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용승
주연 : 신하균, 도경수, 김동영
개봉 : 2017년 11월 15일
관람 : 2017년 11월 15일
등급 : 15세 관람가
20년전 나도 비디오방 알바였다.
지난 주말, 쉬지 못하고 무박2일 여수 갈치 낚시를 다녀왔고, 이번 주말 역시 쉬지 못하고 주말에 회사 재고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젊었을 땐 며칠 밤을 새워도 몸이 버텨줬는데, 40대가 되고나니 하루만 무리해도 곧바로 몸에서 이상신호가 옵니다. 게다가 날씨마저 갑자기 추워져서 제 몸은 몸살에 걸려 앓아 눕기에 최적의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 연차 휴가를 냈습니다. 지난 1일에 이미 연차 휴가를 냈었기에 조금 눈치가 보이기도 했지만, 이번 주말 멀쩡한 몸으로 재고조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번 연차 휴가의 계획은 푹 쉬는 것입니다. 하지만 침대에서 뒹구는 것만이 꼭 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죠. 그래서 저는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그 결과 조금 늦은 아침을 맞이했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 삼각김밥을 먹으며 바쁘다는 핑계로 놓쳣던 영화를 무려 세 편이나 봤으며, 집에 돌아와선 치맥으로 빈 속을 달래줬고, 오후 5시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아주 푹 잤습니다. 이렇게 정말 하고 싶은대로 하루를 보내고나니 컨디션이 좋아졌습니다.
이번 연차 휴가 동안 본 세 편의 영화는 [7호실]과 [미옥], 그리고 [해피 데스데이]입니다. 조금 밝은 분위기의 영화가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 세 편이 당첨되었네요. 그 중에서 [7호실]은 연차 휴가 당일 개봉한 신작입니다. 제가 [7호실]을 첫번째 영화로 선택한 이유는 20년전 비디오방 알바생이었던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 졸업을 앞뒀지만 IMF로 인하여 취업이 되지 않던 상황에서 저는 한국외대 근처 비디오방에서 새벽타임 알바를 했었습니다. 당시 저는 불안한 미래에 방황하던 청년이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에 둘러싸여 돈도 벌고, 밤새 영화도 보며 나름 즐거웠습니다. [7호실]은 비디오방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DVD방을 무대로한 영화입니다.
20년 전, 새벽 시간대 텅빈 비디오방은
나만의 영화천국이었다.
망해가는 DVD방 사장의 사정
[7호실]은 두식(신하균)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폼잡으며 한강변을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첫 장면의 실상은 곧바로 공개됩니다. 사실 두식은 DVD방에 손님이 없자 대리운전 알바를 하고 있었고, 손님의 썬글라스를 훔치는 찌질함도 보여줍니다. 그래도 명색이 압구정동의 DVD방 사장인데 두식의 처지는 처량하기만합니다. 월세는 10개월째 밀린 상태이고, 알바비도 200만원 가까이 지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게를 내놓았지만 5개월째 매수자는 나타나지 않고, 그러는 사이 1억원의 권리금은 자꾸 떨어지기만합니다. 두식은 부동산 중개 사무실에 가서 협박과 사정을 번갈아가며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상권에서 두식의 DVD방이 팔리는 것은 요원해보이기만 할 뿐입니다.
두식이 이제는 사양사업이 되어버린 DVD방을 시작한 이유는 누군가가 DVD방으로 대박을 쳤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소문을 들었던 것은 10년 전으로 두식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죠. 그가 살아남을 방법은 어서 빨리 DVD방을 팔아버리고, 새 출발을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어리석은 매수자를 만나야만합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망할 위기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봤던 단막극이 있습니다. 참교육을 위해 전교조 활동을 하던 선생이 결국 현실에 부딪혀 학교에 사직서를 냅니다. 그는 퇴직금과 은행빚을 내서 음식점을 개업하는데, 장사는 되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빠집니다. 어떻게든 철거 전에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팔아야 하는 상황. 결국 주인공은 학교 선생이자, 함께 전교조 활동을 하던 동료에게 가게를 팔기로 하고, 아들, 딸의 친구들을 동원해서 가게가 아주 잘 되는 것으로 포장합니다. 철없는 아들은 친구들과의 공짜 음식에 신이 나있지만, 대학생 딸은 자신이 살기 위해 동료를 죽음의 계곡으로 내모는 아버지를 실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만약 제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양심에 따른다면 모든 돈을 잃고, 감당하기 어려운 은행빚까지 떠안아야합니다. 그게 싫다면 순진한 다른 누군가를 나를 대신할 희생양으로 삼아야합니다. [7호실]의 두식은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게를 팔기 위해 필사적인 두식.
그의 희생양은 평생 교직에 몸 담았던 교감선생이다.
미래가 안보이는 알바생의 사정
갑갑한 현실에 내몰린 것은 DVD방 알바생 태정(도경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인의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학자금 대출금과 DVD방 알바생이라는 한심한 처지뿐입니다. 두식에게 밀린 200만원의 알바비중 조금이라도 먼저 주면 안되겠냐고 묻지만 가게가 팔리면 한꺼번에 주겠다는 핀잔만 듣습니다. 결국 태정은 음악 작업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노트북을 팔아야하는 상황까지 갑니다. 어찌보면 태정은 20년 전의 저와 닮았습니다. 비록 저는 부모님이라는 울타리가 있었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상황은 태정과 같습니다. 그래서 반항기가 가득한 태정의 모습이 남같지 않았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태정에게 유혹의 손길이 뻗쳐옵니다. 태정의 학자금은 대출해준 사채업자가 마약을 며칠간만 숨겨주면 학자금 대출금을 모두 없던 것으로 해준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물론 태정도 잘 압니다. 그것은 범죄라는 사실을... 만약 경찰에게 걸리면 그의 미래는 영영 범법자의 낙인이 찍혀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당장 학자금 대출을 갚지 않으면 사채업자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며, 망해가는 DVD방 알바생의 신분으로는 거액의 대출금을 갚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결국 태정은 위험한 거래에 응합니다.
