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기예르모 델 토로
주연 : 샐리 호킨스, 마이클 섀넌, 리차드 젠킨스, 옥타비아 스펜서
개봉 : 2018년 2월 22일
관람 : 2018년 2월 23일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토요일 근무에 대해 내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다.
직장인에게 주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황금보다 소중한 주말을 반납하고 회사에 나와 일을 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회사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수당을 주기도 하고, 어떤 회사는 대체 휴가를 주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많은 중소기업에서는 주말 반납에 대한 보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저희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에 대해서 저는 불만이 없습니다. 이번 주말 반납건은 제가 해야할 일은 아니었지만, 한명이라도 더 도와주면 수월해지는 일이었고, 그리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저는 기꺼이 제 토요일 휴식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내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퇴근 후 곧바로 영화를 보러 간 것입니다. 그날 제가 본 영화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입니다. 제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이 영화는 정체 불명의 수중 생명체와 사랑에 빠진 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특히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답게 기괴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는 평이 지배적이라 저는 일찌감치 이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관람등급입니다. 웅이와 함께 보고 싶었는데 [세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했습니다. 영화를 보기전 도대체 이 영화가 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지 궁금했습니다. 아무리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라고 할지라도 설마 괴생명체와 인간 여성의 노골적인 섹스씬이 담겨져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러 저러한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보는 동안 토요일에도 출근해서 일을 해야한다는 아쉬움은 어느사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넌 자기애가 너무 강하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날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날 사랑해달라고 할 수 있냐고...
나는 날 사랑한다. 그래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격려한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한 영화입니다. 당시는 냉전시대로 미국은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1957년 10월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11월에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를 태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하며 미국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이에 미국도 1958년 1월에 첫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1958년 10월에 미국 항공 우주국(나사)을 설립, 본격적으로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스퍼트를 올립니다. 하지만 소련은 1961년 4월 유리 가가린을 태운 첫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하며 다시한번 미국을 압도합니다.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첫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969년 7월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에 착륙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이전까지만해도 미국은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에서 번번히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러한 풍경은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서도 나오는데, 전쟁 영웅 출신인 리차드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아마존에서 잡아들인 수중 괴생명체를 해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괴생명체의 해부하여 우주 개발에 이용해야한다며 역설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소련은 이를 방해하려합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수중 괴생명체의 해부는 우주개발 경쟁과 별 연관이 없습니다. 소련의 스파이로 미국 항공 우주국의 비밀 연구소에 잠입한 호프스테들러 박사(마이클 스털버그)는 수중 괴생명체를 살려두고 계속 연구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우주개발 경쟁에서 한걸음 앞선 소련을 따라 잡기에 급급함 미국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수중 괴생명체 해부를 밀어부칩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이렇게 냉전시대의 우스꽝스러운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과 그로인하여 이성이 마비된 사람들의 광기를 잡아냅니다.
리차드 스트릭랜드는 냉전시대 광기에 사로잡힌 미국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그는 수중 괴생명체를 학대하고, 급기야 해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한 당위성, 정당성 따위는 없다. 그저 국가를 위해서라는 뜬구름만 존재할 뿐이다.
냉전시대의 광기에 맞선 사회적 약자들
백인 남성에 전쟁영웅 출신인 스트릭랜드는 60년대 미국의 주류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고급 캐딜락을 삽니다. 그런데 그러한 스트릭랜드의 캐딜락을 박살낸 것은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수중 괴생명체와 사랑에 빠진 엘라이자 에스포지토(샐리 호킨스)는 갓 태어났을 때부터 강에 버려진 고아이며, 그때 생긴 목의 상처로 인하여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 장애인입니다. 엘라이자와 이웃에 살며 수중 괴생명체 탈출의 공범이기도한 화가 자일스(리차드 젠킨스)는 동성애자입니다. 그는 맛없는 동네 프랜차이즈 파이집의 사장을 짝사랑하지만 그의 사랑은 엘라이자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뤄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엘라이자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는 젤다(옥타비아 스펜서)는 흑인 여성입니다.
결국 엘라이자, 자일스, 젤다는 장애인, 동성애자, 흑인여성이라는 당시 사회에서는 멸시했던 계층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 계층인 스트릭랜드를 엿보이고, 수중 괴생명체를 탈출시키며 그들을 멸시했던 사회에 대해 멋지게 한방을 먹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일스와 젤다가 엘라이자를 도와줬던 것은 아닙니다. 자일스는 수중 괴생명체를 구해줘야 한다는 엘라이자의 요청에 "그건 범죄야."라며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짝사랑하던 파이집 사장이 인종차별주의자에 동성애 혐오자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엘라이자 밖에 없음을 깨닫고 범행(?)에 적극 가담합니다. 젤다 역시 처음엔 엘라이자를 말립니다. 하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후에는 스트릭랜드의 무시무시한 협박에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단지 백인 사회에 순응하는 젤다의 무능한 남편의 입을 막지는 못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통쾌했던 장면은 자일스의 트럭이 스트릭랜드의 고급 캐딜락을 박살내는 장면과 젤다가 무능한 남편에게 평생 한마디로 하지 말라며 윽박지르는 장면이었습니다.
