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아라마키 신지
더빙 : 오구리 슌(류승룡), 사와시로 미유키(서유리), 후루타 아라타(김보성)
개봉 : 2014년 1월 16일
관람 : 2014년 1월 19일
등급 : 12세 관람가
내 유년의 미스터리 로망... 하록 선장
저와 나이가 비슷한 분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했듯이 저 역시 <은하철도 999>를 즐겨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은하철도 999>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은하철도 999'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철이와 철이의 여행을 함께 하는 미스터리 여인 메텔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이 만화라고 하기엔 상당히 암울한 분위기와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묘한 분위기에 끌린 수 많은 어린이들이 TV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국환이 부른 <은하철도 999>의 주제곡을 따라 부르며 열광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에 햇빛이 쏟아지네. 행복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를 불타오르고 엄마잃은 소년의 가슴엔 그리움이 솟아오르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은하철도 999... 어쩜 만화 주제곡의 가사가 이토록 서정적인지. 지금 다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은하철도 999>는 주제곡과 함께 제게 아련한 향수를 안겨주는 그런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은하철도 999>는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가 중의 한명인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입니다. 그는 <우주전함 야마토>, <천년여왕> 등 수 많은 걸작을 완성시키며 70년대 당시 SF 애니메이션의 신기원을 열었던 인물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은 하나의 우주관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마츠모토 레이지의 우주관을 레이지버스라고 합니다. 레이지버스는 마츠모토 레이지의 '레이지'와 우주관을 뜻하는 '유니버스'의 합성어이죠. 그러한 레이지버스에 의하면 <천년여왕>, <은하철도 999>, <우주해적 하록 선장> 순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저는 <은하철도 999>만 재미있게 봤을 뿐, <천년여왕>은 TV 방영 초기에 보다가 말았고, <우주해적 하록 선장>은 아예 TV에서 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기억 속에서 하록 선장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록 선장에 대한 제 아련한 추억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막연히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눈밑에 흉터가 있는, 검은 망토를 두른 우주 해적이라는 것 외에는 하록 선장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캡틴 하록]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추억의 영웅이 돌아왔다."며 제 마음 속은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캡틴 하록]이 상영하는 극장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캡틴 하록]을 극장에서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모든 멀티플렉스 상영시간표를 검색했고, 저희 집에서 차를 몰고 30~40분 가량 가야하는 롯데시네마 신림으로 예매까지 마쳤습니다.
구피는 "이렇게까지해서 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해?"라고 반문하지만 저는 그러한 구피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막연히 [캡틴 하록]을 꼭 봐야겠다는 다짐만 있을 뿐, 왜 이 영화를 봐야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저 또한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록 선장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제 아련한 추억처럼, 저는 이유를 알지 못한채 "[캡틴 하록]은 꼭 극장에서 봐야해."라고 외친 것입니다.
드디어 만난 하록 선장. 그러나...
사실 더빙이 아닌 자막 버전으로 [캡틴 하록]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겐 그러한 선택의 권한이 없었습니다. 자막 버전의 [캡틴 하록]을 보려면 새벽 2시에 극장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어쩔수 없이 더빙 버전의 [캡틴 하록]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스타급 배우인 류승룡과 김보성을 캐스팅한 국내 더빙이 불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전문 성우가 아닌 스타급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것은 영화 홍보에는 좋을지 몰라도 더빙 버전의 완성도에는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극장 좌석에 앉자마자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는 성우의 나래이션이 상당히 제 귀엔 거슬리게 들렸습니다. 마치 "옛날 옛적에..."를 속삭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는데, 젊은 성우가 할아버지 목소리 흉내를 내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처음부터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록 선장의 목소리를 연기한 류승룡의 경우는 워낙 하록 선장이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라 크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하록 선장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야타란의 목소리를 연기한 김보성은 목소리가 너무 튀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김보성의 더빙 연기는 최악이었는데 순정마초를 자처하고 나선 김보성 특유의 목소리가 야타란이라는 캐릭터를 아예 뒤덮어 버렸습니다. 이래서 저는 전문 성우가 아닌 스타 배우를 캐스팅한 더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방대한 원작을 단 2시간 내로 축약한 [캡틴 하록]의 스토리 라인도 쉽게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의 초반 나래이션을 통해 [캡틴 하록]의 설정이 설명됩니다. 우주로 진출하여 수 많은 식민 행성을 개척한 미래의 인류. 그러나 더이상 개척할 행성이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다시 고향인 지구로 돌아오려합니다. 하지만 지구는 그들 모두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지구의 거주권 문제로 처절한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컴홈 전쟁입니다.
