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친구와 연인사이] - 사랑은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쭈니-1 2011. 2. 17. 08:50

 

 

감독 : 이반 라이트만

주연 : 애쉬튼 커처, 나탈리 포트만, 케빈 클라인

개봉 : 2011년 2월 10일

관람 : 2011년 2월 16일

등급 : 18세 이상

 

 

나는 사랑에 관해서는 이상주의자였다.

 

사춘기 시절, 저는 생애 단 한 번뿐인 사랑을 믿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생애 딱 한 번 찾아오는 것이며, 그러한 사랑이 내 앞에 오면 운명처럼 그 사랑을 알아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주위의 여자 아이들에게 쉽게 제 사랑을 허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다가 그 사랑이 깨지면 내 생애 단 한 번뿐인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는 서른 즈음까지 솔로였습니다.) 

하지만 제 주위엔 여자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위로 누나와 밑으로 여동생이 있었던 관계로 여자 아이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들과 친구라는 명목으로 친하게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그런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진정한 내 사랑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많이 외로워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같은 짓이었는데 그땐 정말 첫 눈에 반하는 그런 운명같은 사랑을 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 당시 제가 자주 만나던 여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나 결혼 전까지 가끔 연락하고 지냈을 정도로 꽤 오래된 친구인 셈입니다.

친구들은 제가 그녀와 사귀고 있다고 생각을 했을 정도로 그녀와 저는 자주, 그리고 오랜 시간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친구 이상의 선을 절대 넘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단 둘이 여행을 가기도 했고, 방학 때는 단양에 있는 그녀의 부모님 집에 무작정 놀러가 며칠간 지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녀와 제가 친구 사이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 주위 사람들은 '사귀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놀라더군요. 그러나 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진정한 우정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와 저의 관계는 그런 제 믿음의 결과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믿음이 깨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저는 IMF사태로 인하여 취업이 되지 않자 기분 전화 겸 그녀와 단 둘이 일주일 동안 동해안 일주를 했습니다. 물론 잠도 한 침대에서 같이 잤습니다. 그런데 여행 막바지에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로 그녀와 싸웠고, 여행을 다녀온지 몇 달 후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녀의 결혼식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제서야 여행 막바지에 저와 그녀가 싸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없이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을까?

 

남자와 여자가 만납니다. 그들은 '우린 사랑하지 않아!'라고 단정짓고 만남을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짐하고 선을 인위적으로 긋는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감정이 자라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도 그랬는지 모릅니다. 저는 '내 생애 사랑은 단 한 번 뿐이고, 넌 그냥 친구일 뿐이야.'라고 그녀와의 관계에 선을 그었고, 그녀 역시 그러한 제 생각에 동조해줬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동안 그녀도 모르게 나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겨울날의 동해안 일주는 그녀가 제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기 위한 여행이었고, 저는 그러한 그녀의 감정을 끝내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결혼이라는 방법으로 제게 결별을 선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아담(애쉬튼 커처)와 엠마(나탈리 포트만)도 마찬가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헤어진 애인이 아버지의 여자가 되자 충격을 받았고, 그러한 자신을 위로해줄 여자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엠마는 바쁜 인턴 생활 도중에 자신의 성욕을 채워줄 남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사랑은 하지 않고 섹스만 하기도 약속합니다. 사랑이라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엔 아담과 엠마는 처음엔 서로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린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강하게 부정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이 조금씩 싹 트고 있었습니다.

엠마가 동료 인턴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담은 질투심이 폭발하여 남자들의 유치한 깐죽거림을 해댑니다. 엠마도 마찬가지인데 아담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립니다.

사랑을 하면 가장 먼저 그 사람에 대한 소유욕이 발동한다고 합니다. 질투심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소유욕을 드러내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의 표현이며, 그것은 또한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담과 엠마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싹 트고 있었고, 그러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아담은 엠마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난 사랑을 하지 않겠어.'라고 인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던 엠마는 그렇게 자라난 사랑에 당혹스러워하며 아담에게서 도망쳐버립니다.

 

 

나탈리 포트만에게 반하다.

 

이후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뻔한 설정대로만 흘러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로맨틱 코미디의 진정한 재미는 바로 그러한 뻔한 설정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이반 라이트만 감독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관계를 시작한 남녀가 어떻게 사랑이라는 예기치 못한 감정을 키워 나가게 되는가에 대해서 특별하지 않지만 충분히 사랑스럽게 영화 속에 그려나갑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애쉬튼 커쳐는 장난 꾸러기의 모습과 순수한 청년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매력을 보여줍니다. [열두명의 웬수들]에서도 그랬고, [우리, 사랑일까요?]에서도 그랬으며, [S러버]에서도 그랬습니다. [친구와 연인사이]에 그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아담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애쉬튼 커처를 위한 맞춤 옷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캐릭터를 연기한 셈입니다.

 

하지만 진정 놀라운 것은 나탈리 포트만입니다. 애쉬튼 커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서 자연스러웠지만, 나탈리 포트만의 경우는 마치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키는데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입니다.

애쉬튼 커처에 비해 몸집도 작고, [브이 포 벤데타], [브라더스], [블랙 스완]등 주로 개성강한 영화에서 개성강한 연기를 펼쳤던 그녀이기에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은 잘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으로 [친구와 연인사이]를 보고 나탈리 포트만에게 반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모습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든 사랑에 어찌할줄 모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는 다른 로맨틱 코미디의 단골 여배우보다 훨씬 사랑스럽고 귀여웠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술에 취해 제대로 질투심을 폭발시키는 모습은 '저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은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깜짝 배우는 바로 아담의 아버지인 앨빈 역을 맡은 케빈 클라인입니다. 한때 멕 라이언과 함께 전설적인 로맨틱 코미디 [프렌치 키스]의 주인공을 맡았던 섹시가이  케빈 클라인은 이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들의 헤어진 애인과 사랑에 빠진 철 없는 아버지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케빈 클라인의 저력은 앨빈을 그냥 철 없는 아버지로 남겨두지 않고 굉장히 매력적이 캐릭터로 재탄생시킵니다. 

앨빈은 '왜 하필 내 전 애인이냐?'고 항의하는 아담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와 연인사이]를 관람하던 저는 그 한마디에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나 이제부터 저 여자를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한다고 해서 정말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엠마처럼 '난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거야.'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절대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이 인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생애 단 한 번의 사랑을 꿈꿨던 젊은 시절의 저는 결국 그 좋은 20대 시절을 연애한번 하지 못한채 보내버렸습니다. 제가 제 감정에 조금 솔직했다면 저는 외로움으로 시들어져버린 20대를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엠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그녀는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담의 사랑을 되찾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영화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엠마는 영영 아담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다행히도 뒤늦게라도 제가 그토록 바라던 생애 단 한 번뿐인 사랑을 만나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만(과거 사랑 이야기 실컷 해놓고 마지막에 구피에 대한 아부를... ^^;),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사랑에 대해 겁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운명적인 사랑의 환상에 빠져 사랑을 고르려 했던 제 자만심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친구와 연인사이]는 어찌보면 상당히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이 영화를 보며 젊은 시절 어리석었던 제 모습이 떠올라 영화를 더욱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감정에 솔직해라.

진정한 사랑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그것을 놓친다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평생 원망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