓는 청춘]에서 유일하게 제 눈에 거슬렸던 것은 영화 내내 계속 뛰고 있는 한 소녀입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그녀의 인터뷰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는 "그냥 힘이 남아서 뛰는 거예요."라는 답변을 하고 사라집니다.
어쩌면 그것은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이연우 감독은 중길도, 영숙도 그냥 힘이 남아돌아서 반항을 하고, 싸움을 하는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관객에게 전달해야 할까요? 그렇지않아도 영화의 스토리 전개와는 상관없이 운동장을 뛰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생뚱맞게 느껴졌는데,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관객 스스로 음미하며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영화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해버리니 조금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성인이 된 우리 모두 한때 힘이 남아돌아서 반항을 하고 싸움박질을 하던 사춘기 시절이 있었습니다. [피끓는 청춘]을 보며 그때 그 시절의 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힘이 남아돌지 않는 지금은 사회에 순응하고, 혹시나 싸움에 휘말릴까봐 몸을 사리며 살고 있거든요. [피끓는 청춘]은 그런 제게 힘이 남아돌던 그 시절로 추억 여행을 시켜준 영화인 셈입니다.
사춘기 시절, 그저 반항심에 젖어 모든 것이 싫었고, 짜증났다.
그런데 반항심마저 사라진 지금은 그 시절이 그립구나.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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