자일스는 영화의 화자이자, 감초와도 같은 존재이다.
짝사랑하던 파이집 사장이 자신을 벌레보듯 바라보자 좌절하지만,
수중 괴생명체의 손길이 머리숱을 풍성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마지막 순간까지
수중 괴생명체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맡기는 센스를 발휘하기도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이유
하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이 단순히 수중 괴생명체를 구하기 위한 엘라이자의 모험담이었다면 이 영화는 [E.T.]와 비슷한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그렇게 안전빵에 올인하는 감독이 아닙니다. 그의 초기작 [헬보이]는 코믹스를 원작으로한 영화 중에서도 가장 기괴했고, [퍼시픽 림]은 제2의 [트랜스포머]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줄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그런 그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어른들의 착한 동화 [E.T.]와 비슷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헛된 것입니다.
실제 [셰이프 오브 워터]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관객에게 강렬한 한방을 선사합니다. 정확한 시간에 기상해서 정확한 순서대로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엘라이자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그녀의 일상 중에서는 욕실에서의 자위행위가 있습니다. 엘라이자의 성적 외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장면같은데, 솔직히 이 장면을 볼때까지만해도 엘라이자의 자위 장면만 살짝 드러낸다면 15세 관람가 등급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처음 만남에서부터 수중 괴생명체에게 마음이 갔던 엘라이자는 스트릭랜드가 수중 괴생명체를 해부하려는 계획을 알게되자 자일스, 젤다, 호프스테틀러 박사의 도움으로 수중 괴생명체를 탈출시킵니다. 그리고 수중 괴생명체를와 욕실에서 사랑을 나눕니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해도 아무리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라 할지라도 수중 괴생명체와 인간 여성의 노골적인 섹스씬을 담아내진 못할 것이라는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습니다. 물론 인간과 괴생명체의 사랑을 다룬 영화가 처음은 아닙니다. [스피시스], [스플라이스] 등의 영화에서 인간 남성을 유혹하는 괴생명체가 나온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들 영화는 이종교배를 통한 공포가 주요 내용입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처럼 이종교배를 아름다운 사랑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제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네요.
지금까지 샐리 호킨스가 섹시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엘라이자가 수중 괴생명체를 안을 때의 그 행복한 표정은
그 어떤 영화의 여배우보다 섹시했다.
물의 모양, 그리고 사랑의 모양
확실한 것은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기괴한데 아름답습니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한 만큼 고풍스럽기도하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답게 잔혹하기도합니다. 가끔 웃기고, 가끔은 서글프지만, 결국엔 엘라이자와 수중 괴생명체의 사랑에 뭉클해집니다. 이 영화는 한가지 장르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의 원제인 '셰이프 오브 워터' 즉 물의 모양처럼 말이죠.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지게 됩니다. 메모난 그릇에서 물의 모양은 네모랗고, 동그란 그릇에선 동그랗습니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기괴하기도, 아름답기도, 잔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국내 개봉에서는 원제에 없던 부제가 붙었다는 점입니다. 부제는 '사랑의 모양'입니다. 원제가 '물의 모양'인데 아마도 이 영화의 국내 수입사는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를 통해 영화의 다양한 모양을 보충설명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물의 모양'보다 '사랑의 모양'이 이 영화의 주제에 더 어울리기도합니다. 물에 특별한 모양이 없듯이 사랑 역시 마찬가지로 엘라이자와 수중 괴생명체의 사랑 역시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순수한 사랑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종간의 기괴한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마지막 부분에선 몇 백년전 사랑에 빠진 시인이 썼다는 한 편의 시가 소개됩니다. '당신의 형태를 감지할 순 없어도 내 곁에 당신이 있음을 느껴요. 당신의 존재는 당신의 사랑으로 내 눈을 가득 채우고, 어디에든 당신이 있음으로 겸허할 수 밖에요.' 어쩌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 시처럼 다양한 모양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기괴하고, 잔혹하며 아름다운 다양한 사랑의 모양을 제게 보여줬습니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몇 개 부문을 가져갈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동안 기괴하다는 이유만으로 천대를 받았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역량이 이번 영화를 통해 인정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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