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배리 젠킨스
주연 : 알렉스 R. 히버트, 에쉬튼 샌더스, 트레반테 로데스, 메허살레하쉬바즈 엘리, 나오미 해리스
개봉 : 2017년 2월 22일
관람 : 2017년 3월 2일
등급 : 15세 관람가
올해 아카데미도 내 예상을 빗나갔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2월 26일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사실 저는 이번 아카데미에서 [라라랜드]의 작품상 수상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뮤지컬 영화에 대한 아카데미의 사랑은 유명하고, [라라랜드] 자체가 워낙에 잘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라라랜드]는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등 주요 부문을 휩쓸었습니다. 유일한 경쟁작이라 할 수 있는 [문라이트]가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는데 그친 것과 비교한다면 [라라랜드]가 [문라이트]에 압승을 거두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제 예상에 맞춰 [라라랜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타이타닉]과 최다 노미네이트 타이기록을 세웠습니다. 실제 시상식에서도 [라라랜드]가 음악상, 주제가상, 미술상, 촬영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작품상 수상이 유력해졌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대로 작품상 시상자인 워렌 비티가 [라라랜드]를 호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아카데미 역사상 최악의 실수가 발생한 것입니다. 사실 작품상은 [라라랜드]가 아닌 [문라이트]였고, 워렌 비티에게 건네진 것은 작품상 수상작이 적힌 봉투가 아닌 여우주연상(엠마 스톤) 수상작이 적힌 봉투였던 것입니다.
[라라랜드]의 작품상 수상을 기대했던 저로써는 뒷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아카데미에 대한 제 예상은 거의 맞은 적이 없습니다. [스포트라이트], [버드맨], [노예 12년] 등 최근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은 제 입장에서는 언제나 의외의 선택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이번만큼은 제 예상이 맞을줄 알았는데...
흑인, 마약, 동성애 등 온갖 자극적인 소재가 여기 모였다.
[문라이트]가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은 저는 뒤늦게 [문라이트]를 보기 위해 영화 상영시간대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문라이트]는 제게 있어서 기대작이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최근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을 우선적으로 극장에서 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문라이트]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그 이유는 [문라이트]에는 제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온갖 소재들이 전부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문라이트]는 흑인 영화입니다. 흑인 영화는 흑인들만의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흥행작이라 할지라도 저는 영화적 재미를 거의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입니다. 물론 저는 동성애 혐오자는 아닙니다. 그들의 사랑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동성애 장면은 불편합니다. 이안 감독의 걸작 [브로크백 마운틴]조차도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라이트]는 흑인동성애 영화입니다. 제가 편안하게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영화는 분명 아닌 셈입니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지난 목요일 퇴근 후 [문라이트]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 제 발걸음은 무겁기만했습니다. 그냥 [문라이트]는 포기하고 [23 아이덴티티]를 봐야하나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라라랜드]를 무너뜨리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가 궁금하기도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 굳게 먹고 [문라이트]를 상영하는 극장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렇게 자극적인 소재로, 이렇게 잔잔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문라이트]는 제가 걱정했던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분명 이 영화는 흑인 영화이고, 마약과 매춘, 동성애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전혀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동성애 장면도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라이트]는 너무 잔잔합니다. 그저 한 흑인 소년의 일상을 잔잔하게 쫓아가기만합니다. 영화의 소재만 보고 자극적인 영화를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지루했을 것이고, 저처럼 자극적인 소재 때문에 걱정을 하고 본 관객이라면 오히려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문라이트]는 세개의 챕터로 나눕니다. 첫번째 챕터인 'little'은 어린 흑인 소년 샤이론(알렉스 R. 히버트)이 동네 아이들에게 쫓기다가 우연히 마약상인 후안(매허살레하쉬바즈 엘리)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매춘과 마약에 빠진 어머니 폴라(나오미 해리스)에 기댈 수 없었던 샤이론은 후안에게 인생을 배웁니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마.'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해줍니다.
두번째 챕터인 'chiron'은 소년이 된 샤이론(애쉬튼 샌더스)의 일상을 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을 당하던 샤이론은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친구 케빈을 만납니다. 하지만 케빈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게되고, 결국 소년원에 감금됩니다. 세번째 쳅터인 'black'은 마약상이된 샤이론(트레반테 로데스)이 10년만에 케빈의 전화를 받으며 시작됩니다. 케빈의 전화로 샤이론은 그동안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의 성정체성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리틀에서 샤이론으로 성장하고, 블랙으로 완성되다.
여기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챕터의 소제목입니다. [문라이트] 자체가 샤이론의 성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샤이론의 어린시절, 청소년기, 그리고 성년기로 챕터가 나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왜 하필 챕터의 소제목이 리틀, 샤이론, 블랙인 것일까요? 그 이유는 챕터의 제목이 샤이론의 성장을 함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샤이론은 또래 아이들에게 리틀이라 불립니다. 별명 그대로 남들에 비해 몸집이 작은 샤이론은 아이들에게 놀림과 괴롭힘을 당합니다. 하지만 마약에 취한 엄마에게조차 받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후안과 테레사(자넬 모네)에게 받으며 그는 더이상 리틀이 아닌 샤이론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샤이론의 성장은 후안과 테레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폴라가 테레사를 가짜 엄마라며 질투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해주지 못한 사랑을 그들이 해줬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블랙입니다. 블랙은 케빈이 샤이론을 부르는 그만의 애칭입니다. 소년원에 다녀온 이후 마약상으로 거친 인생을 살고 있는 샤이론은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몸집을 키우며 강한척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B라고 부르며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원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살기 위해 거짓으로 치장된 가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런데 마약상으로 하루하루를 살던 샤이론이 10년만에 케빈을 만나면서 비로서 자신이 원했던 진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후안의 가르침대로 자신이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세번째 챕터의 제목이 B가 아닌 블랙인 이유입니다.
달빛을 향해 뛰는 아이
앞서 언급했듯이 저는 영화 속의 동성애가 여전히 불편합니다. 하지만 샤이론의 사랑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빈민가의 흑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강해야만 했던 샤이론. 하지만 그가 진정 원했던 자신의 모습은 무시무시한 마약상 B가 아닌 케빈과의 사랑을 이루며 사는 평범한 동성애자 블랙이었던 것입니다. 샤이론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몰았던 자동차의 번호판이 'BLACK 305'인 것은 그가 아직도 케빈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05는 [문라이트]의 무대인 마이애미의 지역 번호라고합니다.)
그러고보니 시종일관 불안하게 흔들렸던 카메라가 샤이론과 케빈이 만나며 안정적으로 바뀐 것도 샤이론의 심정을 표현한 하나의 장치인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 나를 만져준 사람은 한명도 없었어.'라며 수줍게 고백하는 샤이론의 모습이 얼마나 애틋하게 느껴지던지... 그렇게 샤이론은 블랙으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모습을 찾게됩니다.
샤이론은 달빛을 향해 뛰던 아이였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달빛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샤이론은 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해 무작정 달려야만했습니다. 하지만 달빛을 잡을 수는 없지만 달빛에 파랗게 물들 수는 있습니다. 남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이 진정 원하는 모습을 되찾은 샤이론은 그렇게 잡히지 않는 달빛 속에서 파랗게 물들며 평생을 살 것입니다. 그러한 샤이론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것이 [문라이트]가 아카데미를 거머쥔 이유가 아닐까요?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 지루했고
흔들리는 화면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은 샤이론의 마지막 모습을 보니
극장을 나서는 내 마음이 흐뭇했다.
비록 그것이 남이 원하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샤이론은 행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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