서로 죽이고 죽는 잔인한 전쟁 끝에 가이아 위원회가 설립되어 컴홈전쟁을 중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결국 가이아 위원회는 지구를 불가침 성역으로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이아 위원회에 대항한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불멸의 존재 하록 선장입니다.
[캡틴 하록]은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컴홈 전쟁을 끝낸 전쟁 영웅 하록 선장이 왜 우주 해적이 되었는지, 100년이 넘도록 불멸의 존재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하록 선장의 비밀은 무엇인지, 가이아 위원회에 대항하는 하록 선장의 목표는 무엇인지, 그리고 하록 선장을 암살하기 위해 아르카디아호에 탑승한 야마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이 모든 비밀은 각각의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짧은 시간에 이 모든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각각의 매력이 미처 펼쳐지기 전에 간략한 설명과 함께 끝나 버립니다. 뭔가 여운을 느낄 시간적 여유가 사라진 것이죠. 그러니 그저 무미건조하게 복잡한 스토리 라인을 쫓아가기에 급급해졌고, 그것이 [캡틴 하록]의 가장 큰 단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지만 그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스포 포함)
[캡틴 하록]은 아쉬움이 많이 보이는 영화입니다. 특히 복잡한 스토리 라인은 좀 더 다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스토리 라인을 쫓아가기에 급급하도록 만들지 말고, 영화 속의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고, 그들의 슬픈 사연이 밝혀질 때에 그들과 함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줬어야 했습니다.
사실 하록 선장과 야마의 사연은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가슴 찡한 여운을 주기에 충분할만큼 매력적입니다. 특히 저는 야마의 사연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처음엔 지구의 식물을 우주의 다른 행성에서도 꽃피우겠다는 순수한 야망을 가졌던 그는 자신의 실수로 형인 이소라가 부상을 당하고 하반신이 불구가 되자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소라의 명령에 따라 가이아 위원회의 첩자가 되어 아르카디아호에 탑승합니다.
결국 야마가 그러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형에 대한 죄책감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확고한 의지와 사명으로 아르카디아호에 탑승했다면 하록 선장의 암살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형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록 선장의 암살에 뛰어 들었기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지 못했고, 쉽게 마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캡틴 하록]에서 영화를 보던 제 마음을 찡하게 했던 유일한 장면은 야마와 이소라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으며, 이소라의 아내인 나미가 사실은 껍데기만 남은 홀로그램이라는 진실이 밝혀지는 장면입니다. 야마의 실수로 이소라는 다리를 잃었고, 나미는 식물인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결국 이소라는 실체가 없는 홀로그램 상태의 나미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못하고 부여 잡고 있었으며, 야마 역시 죄책감이라는 실체가 없는 감정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마와 이소라는 결코 돌이킬 수 없음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가련한 캐릭터였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 하록 선장의 사연이 소개되면서 야마와 하록이 서로 닮았음이 밝혀집니다. 컴홈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가이아 위원회의 편에 서서 전쟁을 끝낸 전쟁 영웅 하록. 하지만 그는 가이아 위원회에게 배신을 당하게 맙니다. 결국 그로인하여 하록 선장은 지구를 그 누구도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하록 선장에 의해 생명이 살 수없는 불구의 땅이 된 지구. 가이아 위원회는 그러한 진실을 감추기 위해 지구를 불가침 성역으로 선언하고 홀로그램을 통해 푸른 별 지구의 환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홀로그램... 실제처럼 보이지만 실제가 아닌 가짜의 존재를 만드는 것. 이러한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나미와 지구.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사랑하는 나미를 식물인간 상태로 만든 야마와 자신의 실수로 고향인 지구를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으로 황폐화시킨 하록. 이 두사람은 결코 돌이킬 수 없음을 알면서도 미련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록 선장은 야마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아르카디아호의 탑승을 허락합니다. 어쩌면 하록 선장은 야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캡틴 하록]은 자신의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하는 하록 선장의 미련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앞서 설명했듯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복잡하다보니 그러한 하록 선장의 미련에 감정이입을 할 시간적 여유가 관객에겐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향인 지구를 황폐화시켰다는 죄책감. 그러한 지구를 되돌려야 한다는 사명과 미련. 만약 [캡틴 하록]의 스토리 라인이 좀더 여유롭게 진행되었다면 지구가 홀로그램임이 밝혀지고, 하록 선장의 사연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저는 반전에 대한 충격과 마음이 찡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런데 [캡틴 하록]은 그런 결정적인 찡함을 잡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반복되는 순간이 영원이 된다.
