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2년 영화이야기

[부러진 화살] - 이게 재판이냐? 개판이지!

쭈니-1 2012. 1. 20. 13:23

 

 

감독 : 정지영

주연 : 안성기, 박원상, 나영희, 김지호, 문성근

개봉 : 2012년 1월 18일

관람 : 2012년 1월 19일

등급 : 15세 관람가

 

 

법정... 영화와 현실의 차이

 

저는 법정스릴러 영화를 좋아합니다. 법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증거와 증인들을 통해 진실 게임을 하는 것을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배심원이 되어 영화 속에 푹 빠져드는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존 그리샴 원작의 할리우드 법정 스릴러를 꽤 선호하는 편인데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런어웨이], [레인메이커], [타임 투 킬], [의뢰인], [펠리칸 브리프], [야망의 함정] 등은 법정 스릴러의 쾌감을 제대로 안겨준 영화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법정은 그렇게 흥미진진한 곳이 아닙니다. 몇 년전 제가 다니는 회사의 분쟁으로 법정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소액 민사재판이기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관리부 책임자인 제가 떠밀리다시피해서 회사를 대표해서 법정에 섰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판사는 높은 곳에 앉아 권위 가득한 표정으로 주눅이 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상대편 담당자는 마치 잡아먹을 기세로 겁에 질린 저를 째려보고 있었으며, 자신의 사건을 기다리는 방청객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무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봤을 때에는 결정적인 증거와 증인으로 반전의 반전을 하며 사건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지만 제가 경험한 현실의 법정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소액 재판이라 그런지 각 사건에 대해서 10분 정도의 시간만 허락이 되었고, 재판은 10분 정도만 진행되다가 자꾸만 다음 기일로 미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판사가 나서서 서로 합의해서 조정하자며 부추기더군요. 결국 재판다운 재판은 하지 못하고 판사의 강요(합의안하면 선고할 때 불이익을 주겠다며 협박을 해서...)에 못이겨 저희도, 상대편도 결국 원하지 않은 합의를 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처음엔 '까짓거 재판이 별거야?'라는 생각으로 재판에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법정의 위압감과 숨막히는 분위기에 저는 '지던, 이기던, 어서 빨리 이 재판이 끝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계속 기일을 미루고 미루던 판사는 이제 제가 지칠대로 지친 것을 확인하자 조정건을 꺼내든 것이죠. 결국 진실을 밝히고 회사의 손해금을 전부 회수하겠다는 의지로 시작한 제 법정 체험은 몇 개월만에 판사가 원하는대로 적정한 수준에서 합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부러진 화살]의 법정이 진짜다.

 

그런 제 경험담이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작년 10월에 본 손영성 감독의 영화 [의뢰인]에 저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의뢰인]은 한국 법정 스릴러 영화로서 괄목할만한 흥행을 기록한 영화이며, 할리우드식 법정 스릴러를 표방함으로서 영화적 재미도 갖췄습니다. 하지만 저는 [의뢰인]의 법정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부러진 화살]의 법정은 다릅니다. 김경호(안성기)와 그의 변호사 박준(박원상)이 사법부의 권위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던 법정의 모습은 제가 섰던 법정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위압감과 답답함이 감도는 법정의 분위기, 높은 곳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판사의 권위적 모습은 영화를 보는 제게도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제가 경험한 것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당하게 자신의 말을 하던 김경호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권위적인 판사의 모습에 주눅이 들어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 판사가 원하는대로 상대편과 합의하며 재판을 끝냈지만, 김경호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판사에게 대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김경호의 모습이 저를 얼마나 속 시원하게 했는지는 말로도, 글로도 설명하기 힘듭니다. 판사에게 법 조항을 들먹이고, 자신의 말을 가로 막는 판사에게 '제 말을 자르지 마세요.'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김경호의 모습은 쾌감마저 느끼게 했습니다.

처음엔 저도 그를 '꼴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변호를 맡은 박준 역시 처음엔 그의 사건을 맡기를 거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남의 말을 듣지 않았고, 답답하게도 그저 원리원칙만을 내세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니 그는 '꼴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김경호의 태도를 사법부에 대한 도전이라는 생각에 무조건 짓밟으려 했던 심재열(문성근) 판사가 '꼴통'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며 신재열 판사에게 달려가서 한대 쥐어 박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더군요.

아마 제가 현실에서 그런 판사를 만났다면 저는 주눅이 들어서 그가 하자는대로 그저 끌려 갔을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재판이 끝나고 소주한잔을 기울이며 '억울하다'고 부질없는 하소연을 했겠죠. 정작 하소연을 해야할 법정에서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말입니다. 결국 [부러진 화살]의 영화적 재미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법부의 이해할 수 없는 권위 의식이 스스로 만들어낸 셈입니다.