태정이 마약을 DVD방 '7호실'에 감추고, 두식 역시 감전 사고로 죽은 조선족 알바생 한욱(김동영)의 시체를 '7호실'에 감추며 [7호실]의 전개를 절정으로 향해갑니다. 시체를 감추고 DVD방을 팔기위해 '7호실'을 잠궈야 하는 두식. 감춰둔 마약을 꺼내기 위해 '7호실'을 열어야 하는 태정. 게다가 범죄의 낌새를 느낀 우형사(전석호)가 DVD방에 찾아오며 살기 위한 두식과 태정의 몸부림은 더욱 치열해집니다.
위험한 거래에 응하는 태정.
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내건 확률낮은 도박이다.
을과 을의 싸움
[7호실]의 장르는 블랙코미디입니다. 블랙코미디는 웃음을 통해 환멸과 냉소를 표현하는 드라마의 형식으로 정의됩니다. 다시말해 블랙코미디는 '웃기는데 씁쓸하다.'라는 한줄평을 얻어내야만하는 장르의 영화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7호실]은 블랙코미디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을까요? 두식과 태정은 분명 절박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래를 내걸고 현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웃겨야 합니다. 시체를 숨겨야하는 두식의 상황과 마약을 찾아야하는 태정의 상황이 엇갈리며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씁쓸한 웃음을 줘야합니다. 자! 과연 이용승 감독은 영화의 어떤 부분에 씁쓸한 웃음을 숨겨놓은 것일까요?
이용승 감독은 영화의 액션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각자의 생존을 건 두식과 태정의 한판 승부. 어찌보면 비장할 수 밖에 없는 이 장면에서 두식과 태정은 슬랩스틱 코미디와 같은 액션을 선보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일이도 모릅니다. 두식과 태정이 멋진 액션을 펼칠 수 있는 전문 싸움꾼도 아니고, 서로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생사를 건 싸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섬유탈취제, DVD 케이스, 가게 명함 등 주변에 흔히 있는 평범한 물건을 활용한 두식과 태정의 싸움은 영화를 보는 제게 씁쓸한 웃음을 안겨줬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두식과 태정의 한판 승부외에는 [7호실]에서 관객에게 씁쓸한 웃음을 안겨주는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두식과 태정의 상황을 더욱 처절하게 표현해야할 상황에서 어설픈 블랙코미디를 흉내내며 가볍게 처리한 부분이 아쉽게 느껴질 뿐입니다. 두식과 태정이 처한 처절한 상황이 가볍게 처리되며 오히려 영화의 긴장감은 떨어졌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을과 을의 싸움이라는 영화의 설정도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블랙코미디를 포기하고, 좀더 현실적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을과 을의 싸움 [7호실]의 씁쓸한 웃음은 이 장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갑갑한 현실은 잡아냈지만, 빵빵한 재미는 잡아내지 못했다. 분명 [7호실]은 을의 입장에서 살아야만하는 사람들의 갑갑한 현실을 잘 잡아낸 영화입니다. 을 중에서도 슈퍼 을일 수 밖에 없는 영세자영업자와 알바생이 처한 극한의 상황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을 풍자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이용승 감독의 전작인 [10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10분]은 정규직을 꿈꾸는 비정규직 사원의 이야기로 이용승 감독은 '출근이 인생의 목표인 당신에게 바친다.'라는 연출변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7호실]은 [10분]에서 한걸은 더 나아가 사회에 나왔어도 평생 을일 수 밖에 없는 흙수저들의 삶을 담아 냈습니다. 하지만 메시지 중심의 독립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했던 이용승 감독의 이력은 상업영화일 수 밖에 없는 [7호실]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용승 감독은 [7호실]을 현실을 담아낸 팍팍한 영화가 아닌,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를 이용해서 부드럽게 잡아내려합니다. 이는 다시말해 [7호실]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상업영화로써의 재미도 잡겠다는 포석입니다. 하지만 상업영화에 익숙하지 못한 이용승 감독의 연출력은 [7호실]의 상업영화적 재미를 이끌어내지는 못합니다. 20년전 비디오방 알바의 경험도 있고 IMF시절, 미래가 막막했던 태정과도 같은 상황에 처하기도 했던 저로써는 분명 [7호실]의 상황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재미있었나?'라고 누군가 물으면 '그렇다.'라고 확실하게 대답해줄 수는 없습니다. 블랙코미디라고 하기엔 웃음이 없었고, 팍팍한 현실에 대한 가슴아픈 이야기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가벼웠습니다. 그렇다고 영화 마지막에 가슴 후련한 한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여운이 남는 마무리 또한 아닙니다. 그냥 이도저도 아닌, 상업영화라고 하기엔 재미가 부족하고, 독립영화라고 하기엔 메시지의 임팩트가 약한, 조금 어정쩡함이 [7호실]에 대한 제 감상입니다. 乙이 살기 위해 다른 乙을 희생시켜야하는 비정한 세상이 아닌 乙과 乙이 서로 도와가며 잘 살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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