[캡틴하록]은 매우 암울한 분위기의 영화입니다. 인류는 우주 곳곳에 흐트져 식민 행성을 개척하며 살고 있지만 고향인 지구를 잃은 인류는 이미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아르카디아호에 영구엔진기관을 선물한 니벨룽족처럼, 인류는 수명을 다하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일한 희망인 하록 선장은 사실 이 모든 것의 원흉입니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하려는 행동은 모든 것을 멸망시켜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려는 것 뿐입니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하록은 결국 미련에 눈이 멀어 잘못된 선택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하록 선장마저 인류를 구원할 방법이 없으니 인류는 서서히 멸망의 길에 들어사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캡틴 하록]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지구엔 꽃이 피기 시작했고, 인류의 희망의 상징으로 야마는 하록의 명성을 물러 받습니다. 이제 인류는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고, 야마는 그러한 인류의 희망을 지켜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 나오는 결정적인 대사가 '반복되는 순간이 영원이 된다.'라는 말입니다. 절망으로 가득한 순간 순간들이 모여 희망에찬 영원이 된다는 [캡틴 하록]의 모든 것을 담아낸 중요한 대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중요한 순간에도 영화적 감흥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캡틴 하록]을 보고나서 저는 실망했습니다. 사실 그래픽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실사를 방불케하는 [캡틴 하록]의 그래픽은 할리우드의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된 [캡틴 하록]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캡틴 하록]을 보며 저는 2001년에 개봉했던 [파이널 판타지]가 떠올랐습니다. 실사보다 더 실사같은 [파이널 판타지]의 영상은 당시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스토리 라인이 부실하다보니 [파이널 판타지]는 충격적인 그래픽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길을 걷고 말았었습니다. [캡틴 하록]도 정확히 그러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영화를 본 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캡틴 하록]에 대한 아련함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우주해적 하록 선장>을 TV에서 본 적도 없으면서 하록 선장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요며칠 저는 도대체 이유가 뭘까? 라는 생각했는데, 드디어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바로 반복되는 순간이 영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록 <우주해적 하록 선장>을 본 적은 없지만 수많은 매체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하록 선장을 만났고, 그러한 반복되는 단편적인 만남이 하록 선장에 대한 영원한 아련한 추억을 만든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추억은 [캡틴 하록]의 스토리적 완성도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아련함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반복되는 순간이 영원이 된다.'라는 [캡틴 하록]의 주제를 함축된 이 짧은 대사가 하록 선장에 대한 저의 모든 미스테리를 푸는 열쇠가 될 줄이야... 이렇게 오늘도 저는 하록 선장에 대한 영원한 로망을 간직하며 [캡틴 하록]의 영화 이야기를 정성껏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비록 영화 자체에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추억의 영웅 하록 선장을 만나고나니 마냥 마음이 설렌다.
이것이 바로 캐릭터의 힘이다.
제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추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심어린 소중한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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