 

 

진실의 대가는 썼지만 지킬 가치는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김경호의 고집은 원리원칙이 통하지 않은 우리나라에 부적합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 오류를 지적한 그는 원리원칙대로 그 일을 처리하기를 원했지만 대학은 그들의 권위가 떨어진다며 오류를 덮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교수지위 확인 소송에서 원리원칙을 지키지 않은 판사 때문에 억울하게 패소한(이 재판과정은 대부분 생략되었습니다.) 김경호는 홧김에 석궁을 들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담당 판사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김경호의 행동은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계속 불공정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죠.

김경호가 원리원칙을 요구하면 할수록 그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교수 자리를 잃었고, 이제는 살인 미수 혐의까지 뒤집어 쓴 것이죠. 그런데도 김경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는 끝까지 원리원칙을 주장했고, 판사 앞에서 제발 법대로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김경호가 교도소에서 몹쓸 짓을 당하는 장면까지 와서는 영화를 보는 저조차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은 이 싸움을 그냥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데 혼자 싸워봤자 결국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폭력과 불이익 뿐이니까요.

하지만 박준 변호사는 말합니다. 100년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드레피스 사건을 기억하라고. 잘못된 증거 자료에 기초해 법정은 드레피스를 간첩으로 몰아 갔고, 결국 진범이 나타났지만 사법부의 권위가 추락할 것을 염려하여 이 사건을 은폐했던 프랑스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치욕적인 그 사건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비록 당장은 권력을 움켜쥔 판사가 승리를 거둘지도 모릅니다. 비록 당장은 힘 없는 개인은 그렇게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고 능욕의 세월을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이 밝혀지는 그 순간이 바로 사법부의 권위가 진정으로 추락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박준 변호사는 최후 변론에서 신재열 판사에게 부끄러운줄 알라며 일침을 가합니다. 그 순간, 저는 잠시라도 포기하고 싶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건 순진한 다윗과 야만적인 골리앗의 싸움이다.

 

사건을 취재하던 여기자 장은서(김지호)는 말합니다. 이건 순진한 다윗과 야만적인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다윗은 순진하게 원리원칙을 내세우며 정직하게 싸우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골리앗은 반칙을 써가며 야만적으로 다윗에게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건 해보나 마나 누가 이길지 뻔히 보이는 싸움인 셈이죠.

네, 맞습니다. 김경호는 졌습니다. 실제 이 영화의 모델인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였던 김명호는 결국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작년 1월에 만기 출소했다고 합니다. 박준도 졌습니다. 그는 판사에게 사건을 제대로 봐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결국 묵살당했고, 김경호가 감옥에 가는 것을 막아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김경호와 박준이 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오히려 진정한 패자는 신재열 판사와 사건을 조작한 사법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골리앗이 야만적으로 다윗을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다윗이 위기를 맞이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기억 속의 승자는 골리앗이 아닌 다윗입니다. [부러진 화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원리원칙을 지켜낸 김경호가 진정한 승자인 셈입니다.

 

[까]이후 무려 14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정지영 감독은 노장 감독의 노련한 연출 솜씨를 뽐냈습니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풀어냈고, 영화적 상상력을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어 냈습니다. 

놀랍게도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영화 속에서 전부 꺼내놓습니다. 마치 거침없이 판사에게 자신의 할 말을 다하는 김경호의 모습처럼 [부러진 화살]은 거침 없이 사법부를 겨냥하면서 할 말을 전부 합니다. 

안성기의 연기는 왜 그가 대한민국 대표 배우인지 스스로 입증시켰습니다. 원리원칙에 대한 고집으로 똘똘 뭉친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 박원상, 나영희의 연기도 좋았는데, 그들 중에서 제가 진정으로 반가웠던 배우는 바로 김지호입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세 여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그녀는 [꼬리치는 남자]와 [인연]에 출연한 이후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솔직히 이들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는 보기 민망할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그녀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연기력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그녀는 앞으로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부러진 화살]은 2012년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이라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그러한 평가가 결코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개판이 되어 버린 재판을 보여주며 영화적 재미와 주제의식을 결코 잃지 않은 그런 노련한 영화입니다.

 

 

김경호는 결국 패했다. 그런데 그러한 영화가 오히려 통쾌하다.

원리원칙을 향한 이 남자의 외침이 관객에게 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소시민들이 권력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원리원칙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힘든가보다.

원리원칙을 지키는 권력자를 찾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