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주영
주연 : 이병헌, 공효진, 안소희
개봉 : 2017년 2월 22일
관람 : 2017년 2월 27일
등급 : 15세 관람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행복
2월 27일 꿀맛같은 연차 휴가를 냈습니다. 그날 오랫만에 웅이와 함께 늦잠을 잤고, 포켓몬 GO의 포켓몬 중에서 웅이가 가장 좋아하는 파이리를 잡기 위해 부랴부랴 옷을 입고 노량진 근린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그깟 게임을 하기 위해 식사도 대충 떼우며 버스와 전철을 타고 대방역까지 가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파이리를 리자몽으로 진화시켰다며 활짝 웃는 웅이의 얼굴을 보니 연차 휴가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실컷 놀다보니 웅이가 공부를 해야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웅이는 오늘은 공부하지 않고 아빠랑 계속 놀면 안되냐고 묻지만, 그랬다가는 구피에게 혼쭐이 날 것을 알기에 아쉽게도 저와 웅이의 포켓몬 사냥은 오후 2시 30분에 끝마쳤습니다. 오후 4시, 웅이가 공부를 시작하는 시간. 저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제 계획은 [싱글라이더]와 [23 아이덴티티]를 연달아 보는 것. 하지만 그 계획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웅이는 공부 끝내고 저와 놀고 싶다며 보챘고, 제게 영화 한편만 보고 집에 와달라고 애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엔 그런 웅이가 야속했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까지, 토요일 아침에 [루시드 드림]을 본 것을 제외하고는 3박4일을 온전히 웅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월요일 저녁시간대마저 웅이는 자기와 함께 보내자고 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돼! 나도 영화봐야한단 말이야.'라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싱글라이더]를 보고나니 과연 영화를 보기 위해 웅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하는 것이 맞는 선택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23 아이덴티티] 예매를 취소하고 웅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재훈의 선택은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을까?
그러고보니 [루시드 드림]에 이어 [싱글라이더]까지 저는 부성애를 다룬 영화를 연달아 봤습니다. 하지만 [루시드 드림]의 부성애와 [싱글라이더]의 부성애는 서로 다릅니다. [루시드 드림]의 최대호(고수)가 납치된 아들을 찾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열혈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싱글라이더]의 강재훈(이병헌)은 뒤늦게 가족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사랑을 깨닫게 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증권회사의 지점장, 이것은 강재훈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룬 목표입니다. 그는 부실채권을 고객들에게 팔았고 그 대가로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이 고객들에게 팔아넘긴 부실채권이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갈줄 몰랐다는 그의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증권회사 사장의 이야기처럼 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단지 진실을 외면하고 얻게될 대가의 유혹이 너무 강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증권회사의 지점장에 되어 돈을 벌게된 재훈은 아내 수진(공효진)과 어린 아들을 호주로 보냅니다. 일정수준의 영어를 해야만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는 그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TV에서 기러기 아빠들의 이야기를 보곤합니다. 어린 자녀와 아내를 외국에 보내고 혼자 한국에서 외로운 삶을 사는 아빠들. 그들은 자식을 위해 자신은 희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 사회가 영어를 잘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한참 아빠의 사랑을 필요로하는 어린 자식들을 머나먼 외국땅으로 보내버리는 것은 아버지로써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재훈 역시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것은 희생이 아닌, 아빠의 사랑을 돈으로 대신한 무관심이었음을...
우리는 왜 그토록 정상에 오르려 발버둥치는 것일까?
[싱글라이더]는 고은 시인의 시 <그 꽃>으로 시작합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이 짤막한 시는 [싱글라이더]가 담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가끔 저는 산에 오릅니다. 평상시에 운동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기에 산에 오를 때는 너무 힘이 듭니다. 다리는 후덜거리고, 숨은 턱 밑까지 차 오릅니다.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는데, 특히 얼굴에 흐르는 땀 때문에 목에 두른 수건이 흥건해지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저는 산을 오릅니다. 오로지 산의 정상만 바라보며 한발 한발 앞으로 향해 내딛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것도 등산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지만 목표가 있기에 참고 버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막상 그 목표를 이룬 다음에는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재훈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터벅 터벅 산의 정상에서 내려오다보면 고은 시인의 시 처럼 예쁜 꽃도 보이고, 쉼터가 되어주는 듬직한 돌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냇가에서 시원함도 만끽하게 됩니다. 산 정상에 오른다는 목표가 사라진 후에서야 진정한 행복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정상에 올랐다가 모든 것을 잃고 한순간에 밑으로 추락한 재훈. 그는 호주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수진의 모습을 보며 그제서야 자신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미처 보지 못했던 행복을 보게 됩니다.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던 그 행복.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 이미 늦었음을 깨닫게됩니다.
지나와의 만남, 그리고 함께 사는 삶
사실 [싱글라이더]의 초반에 재훈이 그러했듯이 저 역시 수진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재훈이 한국에서 온갖 굴욕을 당하는 동안 수진은 호주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이웃 남자인 크리스와의 관계도 수진에 대한 제 배신감을 부추깁니다. 저는 수진이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으로 치닫으면서 진짜 이기적인 것은 수진이 아닌 재훈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진과 어린 아들을 호주로 보내버리고, 자신은 아버지로써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진과 아들은 호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재훈이 원했고, 그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수진과 아들의 인생을 결정해버린 것입니다.
수진은 호주라는 낯선 나라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선택을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동안은 남이 선택해준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귀찮아 포기했던 음악도 다시 시작했고, 이웃인 크리스와의 유대관계도 이어나간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가 없지만, 재훈은 그녀를 혼자 내버려뒀으니까요. 영화 후반 수진이 재훈과 함께 호주 이민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재훈은 그제서야 진정 이기적인 것은 수진이 아닌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재훈의 깨달음은 지나(안소희)와의 만남에서도 드러납니다. 호주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 지나는 재훈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합니다. 처음엔 그녀를 외면했던 재훈은 결국 그녀를 도우며 혼자가 아닌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느끼게됩니다. 어쩌면 재훈과 지나의 관계는 수진과 크리스의 관계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싱글라이더]는 이기적이던 재훈이 호주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병헌의 연기력만으로도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싱글라이더]를 보기 전에 이 영화에 반전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차단하고 [싱글라이더]를 보러갔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반전이 무엇일까? 라는 추리를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영화의 중반에 반전을 알아채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겨우 탈출한 지나를 도와주는 재훈의 장면에서 설마설마했다가, 수진이 키우는 강아지가 재훈을 따라나서는 장면에서 영화의 반전을 완전하게 알아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싱글라이더]가 반전을 영화적 재미로 삼은 스릴러 영화는 아니니까요. 오히려 이 영화의 반전은 재훈에 대한 연민을 더욱 부추기는 장치가 됩니다. 그리고 산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앞만 보며 열심히 걷던 관객들에게 잠시 멈춰서서 산 아래를 바라보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의 한가운데에는 이병헌의 연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생활로 인하여 논란을 일으킨 이병헌은 그러나 연기력으로 자신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도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싱글라이더]에서 이병헌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질투와 후회로 가득한 재훈의 표정만으로 이주영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모두 대변해줬으니까요. 영화가 끝나고 모든 것을 잃은채 쓸쓸히 걷던 재훈의 모습이 가슴 깊이 남았습니다. 그러한 재훈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되지않게 저는 오늘도 진정한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극장 밖을 나섰습니다.
영어를 잘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웅이에게 진정한 행복을 안겨줄까?
만약 그렇다면 나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기러기 아빠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웅이의 행복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영어 조기 교육이 아닌
아빠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추억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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