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태윤
주연 : 정우, 강하늘, 김해숙, 이동휘, 한재영
개봉 : 2017년 2월 15일
관람 : 2017년 3월 1일
등급 : 15세 관람가
나도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했다.
1994년 대학에 입학하고 첫 발표수업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날의 발표는 기업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과대표였던 저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서 '기업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하는 것은 결국 돈이다.'라고 발표했었습니다. 물론 제 발표가 끝나고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어떻게 돈이 사람보다 중요하냐고 따졌고, 어떤 친구는 기업은 돈이 아닌 사회적 공익을 먼저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배우는 인사관리, 물류관리 등 모든 과목이 결국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냐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가 사회의 쓴 맛만 본채 1년만에 사표를 던지고,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해서 전문대에 입학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뒤늦게 대학을 간 이유는 졸업 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졸 사원으로 10년을 근무하는 것보다 대졸 신입사원의 초봉이 더 많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제 첫 직장에서 보고 배웠거든요. 그러한 제 경험이 발표수업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온 것입니다.
무려 23년전 일입니다. 그런데 문득 제가 그날의 일을 기억한 것은 [재심]에서 돈 없고 빽 없는 변호사 이준영(정우)이 거대 로펌의 구필호(이경영) 대표 앞에서 늘어놓은 주장 때문입니다. 그는 거대 로펌의 변호사들에게 '돈 벌기 위해서 그렇게 죽도록 공부한 것이 아니냐?'며 묻습니다. 그러한 준영의 모습에서 저는 23년전의 제 모습이 문득 떠오른 것입니다.
돈 없고 빽 없는 변호사, 한방을 위해 '재심'을 시작하다.
준영이 변호사가 된 이유도 제가 대학을 간 이유와 비슷했습니다. 그는 '준법정신이 부족함'이라는 고등학교 담임선생이 생활기록부에 적은 의견을 보고 오기가 생겨 사법고시에 뛰어들었다고 조현우(강하늘)에게 고백합니다. 결국 그가 변호사가 된 이유는 어떤 사명감이나, 어릴적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저 오기로, 그리고 막연하게 변호사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부에 대한 욕심이 아닌 졸업후 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 대학을 간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돈 밖에 모르는 준영은 왜 현우의 변호를 맡게 된 것일까요? 현우와 그의 어머니 순임(김해숙)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오히려 국가의 구상권 청구로 인하여 거액의 빚더미를 떠안은 상황입니다. 다시말해 현우와 순임은 준영에게 변호사비를 낼 능력도 되지 않았습니다. 준영의 기준대로라면 그는 돈이 안되는 현우의 변호를 절대로 맡아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준영은 현우의 변호를 덜컥 수락합니다. 그 이유는 유명세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당장의 이익은 없지만, 현우의 사건으로 유명세를 얻으면 자신의 몸값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준영의 입장에서 현우가 진범이건, 아니건 상관없습니다. 그저 현우는 자신의 유명세를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현우와 함께 15년전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그는 점점 돈과 유명세 때문이 아닌, 현우를 위해서 진실을 캐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됩니다. 결국 [재심]은 살인무명을 쓰고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현우의 진실 찾기와 속물 변호사 준영이 진정한 변호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재심]은 2000년 8월에 익산시 약촌오거리에서 발생한 택시기사 피살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영화에서처럼 처음엔 최씨 성을 가진 남성 청소년이 범인으로 지목됩니다. 그는 1심에서 범행을 부인해 징역 15년이 선고되었고, 2심에서는 범행을 시인함으로써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고합니다. 결국 그는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되었고 10년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내야만했습니다.
그러나 2003년 6월 진범으로 보이는 인물 김모씨가 잡힙니다. 김모씨의 진술이 최군의 진술보다 더 범행정황에 가까웠기에 그가 범인임은 누가 봐도 틀림이 없었지만 어이없게도 검찰은 김모씨에 대한 수사를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잘못된 판단으로 죄없는 최군을 감옥에 보낸 검찰의 실수가 들춰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최군은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평생을 살뻔 했지만 박준영 변호사의 도움으로 재심을 청구해 2016년 11월 17일 광주고법 제1형사부로부터 살인 혐의로 기소된 최군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진범으로 지목된 김모씨를 체포, 구속 기소하였다고합니다.
물론 [재심]은 익산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영화화함에 있어서 영화적으로 많은 각색을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악질적인 백철기(한재영) 형사라는 캐릭터가 탄생되었고, 준영의 오랜 친구인 변호사 모창환(이동휘) 캐릭터도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최군의 억울함과 뒤늦게 나타난 진범을 외면한 검찰, 그리고 끝까지 진실을 위해 싸운 한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진실은 돈보다 중요하다.
처음엔 돈과 유명세 때문에 시작했지만 현우와 함께 사건의 진실을 밝히면서 준영은 점점 진실을 위해 싸우게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준영에게 창환은 묻습니다. 이길 확률이 적은 '재심'보다 위로금을 넉넉히 챙겨주는 것이 현우를 위해서라도 좋은 선택이 아니냐고... 어쩌면 창환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현우가 살인자의 누명을 벗는다고해도 억울함을 벗는 것 외에는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10년을 감옥에서 복역을 했고, 여전히 그는 가난에 허덕일 것입니다. 하지만 '재심' 대신 돈을 선택한다면 평생 살인자의 오명을 안고 살아야할테지만, 남은 인생을 편안하게 살 수있는 거액의 위로금을 건질 수 있습니다.
진실과 돈.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돈 때문에 현우의 변호사가 된 준영은 선택의 기로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돈이 아닌 진실을 선택합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변호사가 되었다.'라며 당당하게 주장하던 그가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23년전 기업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라도 당당하게 주장하던 저 역시도 그러한 준영의 변화에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지고보면 돈은 행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돈이 없어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는 수천, 수만개의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대체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거짓으로 진실을 감추려고해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릴 뿐이죠. 23년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저는 [재심]에 더욱 빠져들 수가 있었습니다.
실화의 힘은 이렇게 막강하구나.
사실 [재심]은 제 기대작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정우와 강하늘의 브로맨스는 기대가 되었지만, 그 이상의 기대치는 없었습니다. 특히 워낙 유명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재심]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뻔히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만약 [재심]이 [조작된 도시]를 밀어내고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재심]의 극장 관람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심]말고도 보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았기에...
3월 1일 아침, 저는 구피와 웅이가 늦잠을 자는 틈을 이용해서 [재심]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참 잘 만들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 제가 예상했던대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할 틈이 없이 영화에 대한 몰입도가 굉장했습니다. 특히 정우와 강하늘은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재심]에서는 연기력으로 실화에 담긴 울림을 강하게 분출하더군요.
이것이 실화에 담겨져있는 힘입니다. 실화는 것을 우리도 어쩌면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내가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간 감옥에 갇힌다면... 이라는 생각으로 영화에 한번 빠져드니 세상에 대한 반항기가 가득한 현우의 모습이 가슴 아팠고, 저 역시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속물이었기에 준영의 변화가 와닿았습니다. 이렇듯 [재심]은 실화의 힘을 영화라는 틀 안에서 제대로 발휘한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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